홍콩 공회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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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콩의 정당 겸 노동조합 단체로 홍콩 최대 노동조합 단체이며[3] 당원 규모 수만 보면 홍콩 최대의 정당이기도 하다. 경쟁단체들이 여럿 있지만 아무도 홍콩 공회연합회를 따라잡지 못한다. 정치성향은 친중파인데 다른 홍콩의 원내 좌파정당들이 민주파 성향을 지닌것과는 대조적이다.
2. 상세
1948년에 설립되었으며 홍콩내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이 설립한 노동조합이다. 처음부터 공산당과의 연계를 가졌고 라이벌로 국민당과의 연계를 가졌던 홍콩구룡연합총회와 대결하는 관계였고,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나 홍콩구룡연합총회는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면서 영국이 중화민국과 단교해서 활동에 제약이 많아진 데다가 무엇보다 중화민국의 영향력이 크게 쇠퇴한 탓에 현재는 쩌리 단체로 몰락했다. 현재는 공회련과 1990년 설립되어 민주파와 연계하고 있는 홍콩직공회연맹이 양대 노조.
이 당시 공회련은 자선 및 학교 설립, 주택 건설에[4] 자금을 대면서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이때부터 최대 노동조합 단체가 되어 홍콩 식민당국에게 노동권 보장, 복지확충, 민주주의 보장(!!!)[5] 중국에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요구하며 격렬하게 대립했으며. 또한 본토 공산당과 강한 연계를 가지며 67폭동에도 참여했다. 전투력이 어찌나 강했는지 이 때 영국에서는 홍콩 총독을 통해 홍콩에 긴급조치를 도입할 정도[6] 로 다급했다. 그러나 67폭동은 지속된 혼란으로 대중들이 친중파에게 질린데다가 공산당도 홍콩내 홍위병들을 손절하면서 결국 실패로 끝났고,[7] 어쨌든 67폭동이 실패한 이후로는 공회련은 최대 노동조합이라는 위치는 유지했지만 이전보다는 입지는 크게 좁혀지는 것은 어쩔수 없었고, 문제가 되었던 사회복지의 부재와 부정부패도 차츰차츰 해결되면서 정치적으로 재야단체로 남아있게 되었다. 중국이 영국과 협상하여 1984년 중영공동선언으로 1997년 홍콩 반환을 결정했을때 중공도 공회련은 과격파 이미지가 부담스러웠던지라 이들을 그대로 써먹기보다는 기업가나 보수주의자들을 써먹는게 낫다고 생각해서 좀 보수적인 마인드의 관료들이나 기업가들이 모인 민주건항협진연맹(민건련)을 밀어주었다. 그래도 민건련과 연합을 하면서 어느정도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명색이 홍콩 제1 노동조합이다보니 지속적으로 홍콩 입법회 선거와 홍콩 구의회 선거를 통해 노조 조직력을 통해 일정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 영국령 홍콩이었을 당시에 총독직선제 등 민주주의를 열정적으로 지지한 과거가 있는데 반해 홍콩 반환이후로 행정장관 직선제 주장을 완전히 버리고 국가안전법 통과는 정당하다는 소리를 내뱉는 어용단체나 다름없는 주장이나 내뱉기 때문에 민주파 진영으로부터 욕을 많이 먹는 정당이다. 또한 민건련이 친기업적이라면 공회련은 이보다 친 노동자적인 입장이 강하지만 실제로 경제정책에 있어서 민건련의 입장이 압도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에 실제 홍콩의 경제정책에 반영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애초에 잘 반영되었으면 홍콩 집값과 세금정책이 이 정도로 엉망이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2010년대 중후반 우산혁명으로 홍콩 당국이 부동산 문제에 눈을 뜨면서[8] 공회련의 입장이 차츰 반영되고 있기는하지만 영향력이 그렇게까지는 센것도 아니다.
원래 노동조합이다 보니 전투력은 워낙 강해서, 공회련 당원들이 중국 공산당 일부 및 삼합회와 공작하여 홍콩 민주파들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는 데 앞장서기도 한다. 그리고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때도 당연히 시위대를 공격하고 다녔지만, 이것 때문에 홍콩 시민들에게 낙인이 찍혔고 결국 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 이후 고작 5석만 건지면서 역대급으로 몰락하게 된다.
이런 처참한 몰락에도 불구하고 공회련의 스탠리 응 대표는 '''"사퇴할 수 없고, 이번 선거는 우리 잘못도 아니었다"'''고 사퇴 요구를 거부했다. 단, 스탠리 응 대표는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그랬지만, 행정부의 정책에 대해 무조건 다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노동자의 권익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정책만 지지할 것"이라고 밝혀서 캐리 람 행정부와는 선을 그었다. 기사
[1] 내각 집행위원회[2] 무소속으로 활동한다[3] 물론 이 대목을 보고 홍콩의 노동계급 다수가 친중파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공회련으로 통일된 친중파노조와 달리 민주파노조는 여러개로 나뉘어있기 때문. 실제로 홍콩은 상류층이 친중파가 더 많고 하류층(노동계급)이 민주파를 더 찍는다.[4] 이 당시 홍콩의 임금이 낮았던데 반해 학비가 위낙에 비싼지라 저소득층은 애들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했는데 공회련은 이런저런 지원을 통해 학비가 싼 학교를 만들어내며 저소득층들을 대거 학교로 내보내는데 공헌했다. 사회복지가 사치인 당시 홍콩의 상황속에서 홍콩의 문맹률을 대폭낮추고 교육수준을 대폭 늘린건 인정해야되는 대목이다. 다만 저소득층 대상 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은 사립학교를 다닌 이들에 비해서 차별을 당했다고. 또한 주택사정도 열악하기는 매한가지였는데 역시 좁은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아파트 건설에 지원을 해주면서 어쨌든 살곳을 마련해주었다.[5] 이 당시 홍콩 총독은 임명직이었고, 의회도 말이 의회일뿐, 보통선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공회련이 총독 직선제를 요구하는 등 진보적인 주장을 했지만 홍콩 반환이후로는 이런 진보적인 주장같은것은 싹 버렸다.[6] 이 긴급조치는 단 한 차례도 발동되지 않다가, 2019년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를 억누르기 위해 10월 4일 52년만에 처음 발동했다.[7] 특히 본토 홍위병이 억압당하는 홍콩 대중들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며 영국대사관에 침입하여 대사관 직원들을 두들겨패자 중국정부에서 그야말로 기겁을 했다. 중국 입장에서는 겉으로는 영국에게 홍콩을 내놓으라머 윽박지르는 입장이었지만 당시 중국의 경제가 침체세였던데다가, 대외적으로 폐쇄적인 정책을 펼쳤을때라 중국정부 입장에서도 홍콩은 매우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이었다.[8] 물론 어디까지나 체제유지용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