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북전역
1. 개요
중일전쟁 초기 1937년 7월부터 1938년 초까지 화북 지역을 놓고 벌어진 중국과 일본군의 일련의 전투. 중일전쟁에 있어서 최초로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진 전장이었으나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벌어지면서 국민정부의 관심이 그쪽으로 옮겨갔고 결국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중국군이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만다.
2. 배경
1937년 7월 7일 심야, 중국군 관할구역을 무단으로 침범한 일본군이 실탄 사격 연습을 하던 중 병사 한 사람이 실종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병사 한명이 무단으로 대열을 이탈했다가 불과 20분 후에 복귀한 해프닝에 불과했으나 사태를 제때 파악하지 못한 일본군은 이를 중국의 계획적인 반일 도발로 간주하고 중국군과 교전을 벌이며 중국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것이 바로 루거우차오 사건인데 이에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쑹저위안은 일본군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7월 11일 <루거우차오 사변 현지교섭>을 체결하여 일본군과의 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난징의 장제스는 더 이상 일본군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으며 일본군 내부에서도 스기야마 하지메, 무토 아키라 등 강경파 장교들은 루거우차오 사건의 근본적 원인은 중국의 반일 감정에 있다고 주장하며 3개월 안에 중국을 병탄해보이겠다고 호언장담, 중국과의 일전을 주장하며 화북분리공작을 완성시켜 중국에 제2의 만주국을 세우려 했다. 장제스는 이에 맞서 화북의 병력을 북방으로 집결시키며 항전 태세를 갖추었고 이것이 알려진 7월 10일 이후, 불확대파가 다수였던 참모본부에서는 확대파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일본은 이것을 두고 중국이 일본을 업신여기는 증거라 주장하며 더욱 강경화되며 양국 사이의 긴장은 고조되었다.
3. 전개
3.1. 국민정부의 전쟁준비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쑹저위안은 일본과 국부적 해결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장제스의 입장은 강경하였다. 7월 9일 장제스는 26군 소속 2개 사단을 스좌장 혹은 바오딩으로 전진 배치시키고 40군과 84사단을 스좌장에 집결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29군과 쑹저위안에게 중앙의 북상파병 결정을 통보하는 한편 사천에 있던 군정부장 허잉친에게 난징으로 돌아가 군의 재편에 착수하라고 지시하고 쉬융창, 청첸, 탕성즈에게 21사단, 25사단을 거느려 출동하고 각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선전포고 절차를 내리라고 지시했다. 또한 7월 10일 장제스는 일본 대사 가와고에 시게루에게 일본군의 행위는 계획된 도발이며 극도의 불법행위라고 항의하는 한편 전국의 부대와 행정기관에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7월 11일, 일본 정부는 정전령을 체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군 20사단과 관동군 2개 여단이 정부의 명령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파견된 것에 대해 사후재가를 해주었으며 여기에 더해 보병 3개 사단을 화북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장제스는 일본군의 목적이 평화에 있지 않음을 확신하고 7월 12일 군사 징발령을 공표하였다.
- 1. 항전을 위한 군대로 제1선 1백개사, 예비군 80개사를 편성하고 7월 말까지 대본영의 각급 사령부를 비밀리에 조직한다.
- 2. 현재 보유한 6개월 분의 탄약은 장강 이북에 삼분의 이, 장강 이남에 삼분의 일을 배치한다. 탄약공장이 폭격되는 경우를 고려해 프랑스, 벨기에에서 구입을 교섭하고 홍콩, 베트남 경우의 수송 루트를 확보한다.
- 3. 병사 1백만, 군마 10만두의 6개월 분 식량을 준비한다.
3.2. 일본 제국의 확전음모
한편 <루거우차오 사변 현지교섭>이 체결되었던 7월 11일 오후 2시,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도쿄의 수상관저에서 5상회의를 소집, 정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파견된 관동군 2개 여단과 조선군 제20사단의 파병을 사후 승인하는 한편 본토에서 3개 사단을 추가로 화북으로 파견하겠다고 결의, 화북에서의 소요를 <북지사변>으로 명명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언론계와 재계 대표들을 관저에 소집하여 중국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출병할 수밖에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7월 12일, 병상에 누워있던 지나주둔군 사령관 타시로 칸이치로 장군이 사망하자 가츠키 키요시 중장이 신임 지나주둔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참모본부는 <대지작전계획>을 책정하였다. 지나주둔군은 이미 정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중국군이 반격을 가할 가능성은 적다고 상부에 보고하고 있었으나 중앙의 분위기가 바뀜에 따라 이에 편승했다. 한편 도쿄의 주일 대사관은 본국에 심상치 않은 정보를 전해왔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장제스는 격노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7월 14일 가츠키 사령관은 기찰정무위원회에 7개항의 협정세목을 제출했다."왜구는 신의를 중시하지 않는다. 상하이 사변에서도 우리와 이미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도 8시간 후 상하이를 공격했다."
- 1. 공산당의 책동을 철저히 탄압한다.
- 2. 배일적인 인물을 파면한다.
- 3. 배일적인 색채가 있는 중앙계 기관을 기찰로부터 철수시킨다.
- 4. 남의사, CC단 등 배일단체를 기찰에서 철수시킨다.
- 5. 배일 언론인과 그 밖의 선전기관 및 학생, 민중의 운동을 단속한다.
- 6. 학교와 군대 내의 배일 운동을 단속한다.
- 7. 베이핑의 경비는 보안대가 전담하며 중국군은 성 밖으로 철수한다.
하지만 일본 제국은 7월 16일 육군 10만명과 육군 항공대 18개 편대[1] 를 추가적으로 중국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으며 7월 17일 오상회의에서 총 40만 대군을 동원하여 중국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중화민국은 7월 17일, 장제스의 명의로 루산성명을 발표하여 일본에 저항할 것임을 발표했다. 그러자 일본은 중국의 태도가 도전적이라고 크게 반발하였다.
3.3. 평진전역
7월 25일, 전화선 수리를 명목으로 월경한 일본군과 중국군이 대치하였고 26일부터 대규모 교전이 발생하면서 베이핑-톈진 전투가 발생하였다. 28일 일본군의 총공세가 시작되면서 7월 30일 베이핑과 톈진이 함락되고 29군은 철로를 따라 철수하였다.
국민정부는 수원성 정부주석 겸 35군 군장 쑹저위안을 7집단군 사령관에 임명, 13군 군장 탕언보를 7집단군 전적총지휘에 임명하여 베이핑과 톈진 탈환을 시도하였다. 탕언보는 거용관을 넘어 베이핑 북방으로 전진하였으나 도조 히데키,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반격으로 8월 25일 패배, 8월 26일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이를 본 푸쭤이, 쑹저위안 등이 모두 도주함에 따라 중국군의 전선이 붕괴되었다.
3.4. 화북 전략방어
3.5. 산서성 전역
4. 결과
일본군이 화북을 정복했으나 국민당 정부는 저항을 계속하기로 한다.
5. 참고문헌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기세찬, 경인문화사.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일본 군사사 상, 후지와라 아키라, 제이앤씨.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삼인.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태평양 전쟁사 1권, 일본역사학연구회, 채륜.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가토 요코, 어문학사
- 쇼와 육군, 호사카 마사야스, 글항아리.
- 쇼와사 1 전전편, 한도 가즈토시, 루비박스
- 제2차 세계 대전, 앤터니 비버, 글항아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공산당 역사 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6. 관련문서
[1] 일본 육군 항공력의 절반 이상에 해당했으며 일본군은 이들을 묶어 임시항공병단을 편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