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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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제1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홍콩 섬을 청나라로부터 뜯어낸다. 이후 제2차 아편전쟁에서도 승리한 영국은 1860년 북부의 구룡반도를 또 떼어내어 홍콩 영역을 넓혔다.
그러나 그것도 부족했다고 판단한 영국은 1898년 신계 지구를 마지막으로 지금의 홍콩 영역을 확정했는데, 마지막의 경우 영구 소유가 아닌 '''99년 임차'''였으나 조약의 말미에 '''"as good as forever(영원한거나 마찬가지)"'''라고 써놨다, 즉 문서로는 99년이만, 실제로는 홍콩을 반환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
이후 세계 대전과 국공 대립으로 홍콩 문제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지만[3] , 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패배로 인한 중국 대륙의 공산화가 진행되면서 이에 반대하던 수많은 대륙인들이 홍콩으로 몰려들었다. 홍콩의 인구는 급속도로 불어났으며, 대륙에서 유입된 인재들을 바탕으로 국제무역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50년 티베트를 점령한 인민해방군은 서방과의 교섭 창구를 남겨둘 필요가 있고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한 영국 정부를 의식하여 홍콩에 접근하지 않았으며, 1970년대까지는 홍콩의 주권 문제가 거의 잊히는 듯 했다. 그러나 1979년 머레이 맥클레호스 홍콩 총독의 베이징 방문을 시작으로 1980년대에 들어 신계 지역의 조차 기간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영국은 중국과 협상에 나선다.
마가렛 대처 내각은 신계지구의 임차기간을 15년 더 연장해 2012년까지 갖는 방법을 고려했으나, 중국 공산당은 청나라의 영국의 관련 조약을 원천적으로 무효로 선언하면서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 조약, 난징조약, 구룡신계 조차조약이 모두 무효이며 이를 승계하지 않겠다고 건국 전인 1948년부터 천명하고 있었으며, 홍콩에 있어서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수복할 수 있다고 보아 조약이 끝나는 1997년에 대해서도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 이렇게 나오자 영국 입장에서는 홍콩을 전부 군말 없이 돌려주거나, 아니면 중국과 홍콩을 두고 전쟁을 하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영국은 1979년 홍콩 총독 머레이 맥클레호스(Murray MacLehose)의 베이징 방문 이후부터 홍콩 관련 문제를 중국과 협상하려 했고 1982년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덩샤오핑을 만나 10년 간 임대를 연장해달라고 타진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결국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이어진 협상 끝에 소위 중영공동선언이라고 불리는 홍콩 반환 협정이 체결되었고, 1997년 7월 1일을 기점으로 해서 반환하고 최소 50년 간은 일국양제를 통해 현상유지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홍콩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으로의 주권 이양에 내심 불만 혹은 불안 혹은 둘 다를 가진 경우가 꽤 있었다. 이양을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홍콩인들의 대부분은 ''''서양식 문화 및 가치관과 중국식 문화 및 가치관의 융화''''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과거 중국 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망명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하였고, 중국 공산당의 진의나 반환된 후 홍콩의 운명에 대해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에 덩샤오핑은 홍콩인들과 영국의 불안감을 감안하여 일국양제를 제안하였고, 반환 후에도 영국이 홍콩에 만들어놓은 홍콩의 정치/사회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중영공동선언에도 이것이 명시되었다.
그러나 이런 약속들이 홍콩인들의 불안감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으며, 특히 반환이 결정된 이후 천안문 사태 당시 중국 공산당의 무자비한 학살을 동원한 진압을 목격하면서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이 때 재산이 좀 있거나 외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친척이 있는 사람들은 많이들 재산을 처분해 영국 본토로 떠나거나 호주, 캐나다, 싱가포르 등 영연방 국가들로 이민을 갔고, 꽤 많은 수가 국적을 바꾸기도 했다. 반면 재산이나 배경이 없는 일반인들은 그러지 못했고, 극히 일부는 영국 국적 유지를 신청했으나 대부분은 그것마저도 되지 않았다. 다만 반환 이전 시점에서 태어난 희망자에 한해 영국 정부에서 BN(O) 여권(British National (Overseas) Passport)을 발급해주기로 하였고, 때문에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여차하면 도망갈 목적으로 이 여권을 발급받았다.
홍콩이 중국에 이양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1997년 7월 1일 이전 홍콩 출생자는 영국 홍콩인으로 태어났으므로 BN(O) 여권을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지브롤터나 포클랜드 등 기타 영국령 해외영토 주민들을 대상으로 발급되는 영국 해외영토 시민권자 여권과는 달리, 홍콩인들에게 발급되는 BNO 여권은 영국 입국시 영국 국적 여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홍콩 BNO 여권 소지자가 홍콩 특별행정구 여권보다 더 엄격한 입국 심사를 받기도 한다. 더불어 갱신비가 엄청나게 비싸다. 지금은 BNO 여권보다 홍콩 정부가 발행하는 홍콩 여권이 더 편하고[4] 더 싸기 때문에 편의성이나 비용을 따지자면 굳이 BNO 여권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지금도 굳이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홍콩 특별행정구 여권은 어쨌든 홍콩 특별행정구의 여권이기 때문에, 지금은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있지 않지만, 미래 어느 시점에서 중국 공산당이 딴맘을 먹고는 여권을 취소시키거나 효력을 중지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며 개입할 수도 있다. 홍콩 특별행정구 여권은 중국 공산당의 통제 가능성 하에 있는 여권인 반면, 영국 BNO 여권은 영국 정부에서 발급하는 여권이기 때문에 이것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더불어 많은 홍콩인들이 향하고 있는 싱가포르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경우 BNO 여권 소지자의 취급이 꽤 좋은 편이다.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 비자 등 비자 발급 조건이나, 건강보험, 체류허가서 발급 등 영국에 합법적으로 정식 체류할 때 받을 수 있는 혜택 면에서도 BNO 여권이 중국 홍콩 특별행정구 여권보다 더 낫다. 아직도 홍콩에 BNO 여권 소지자가 많은 이유는 여차하면 홍콩을 떠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에 따라 영국 정부는 홍콩인들의 안전을 위하여 BNO 여권 소지자들 및 소지했던 사람들에게 영국 본토에서 노동, 거주할 권리를 부여하기로 했다.
드디어 1997년 6월 30일, 홍콩 총독부의 유니언 잭이 내려오고,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튼은 슬픈 기분으로 홍콩을 떠났다. 이 양반은 유니언 잭이 끌어내려지는 순간, 고개를 푹 떨구며 착잡해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5] 이 장면은 전세계에 생중계되었다.
홍콩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철수했고, 중국 인민해방군이 홍콩에 주둔했으며, 7월 1일 홍콩에는 오성홍기가 걸린다. 이로서 홍콩은 홍콩 특별행정구가 되었다. 하필 또 이 날은 날씨가 내내 우중충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비가 내리더니 국기 하강식이 열리는 자정이 되자 장대비가 되어 억수같이 퍼부었다. 때문에 영국군 의장대와 중국군 의장대 역시 그 비를 다 맞아가며 식을 진행했고, 안 그래도 비장한 행사가 더욱 비장해져버렸다.
홍콩 반환의 주역 중 하나인 덩샤오핑은 이를 자신의 업적으로 생각하며 자랑스러워했고, 중국이 FIFA 월드컵에 출전하는 것, 양안통일, 중국령이 된 홍콩을 밟는 것까지 3가지가 일생 최대의 소원이었으나, 직접 보지는 못하고 반환 5개월 전인 1997년 2월 19일에 사망했다. 또 다른 주역인 마가렛 대처는 반환식에 직접 참석해,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이양되는 모습을 직접 봤다.
일단 약속대로 반환 이후 최소 50년은 현상유지를 하기로 했고, 그 때문에 홍콩은 영국령 시대의 법과 시스템을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이 이를 어기고 간섭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영국과의 협정 당시 '만약에 중국이 이를 어기면 영국은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며, 이 때문에 영국은 아직까지도 이러한 문제에 다소 민감한 편이다.
하지만,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은 홍콩에 대한 개입 수위를 높이고 있으며, 홍콩인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때문에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과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진행했다. 2019년에 '송환법 반대 시위'는 성공했다. 그러나 중국 본토에서 홍콩 법의 입법권은 없지만 해석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악용해서 '국가보안법'을 발효했다.
"세계의 창고"라고 불리는 중국의 거대한 정치경제적 위상 덕분인지 경제적인 문제는 크게 없었으나, 중국 대륙에서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들어오면서 홍콩인들의 생활 수준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물가가 폭등하고 부동산 가격에 심각한 수준의 거품이 끼게 됐다. 특히 홍콩 시민권을 편법 취득하기 위한 대륙 부자들의 꼼수로 인해[9] 홍콩 사회에서 여러 문제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또한 "동서양의 교차점"이라고 불릴 정도로 두 모습이 혼합된 특징을 간직하던 홍콩은 서서히 대륙 자본과 문화의 영향에 침식되며 그 독자성이 퇴색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홍콩 영화계 또한 사실상 침체기를 맞이했다고 봐도 무관하다. 이 시기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이 그 유명한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2047년 7월 1일 즉 50주년에 도달하더라도 자치권은 더 연장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주류이기는 하다. 그러나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2047년이면 자치권 연장이 되더라도 홍콩은 실질적으로는 일개 지방도시로 격하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상하이, 베이징, 선전 등 중국 대륙의 대도시들이 홍콩의 경제력을 추월한지 오래이고[10] , 궁극적으로 홍콩 내의 표현의 자유가 심히 퇴색되고 있으며, 예전에는 중국 공산당이나 홍콩 특별행정구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가 걸리면 간단한 심문을 받는 정도로만 끝났으나, 지금은 반공산당 책자를 판매하던 서점 관계자들이 통째로 실종되어 고문을 받다 풀려나고, 홍콩인들이 뽑은 반중국 성향의 의원이 잡혀가는 등 홍콩인들의 자유에 대한 탄압 또한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다.
결국 이양 20주년을 맞은 2017년 8월, 중국 공산당 외교부 대변인이 "홍콩반환협정은 이제 역사일 뿐이다."라고 밝히며 홍콩 이양에 대한 영국과 중국의 협정을 사실상 무효화함을 밝혔다. 그러나 공산당 내에서 2인자 리커창과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팡 그리고 그 외 경제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다만 이것이 반환협정의 내용을 전면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다. 2017년 7월, 홍콩 반환 기념 행사 당시 시진핑 주석이 밝힌 것처럼 협정과는 별개로 일국양제와 같은 홍콩의 자치권과 관련된 내용 자체는 명목상으로나마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차이점은 이전에는 이것을 영국과 중국이라는 두 국가 사이의 협정에 따라 보장한 반면, 앞으로는 중국과 홍콩이라는 중앙과 지방의 약속 관계에 따라 보장될 것이라는 점이다. 더불어 중국 공산당이 이 협정을 무효화하게 되면 영국이 법적으로 홍콩에 개입할 권한이 원천 소멸된다. 그러나 개입 권한이 소멸된다는 것은 중국의 정신승리일 뿐이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싱가포르,[11] 캐나다,[12]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로 중국 공산당을 피해 혹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혹은 자유롭게 살기 위해 빠져나가는 홍콩인들의 수는 97년 이후로도 꾸준히 유지되었고, 홍콩 우산 시위 이후인 최근 들어서는 대폭 증가하여 매해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갈수록 악화되는 홍콩 내 생활의 질,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탄압에 불만을 갖는 이들 가운데 외국에 정착할 능력이 되는 엘리트들의 이주가 두드러지고 있다. 홍콩 범죄인 인도법 사태 등은 많은 홍콩인들이 가지는 불안감을 확증으로 바꾸고 있다.
결국에는 중국 전인대에서 홍콩 내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2020년 5월 28일에 홍콩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면서 대다수의 홍콩인들의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고, 영국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 파기 및 자유 민주주의를 훼손함으로써 영국은 중국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할 수 있게 된 명분을 얻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홍콩 이양 이후로 홍콩인들 영어 구사율이 오히려 (표면적으로나마?) 급격하게 늘었다는 점이다. 홍콩대 언어학 교수 킹슬리 볼튼(Kingsley Bolton)은 홍콩 내 영어 구사자가 1983년 6.6%에서 2001년에 '''43%'''로 뛰어올랐다고 밝혔으며, 2010년 CIA 보고에 따르면 영어를 제1언어로 삼는 홍콩인은 '''89.2%'''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과장된 것으로 실질적으로 홍콩인들의 영어실력은 한국인들보다는 우수한 수준이며 절대 다수 홍콩인의 모국어는 광동어다.
1. 개요
1997년 7월 1일 영국이 해외 영토였던[2] 홍콩을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반환한 사건. 구 영국령 인도 제국의 독립에 이어 영국의 아시아 지배를 완전히 종료한 사건이다. 사실상 대영제국이 해체된 사건으로도 평가받는다.'''"여왕 폐하를 대신해서, 그리고 영국 국민 전체를 대표하여 홍콩의 모든 국민들에게 감사와 찬사, 애정, 그리고 존경을 표합니다."'''[1]
- 찰스 왕세자
2. 역사
1842년 제1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홍콩 섬을 청나라로부터 뜯어낸다. 이후 제2차 아편전쟁에서도 승리한 영국은 1860년 북부의 구룡반도를 또 떼어내어 홍콩 영역을 넓혔다.
그러나 그것도 부족했다고 판단한 영국은 1898년 신계 지구를 마지막으로 지금의 홍콩 영역을 확정했는데, 마지막의 경우 영구 소유가 아닌 '''99년 임차'''였으나 조약의 말미에 '''"as good as forever(영원한거나 마찬가지)"'''라고 써놨다, 즉 문서로는 99년이만, 실제로는 홍콩을 반환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
이후 세계 대전과 국공 대립으로 홍콩 문제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지만[3] , 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패배로 인한 중국 대륙의 공산화가 진행되면서 이에 반대하던 수많은 대륙인들이 홍콩으로 몰려들었다. 홍콩의 인구는 급속도로 불어났으며, 대륙에서 유입된 인재들을 바탕으로 국제무역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50년 티베트를 점령한 인민해방군은 서방과의 교섭 창구를 남겨둘 필요가 있고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한 영국 정부를 의식하여 홍콩에 접근하지 않았으며, 1970년대까지는 홍콩의 주권 문제가 거의 잊히는 듯 했다. 그러나 1979년 머레이 맥클레호스 홍콩 총독의 베이징 방문을 시작으로 1980년대에 들어 신계 지역의 조차 기간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영국은 중국과 협상에 나선다.
마가렛 대처 내각은 신계지구의 임차기간을 15년 더 연장해 2012년까지 갖는 방법을 고려했으나, 중국 공산당은 청나라의 영국의 관련 조약을 원천적으로 무효로 선언하면서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 조약, 난징조약, 구룡신계 조차조약이 모두 무효이며 이를 승계하지 않겠다고 건국 전인 1948년부터 천명하고 있었으며, 홍콩에 있어서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수복할 수 있다고 보아 조약이 끝나는 1997년에 대해서도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 이렇게 나오자 영국 입장에서는 홍콩을 전부 군말 없이 돌려주거나, 아니면 중국과 홍콩을 두고 전쟁을 하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영국은 1979년 홍콩 총독 머레이 맥클레호스(Murray MacLehose)의 베이징 방문 이후부터 홍콩 관련 문제를 중국과 협상하려 했고 1982년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덩샤오핑을 만나 10년 간 임대를 연장해달라고 타진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결국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이어진 협상 끝에 소위 중영공동선언이라고 불리는 홍콩 반환 협정이 체결되었고, 1997년 7월 1일을 기점으로 해서 반환하고 최소 50년 간은 일국양제를 통해 현상유지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3. 반발
홍콩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으로의 주권 이양에 내심 불만 혹은 불안 혹은 둘 다를 가진 경우가 꽤 있었다. 이양을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홍콩인들의 대부분은 ''''서양식 문화 및 가치관과 중국식 문화 및 가치관의 융화''''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과거 중국 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망명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하였고, 중국 공산당의 진의나 반환된 후 홍콩의 운명에 대해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에 덩샤오핑은 홍콩인들과 영국의 불안감을 감안하여 일국양제를 제안하였고, 반환 후에도 영국이 홍콩에 만들어놓은 홍콩의 정치/사회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중영공동선언에도 이것이 명시되었다.
그러나 이런 약속들이 홍콩인들의 불안감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으며, 특히 반환이 결정된 이후 천안문 사태 당시 중국 공산당의 무자비한 학살을 동원한 진압을 목격하면서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이 때 재산이 좀 있거나 외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친척이 있는 사람들은 많이들 재산을 처분해 영국 본토로 떠나거나 호주, 캐나다, 싱가포르 등 영연방 국가들로 이민을 갔고, 꽤 많은 수가 국적을 바꾸기도 했다. 반면 재산이나 배경이 없는 일반인들은 그러지 못했고, 극히 일부는 영국 국적 유지를 신청했으나 대부분은 그것마저도 되지 않았다. 다만 반환 이전 시점에서 태어난 희망자에 한해 영국 정부에서 BN(O) 여권(British National (Overseas) Passport)을 발급해주기로 하였고, 때문에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여차하면 도망갈 목적으로 이 여권을 발급받았다.
홍콩이 중국에 이양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1997년 7월 1일 이전 홍콩 출생자는 영국 홍콩인으로 태어났으므로 BN(O) 여권을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지브롤터나 포클랜드 등 기타 영국령 해외영토 주민들을 대상으로 발급되는 영국 해외영토 시민권자 여권과는 달리, 홍콩인들에게 발급되는 BNO 여권은 영국 입국시 영국 국적 여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홍콩 BNO 여권 소지자가 홍콩 특별행정구 여권보다 더 엄격한 입국 심사를 받기도 한다. 더불어 갱신비가 엄청나게 비싸다. 지금은 BNO 여권보다 홍콩 정부가 발행하는 홍콩 여권이 더 편하고[4] 더 싸기 때문에 편의성이나 비용을 따지자면 굳이 BNO 여권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지금도 굳이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홍콩 특별행정구 여권은 어쨌든 홍콩 특별행정구의 여권이기 때문에, 지금은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있지 않지만, 미래 어느 시점에서 중국 공산당이 딴맘을 먹고는 여권을 취소시키거나 효력을 중지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며 개입할 수도 있다. 홍콩 특별행정구 여권은 중국 공산당의 통제 가능성 하에 있는 여권인 반면, 영국 BNO 여권은 영국 정부에서 발급하는 여권이기 때문에 이것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더불어 많은 홍콩인들이 향하고 있는 싱가포르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경우 BNO 여권 소지자의 취급이 꽤 좋은 편이다.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 비자 등 비자 발급 조건이나, 건강보험, 체류허가서 발급 등 영국에 합법적으로 정식 체류할 때 받을 수 있는 혜택 면에서도 BNO 여권이 중국 홍콩 특별행정구 여권보다 더 낫다. 아직도 홍콩에 BNO 여권 소지자가 많은 이유는 여차하면 홍콩을 떠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에 따라 영국 정부는 홍콩인들의 안전을 위하여 BNO 여권 소지자들 및 소지했던 사람들에게 영국 본토에서 노동, 거주할 권리를 부여하기로 했다.
4. 반환
드디어 1997년 6월 30일, 홍콩 총독부의 유니언 잭이 내려오고,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튼은 슬픈 기분으로 홍콩을 떠났다. 이 양반은 유니언 잭이 끌어내려지는 순간, 고개를 푹 떨구며 착잡해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5] 이 장면은 전세계에 생중계되었다.
홍콩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철수했고, 중국 인민해방군이 홍콩에 주둔했으며, 7월 1일 홍콩에는 오성홍기가 걸린다. 이로서 홍콩은 홍콩 특별행정구가 되었다. 하필 또 이 날은 날씨가 내내 우중충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비가 내리더니 국기 하강식이 열리는 자정이 되자 장대비가 되어 억수같이 퍼부었다. 때문에 영국군 의장대와 중국군 의장대 역시 그 비를 다 맞아가며 식을 진행했고, 안 그래도 비장한 행사가 더욱 비장해져버렸다.
홍콩 반환의 주역 중 하나인 덩샤오핑은 이를 자신의 업적으로 생각하며 자랑스러워했고, 중국이 FIFA 월드컵에 출전하는 것, 양안통일, 중국령이 된 홍콩을 밟는 것까지 3가지가 일생 최대의 소원이었으나, 직접 보지는 못하고 반환 5개월 전인 1997년 2월 19일에 사망했다. 또 다른 주역인 마가렛 대처는 반환식에 직접 참석해,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이양되는 모습을 직접 봤다.
5. 반환 후 일어난 일
5.1.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경우
- 전화 코드(+852)와 도메인(.hk)은 그대로 사용한다.
- 중국과는 별개의 시간대를 사용한다. 물론 이름만 홍콩 표준시로 다를 뿐 실제로는 중국 대륙의 표준시와 동일한 UTC+8이다.
- 좌측통행은 그대로 유지한다.
- 중국 대륙과는 다른 화폐를 사용한다. 영국령 시절의 홍콩 달러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으며, 지금도 홍콩 달러는 영국 관련 도안만 바뀐 채 발행되고 있다.
- 관세구역은 반환 이전처럼 중국 대륙과는 별도로 취급된다.
- 영어는 홍콩의 공용어로서의 역할을 그대로 한다. 이양 후 이듬해인 1998년부터 교육부가 허가받지 않은 학교의 영어 교육을 금지하는 등의 조치가 있었지만 여전히 영어 교육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런 조치는 이미 반환 이전인 1982년부터 시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5.2. 유지되었으나 변동이 있는 경우
- 홍콩은 중국과는 별개로 국제기구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승인이 있어야 하며, '홍콩' 명의가 아닌 '중국 홍콩(Hong Kong, China)'이라는 명의로 참여한다.
- 중국 대륙/대만으로의 항공 노선은 국제선에 준해 취급된다. 중국 정부는 이미 홍콩행 노선을 '국제선에 준하는 국내선' 비슷하게 취급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홍콩 정부에서도 같은 취급을 하는 것이다.
5.3. 바뀐 경우
- 총독이 아닌 행정장관이 홍콩의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 홍콩의 각 기관에서 "왕립"이라는 이름은 삭제된다.
- 홍콩인들의 국적은 영국령 홍콩이 아니다. 영국령 홍콩으로써의 국적은 1997년 12월 31일 이후 말소되었으며, 중국계 홍콩인은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홍콩 영주권자로써 홍콩 특별행정구 여권을 받으며, 그 이외에 별도로 발급받을 수 있는 국적이 없는 영국령 홍콩 국적자[6] 는 홍콩 거주 영국 해외 시민[7] 이 된다. 그리고 1997년 6월 30일 이전에 홍콩에서 태어난 홍콩인은 희망자에 한해 영국령 홍콩 여권의 연장선에서 BN(O) 여권을 받을 수 있다.
- 영국인은 앞으로 별도의 체류허가 없이는 홍콩에서 체류할 수 없다. 이는 이양 직후가 아닌, 반환 3개월 전인 1997년 4월 1일부터 적용되었다.
- God Save the Queen는 더 이상 국가로서의 기능을 하지 않는다. 의용군 진행곡이 국가로서의 역할을 한다.
- 학기제도가 변경되어, 중학교 5학년제가 중학교 3학년 + 고등학교 3학년제로 변경된다. 대학교 또한 3 ~ 6학년제에서 4학년제로 변경된다.[8]
6. 반환 이후
일단 약속대로 반환 이후 최소 50년은 현상유지를 하기로 했고, 그 때문에 홍콩은 영국령 시대의 법과 시스템을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이 이를 어기고 간섭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영국과의 협정 당시 '만약에 중국이 이를 어기면 영국은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며, 이 때문에 영국은 아직까지도 이러한 문제에 다소 민감한 편이다.
하지만,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은 홍콩에 대한 개입 수위를 높이고 있으며, 홍콩인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때문에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과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진행했다. 2019년에 '송환법 반대 시위'는 성공했다. 그러나 중국 본토에서 홍콩 법의 입법권은 없지만 해석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악용해서 '국가보안법'을 발효했다.
"세계의 창고"라고 불리는 중국의 거대한 정치경제적 위상 덕분인지 경제적인 문제는 크게 없었으나, 중국 대륙에서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들어오면서 홍콩인들의 생활 수준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물가가 폭등하고 부동산 가격에 심각한 수준의 거품이 끼게 됐다. 특히 홍콩 시민권을 편법 취득하기 위한 대륙 부자들의 꼼수로 인해[9] 홍콩 사회에서 여러 문제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또한 "동서양의 교차점"이라고 불릴 정도로 두 모습이 혼합된 특징을 간직하던 홍콩은 서서히 대륙 자본과 문화의 영향에 침식되며 그 독자성이 퇴색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홍콩 영화계 또한 사실상 침체기를 맞이했다고 봐도 무관하다. 이 시기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이 그 유명한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2047년 7월 1일 즉 50주년에 도달하더라도 자치권은 더 연장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주류이기는 하다. 그러나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2047년이면 자치권 연장이 되더라도 홍콩은 실질적으로는 일개 지방도시로 격하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상하이, 베이징, 선전 등 중국 대륙의 대도시들이 홍콩의 경제력을 추월한지 오래이고[10] , 궁극적으로 홍콩 내의 표현의 자유가 심히 퇴색되고 있으며, 예전에는 중국 공산당이나 홍콩 특별행정구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가 걸리면 간단한 심문을 받는 정도로만 끝났으나, 지금은 반공산당 책자를 판매하던 서점 관계자들이 통째로 실종되어 고문을 받다 풀려나고, 홍콩인들이 뽑은 반중국 성향의 의원이 잡혀가는 등 홍콩인들의 자유에 대한 탄압 또한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다.
결국 이양 20주년을 맞은 2017년 8월, 중국 공산당 외교부 대변인이 "홍콩반환협정은 이제 역사일 뿐이다."라고 밝히며 홍콩 이양에 대한 영국과 중국의 협정을 사실상 무효화함을 밝혔다. 그러나 공산당 내에서 2인자 리커창과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팡 그리고 그 외 경제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다만 이것이 반환협정의 내용을 전면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다. 2017년 7월, 홍콩 반환 기념 행사 당시 시진핑 주석이 밝힌 것처럼 협정과는 별개로 일국양제와 같은 홍콩의 자치권과 관련된 내용 자체는 명목상으로나마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차이점은 이전에는 이것을 영국과 중국이라는 두 국가 사이의 협정에 따라 보장한 반면, 앞으로는 중국과 홍콩이라는 중앙과 지방의 약속 관계에 따라 보장될 것이라는 점이다. 더불어 중국 공산당이 이 협정을 무효화하게 되면 영국이 법적으로 홍콩에 개입할 권한이 원천 소멸된다. 그러나 개입 권한이 소멸된다는 것은 중국의 정신승리일 뿐이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싱가포르,[11] 캐나다,[12]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로 중국 공산당을 피해 혹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혹은 자유롭게 살기 위해 빠져나가는 홍콩인들의 수는 97년 이후로도 꾸준히 유지되었고, 홍콩 우산 시위 이후인 최근 들어서는 대폭 증가하여 매해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갈수록 악화되는 홍콩 내 생활의 질,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탄압에 불만을 갖는 이들 가운데 외국에 정착할 능력이 되는 엘리트들의 이주가 두드러지고 있다. 홍콩 범죄인 인도법 사태 등은 많은 홍콩인들이 가지는 불안감을 확증으로 바꾸고 있다.
결국에는 중국 전인대에서 홍콩 내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2020년 5월 28일에 홍콩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면서 대다수의 홍콩인들의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고, 영국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 파기 및 자유 민주주의를 훼손함으로써 영국은 중국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할 수 있게 된 명분을 얻었다.
7. 영어실력 향상?
재미있는 사실은 홍콩 이양 이후로 홍콩인들 영어 구사율이 오히려 (표면적으로나마?) 급격하게 늘었다는 점이다. 홍콩대 언어학 교수 킹슬리 볼튼(Kingsley Bolton)은 홍콩 내 영어 구사자가 1983년 6.6%에서 2001년에 '''43%'''로 뛰어올랐다고 밝혔으며, 2010년 CIA 보고에 따르면 영어를 제1언어로 삼는 홍콩인은 '''89.2%'''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과장된 것으로 실질적으로 홍콩인들의 영어실력은 한국인들보다는 우수한 수준이며 절대 다수 홍콩인의 모국어는 광동어다.
[1] 이 말 외에도 당시 찰스 왕세자는 홍콩이 중국에 넘어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며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2020년 그 예언은 적중하고야 말았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찾아볼 것.[2] 1983년부터 영국 해외 식민지(British Colonies)에서 영국 해외 영토(British Overseas territories)로 명칭이 변경되었다.[3] 제2차 세계 대전이후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포르투갈령 마카오 및 영국령 홍콩의 반환을 요구하긴 했다.[4] 무비자 입국 가능 국가 수가 더 많고, 영국 입국시 BNO 여권보다 더 입국 심사가 쉬운 경우도 있다.[5] 당시 패튼 총독의 딸은 눈물을 보였다.[6] 인도계 홍콩인, 말레이계 홍콩인, 아랍계 홍콩인, 일부 영국계와 아일랜드계 홍콩인 등.[7] 구 영국 식민지 출신 주민들이 가지는 국적. 영국 국적으로 인정되지만 영국 거주권이나 투표권 등은 없다. EU 시절에도 EU 시민으로 인정되지도 않았다.[8] 다만 이는 홍콩 당국에서 결정한 것으로, 홍콩 반환의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다.[9] 대륙 여권 소지자는 몇몇 개발도상국이나 제주특별자치도 정도를 제외하면 외국에 무비자로 여행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거기다 비자 발급이나 입국 심사, 유학, 이민, 취업 등에서 대륙 여권 보유자는 매우 안 좋은 취급을 받고 있다. 반면 홍콩 여권은 사실상 선진국 여권이므로 외국으로 나가기가 매우 쉽다. 더불어 중국 대륙과 홍콩의 현격하게 차이 나는 삶의 여건이나 복지 수준도 대륙 부자들이 자식들에게 어떻게든 홍콩 시민권을 쥐어주려는 이유가 되고 있다.[10] 경제력은 추월했을지 모르나, 이들과 다른 홍콩의 특징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많은 외국계 기업들(특히 금융업)이 홍콩에 주재하고 있는데, 후술할 홍콩 보안법으로 인해 이조차도 힘들어지게 된 것.[11] 소득 수준과 삶의 질이 매우 높은데다, 인구 문제로 싱가포르 정부가 홍콩인들을 받아들이는데 긍정적이다. 더불어 인구에서 화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 문화적으로 동질적이고, 영연방식 학제 하의 홍콩 학교들에서 발급하는 학위와 자격증들을 인정해준다. 더불어 기후도 홍콩처럼 고온다습한 환경이다. 때문에 홍콩에서 그나마 가깝고 적응도 쉬운 싱가포르로 빠져나가는 홍콩인들이 꽤 많은 편이다.[12] 캐나다 서부 해안 지역에 몰려살고 있으며, 밴쿠버의 경우 홍콩인 집단 거주지역도 있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