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언보
1. 개요
탕언보는 중화민국의 군인이다. 장제스의 심복으로 초공작전, 중일전쟁에서 활약을 했다. 하지만 만년에 장제스의 신임을 잃고 일본에서 쓸쓸히 병사했다.
2. 생애
2.1. 초기이력
장제스와 동향 출신으로 저장성 우이에서 태어났다. 1916년 저장 제7중학과 항저우 체육 전과학교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떠났다. 1922년 3월 메이지대학에 입학했으나 1924년 학비가 부족하여 중도 귀국했으나, 저장성의 정치인이자 군인 천이(陳儀)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다시 일본으로 가서 1927년 일본육군사관학교 39기 포병과 18기를 졸업했다.
2.2. 국민혁명에서 대장정까지
귀국 후 강소, 절강, 복건 등 5개 성을 지배하는 직예군벌 쑨촨팡 휘하의 소령으로 부임했지만, 천이의 추천으로 중국 국민당에 가입, 국민혁명군에 입대한다. 이어 황포군관학교가 이름을 바꾼 중앙군관학교에서 교관생활을 했다. 이때 이 학교에 일본육사를 모방한 커리큘럼을 확립하여 군사교육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2]
1930년 중원대전이 벌어지자 야전으로 돌아가 소장의 계급으로 제1여단장을 맡아 공훈을 세웠다.
이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진압하기 위한 초공작전에 참가했는데 제3차 초공작전에서 홍군에게 대참패를 하고 장제스의 노여움을 사서 직위해제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다시 89사단장으로 복귀하여 제5차 초공작전에서는 공훈을 세우고, 대장정이라는 이름으로 도피하는 홍군을 추격해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공적으로 13군 군장이 되었고, 공산군의 새로운 근거지인 섬서성에 주둔하게 되었다.
1936년 가을 중화민국은 일본의 지원을 받던 데므치그돈로브의 내몽골군 및 관동군과 충돌하는 수동사변이 발생했는데, 섬서에 있던 탕언보군은 쑤이위안성[3] 에 있던 푸쭤이 군을 지원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2.3. 중일전쟁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베이핑-톈진 전투로 베이핑이 함락되자 탕언보의 13군은 푸쭤이의 7집단군에 편입되었고, 베이핑 근처에서 싸웠다. 남구를 점령하여 일본군의 측후방을 위협하며 바오딩 방어에 나섰고 평한선의 부대를 이동시켜 남구의 일본군을 섬멸하여 베이핑과 톈진을 탈환하려 했지만 일본군의 반격에 수세에 몰렸다. 탕언보는 지원을 요청했으나 웨이리황과 옌시산의 부대와 공조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2만 6천명을 잃고 퇴각했다. 이 소식을 들은 푸쭤이와 유여명 등도 모두 달아나 평환, 진포선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이어 쉬저우 전투에서 일본군에 맞섰으나 쉬저우를 내주고 말았다. 하지만 1938년 3월에 산둥성 타이얼좡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전투력을 분산하자는 리쭝런의 의견에 반대하여 화력을 집중하여 일본군을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웠고 20군단을 운용하여 일본군 10사단 세야 지대와 5사단 사카모토 지대를 격파하여 대승리를 거웠고, 이는 중일전쟁에서 중국군이 최초로 거둔 의미있는 승리였다.
이 공적으로 31집단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해서 우한 전투에 참가했다. 우한이 함락당한 후 남악에 설치된 유격간부 훈련반의 주임을 겸임하여 공산당 장성 예젠잉과 함께 각 전구의 대대장급 이상 간부들과 고위사령부의 중간 참모들을 바탕으로 유격전을 교육하여 일본군의 점령지 후방에서 유격전을 수행하도록 했다. 이후 허난성의 1전구에 배치했다. 이때 중국의 심장부에서 장정문과 함께 17개군, 40개 사단,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원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1944년 일본군이 만주에서부터 버마까지 보급로를 뚫으려고 개시한 대륙타통작전 (또는 이치고 작전, 1호작전) 에서 일본군과 싸웠다가 참패했다. 이 때문에 허난성 전체를 일본군에게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령관이던 탕언보는 군복을 벗고 농부로 변장하고 일본군의 포위망을 벗어나야 했다.이런 참패 때문에 충칭에 있던 국민당 정부 내에서는 패장 탕언보를 군사재판에 회부해서 처단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을 정도로 욕을 먹었으나, 장제스는 탕언보를 옹호했고, 1945년 2월 다시 제3방면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제3방면군은 약체화된 일본군을 무찌르고 5월에는 광서성에 진입했고, 구이린(계림)을 탈환했다. 1945년 7월, 허잉친이 광저우 탈환 작전을 수립하면서 장파쿠이의 제2방면군과 함께 광동성에 대한 반격작전을 개시했다. 탕언보는 하현과 전현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여 8월 17일 전현을 점령했으나 일본이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작전은 중지되었다.
2.4. 제2차 국공내전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탕언보는 상하이에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담당했다. 이어 1946년부터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40만의 병력을 이끌고 산둥성 방면의 인민해방군(당시 홍군)에 대해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1947년 천이가 지휘하는 인민해방군 제3야전군의 20만을 포위하고도 국민당군의 내부분열 및 작전오류로 포위를 살리지 못하고 대참패를 했고, 휘하부대를 다 잃었다. 그리하여 다시 장제스로부터 직위해제 처분을 받았다. 1948년 봄 다시 복귀했으나, 다시 참패하여 공산군에게 쉬저우를 잃었다.
1949년 1월, 난징-상하이-항저우(京沪杭) 경비사령관에 부임하여 공산군의 장강(양쯔강) 도하작전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공내전의 전세가 기운 것을 본 여러 국민당군 지휘관들이 배신하여, 공산군은 쉽게 장강을 도하해 난징으로 쇄도했고, 결국 4월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은 함락되었다. 이어 탕언보는 5월 푸젠성 샤먼의 방위사령관을 맡았으나, 샤먼도 함락되었고 탕언보는 진먼 섬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0월 인민해방군은 진먼 섬 공략작전을 펼쳤으나, 탕언보는 공산군이 전무하던 공군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방위할 수 있었고, 진먼 섬은 결국 중화민국의 손에 남아있게 되었다.
옛 후견인이었던 천이(陳儀)가 장제스에 모반하고 함께 공산당에 투항하자고 탕언보에게 권유했으나, 탕언보는 이를 바로 장제스에 일러바친다. 탕언보는 일러바친다기보다는 장제스도 천이와 친구 사이니 그냥 타일러서 못가게 할 것으로 생각한 듯 하다. 그러나 장제스는 탕언보의 밀고에 대노하여 천이를 1950년에 반역혐의로 체포해 처형했고, 설마 장제스가 처형까지 하리라고는 생각 못했던 탕언보는 은인을 고발해서 죽게했다는 심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게 되었다.
2.5. 국부천대 후
이렇게 공산당에게 거듭 참패를 당했기 때문에, 탕언보에 대한 장제스의 인내력도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탕언보는 난징 경비사령관을 맡던 시절 친구 명의로 일본에 아파트를 샀는데, 이것이 국부천대 후 외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장제스의 신임이 완전히 없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장제스는 "그 녀석 이미 도망갈 준비 하고 있었던 거 아닌가!"라고 할 정도로 그나마 남아있던 신임이 없어진 것.
그리하여 대만에 와서도 부총통을 비롯하여 요직을 맡던 라이벌 천청과는 달리, 총통부 고문이라는 유명무실한 직위를 받았을 뿐이었다. 탕언보는 일본 주재 중화민국 군사 대표단의 일원으로 있다가 해임당한 후, 일본으로 사실상 망명했고, 위궤양 및 십이지장 궤양이 발견되어 일본 도쿄의 게이오기주쿠대학 병원에서 수술중 사망했다.
3. 기타
첫번째 아내는 마아첸(馬阿謙)이었는데 위자료 300위안을 주고 이혼했다고 한다. 두번째 아내는 천이의 양녀인 왕징바이(王竟白)이다. 첫번째 아내와는 아들 한명, 두번째 아내와는 4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천이가 탕언보의 고발로 장제스에 의해 처형된 이후, 왕징바이는 탕언보와 절연하고 자식들을 데리고 홀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타이베이에서 행해진 장례식에는 허잉친, 천량, 후쭝난, 장징궈가 참석했는데, 정작 장제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허난에 있을 때 부대의 군기가 나빠 민생이 하도 피폐해서 수한황탕(수재, 가뭄, 황충(메뚜기), 탕언보)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이 붙었다고 하는데, 잘못 알려진 사실이라는 주장도 있어서 관련된 갑론을박이 진행중이다. 여하튼 이런 말들이 진실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당시 허난의 상태가 막장이었다는 것 자체는 사실. 1전구가 설치된 허난은 1938년 황허 홍수로 인해 엄청난 양의 사상자, 이재민, 농지 피해를 입은 상태였고 일본군과 중국군이 대치 중이라서 정부의 지원같은 것은 전혀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 1943년 허난성 대기근까지 겹치고 여기에 부패한 지방관리들의 전횡까지 겹치면서 헬게이트가 열렸다. 시어도어 화이트같은 언론인들의 폭로로 인해 장제스가 관련자들을 총살하고 즉각 구호를 실시하라고 지시하면서 좀 정리가 되었다. 이 당시 허난성은 3000만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고, 중국 점령지에 1800만, 일본군 점령지에 1200만의 인구가 살고 있었는데, 기아가 너무나 참혹해서 일본군까지 구호작업에 나섰다거나, 허난의 백성들이 일본군을 도와서 국민당군을 공격했다는 설이 나올 정도.
[1] 바이두 백과에 의하면 1900년생이라고 한다.[2] 중국 국민당과 소련의 합작에 의해 1924년 제1기생을 받은 황포군관학교는 장제스의 주장에 따라 장교들을 속성으로 대량으로 양성한다는 방침을 정했고 광저우에 있을 때는 6개월 속성 과정에 불과했다.(소련 고문들은 6개월 커리큘럼이 너무 짧다고 반대) 후에 공산당과 국민당으로 나뉘어 피터지게 싸우는 황포군교 출신의 장교들은 학교보다는 학교를 졸업한 후 참전한 무수한 실전에서 전술을 배웠다고 해도 될 정도. 물론 군벌군들이 막장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양성된 장교들만으로도 국민혁명군은 승전을 거듭할 수 있었지만, 북벌이 완료후 마적단이나 비적 출신들이 가득한 군벌군이 아니라 외국(특히 일본)의 정예군을 상대하려면 교육 내용은 국제기준으로 대폭 재고되어야 했다. 여기에 1차 국공합작이 깨지면서 소련 교관들이 귀국하고, 제대로 된 교수진도 드물어졌다. 그래서 그나마 중국보다는 선진적인 일본 육사에서 배운 탕언보의 경험이 중요했던 것이다. 물론 일본육사도 서유럽 기준으로는 도저히 선진적인 교육과정이라고보기는 힘들었지만, 어쨌든 중국보다는 앞서 있었다. 현대적이고 체계적인 장교 육성 시스템의 필요성을 절감한 장제스는 1930년대 중반 나치 독일의 도움을 받아 육군대학을 설치하고 전국의 군사교육기관을 통일시켜 군사교육 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시켰으나 그게 중일전쟁 터지기 직전에야 겨우 이루어져서(...) 좀 쓸만한 장교들이 육성된 것은 중일전쟁 도중에야 있었고 그 때는 국민정부의 경제적 기반이 죄다 날아가고 정예군도 소진된 후였다.[3] 현재 내몽골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