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북분리공작
1. 개요
1935년~1937년, 관동군을 주축으로 하는 일본 군부가 차하얼성, 수원성, 하북성, 산동성, 산서성을 중심으로 하는 화북의 5개 성을 국민정부의 통치로부터 분리하여 독립 상태로 만든 후 일본에 종속되는 괴뢰국을 수립하려고 한 음모이다.
중국에서는 화북사변이라고 부른다.
2. 배경
2.1. 1930년대 초 일본의 상황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탈함으로 일본의 대륙 침탈은 본격화되었다. 일본은 1932년 3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를 옹립하여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하였으며 1933년 열하사변을 일으켜 열하성을 침탈하고 베이핑 지척까지 접근하기에 이른다. 국민정부는 군사력으로 일본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당고정전협정을 체결하여 일본군의 진격을 일단 정지시켰다.
한편 일본에서는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살해당하자 사이토 마코토 내각이 출범했다. 사이토 내각은 1933년 10월 3일부터 5회에 걸쳐 5상회의를 개최, 만주국의 건전한 육성과 동양 평화의 확보, 1935년 전후의 국제적 분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주요 열강, 특히 중국, 소련, 미국과의 친선관계 확립이라는 과제를 설정하였다. 이때 중국에서는 만주사변, 제1차 상하이 사변, 열하사변 등 잇다른 군사적 침략으로 반일감정에 극에 달해 대대적인 배일운동이 벌어져 일본과의 무역이 거의 근절되다 시피하는 수준으로 감소한 상황이었다. 이에 사이토 내각은 중국으로 하여금 배일정책 포기, 미국으로 하여금 1935년 군축회의 이전까지 극동정책 변화를 촉구, 소련에 대하여 중동철로 매수, 북부 사하린 석유 이권, 어엽 교섭 등에 나서기로 결정하고 외상 히로타 고키를 중심으로 중미소 3국과 교섭에 들어갔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대대적인 만주붐이 불어 엄청난 양의 투자가 행해졌다. 반자본주의 성향이 강한 관동군은 처음에 만철을 중심으로 한 업종 한 회사주의를 주장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닛산 등 재벌들이 잇달아 만주에 개입하였다. 초기에 일본의 투자로 일어난 만주 특수는 일본 산업계의 대호황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1934년 만주 대흉작으로 인한 만주의 농업공황이 심화되고 만주의 대두박을 구매해주던 일본의 농촌도 불황으로 인한 고난에 시달리게 되면서 만주의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일본의 구상이었던 일만경제블록을 통한 공황 타개라는 방침의 붕괴나 다름없었다. 이 와중에 만주에서 기지 건설, 주둔군 유지비 등 군사비는 폭증하게 되어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상은 소위 다카하시 재정이라 불리는 대규모 군축 정책을 실시하게 되고 이는 군부의 불만으로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일본군은 통제파를 중심으로 농산어촌의 피폐 구제가 당면과제라고 주장하며 농민들을 위한 의무교육비 국고부담, 비료판매 국영화, 농산물 가격 유지, 경작권 보호, 노동조합법 제정, 노동쟁의 조정기구 설치 등을 내세워 국민의 기대를 끌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배한 이유는 국민 조직의 부실 때문이라고 판단한 통제파의 전훈 때문이었는데 통제파는 이 과정에서 안보, 외교 등 국정 전반에 개입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만주사변 이후 중국의 일본 무역이 급감한 것에 대해 일본 군부는 무작정 중국이 배일정책을 취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중국에 대한 적개심을 고조시키고 중국에 대한 압력 행사를 주장하게 되었다.
2.2. 일본 군부의 소련 공포증
이때 일본 군부는 히로타의 대미 교섭을 적극 지지하였는데 이는 일본 군부에 만연한 소련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일본 군부는 소련의 군비가 무섭게 팽창하고 있음을 경계하였고 1933년 9월 29일 참모본부 작전과장 스즈키 요리미치가 소련을 상대로는 '필승의 신념'을 견지하기 어렵다고 상신하였으며 12월 13일, 주소 일본대사관 무관 가와베 토라시로가 참모차장에 "지금 소련의 군비가 마치 만주 또는 제국 본토를 위협하는 듯한 기세에 이르렀다."고 보고했다. 관동군은 종래의 비적 토벌을 위한 분산형 치안유지 배치로는 만주 방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1934년 4월 소련군에 대응한 집단방위형 배치로 전환하였으며 만주국의 정책이나 첩보활동도 치안유지에서 대소 첩보활동으로 선회하였다.
소련의 극동 전력은 날로 증강되었고 관동군은 대소전 계획에서 소련군이 최대 25만명을 동원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 관동군에 이에 맞서 25만명, 하다못해 그 3분의 2에 해당하는 병력이라도 확보해야 하며 동부에서는 재래식 보병을 동원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고 서부에서는 기계화부대를 이용하여 몽골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상정하였다. 이를 위해 관동군은 내몽골, 차하얼, 산서를 비롯한 내몽골 방면 지역을 배후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1936년 3월, 관동군 참모본부 제1과 작전과장인 사카니시 가즈요시는 해군 측에 관동군은 병력을 북만주에 집중시켜 외몽골과 산서성의 중국 공산군을 격파함으로 소련과의 전쟁을 방지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다고 전달했고 이를 위해 화북 5개성을 만주국과 중국 사이의 완충지대로 설정하여 소련전에서 측방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2.3. 국민정부의 화북 정책과 일본군 육군 중앙의 대응
한편 국민정부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 흑룡강, 길림, 봉천, 열하를 포함하는 동북4성과 화북을 지배하던 것은 장쭤린의 봉천군벌이었다. 국민혁명으로 중국 국민당이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고 봉천군벌도 동북역치를 선포, 명목상으로 중앙에 복종하긴 하였으나 국민당 중앙은 각 군벌의 영토에 대해서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봉천군벌은 1929년~1930년 사이의 반장전쟁에서 결정적인 순간인 중원대전에 장제스의 편으로 개입하여 큰 공을 세웠고 봉천군벌의 수령인 장쉐량은 중화민국 육해공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중화민국의 2인자로 공인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 구도는 한방에 무너졌다. 장쉐량이 화북 지역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관내진출을 행하는 사이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여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한 것이다. 동북4성과 화북을 지배하던 중화민국 제2의 실력자였던 장쉐량은 열하성과 화북 일대만 지배하는 중소군벌로 전락하였고 그나마도 1933년 열하사변으로 모두 잃고 전국에서 쏟아지는 '부저항'이라는 비난 속에 공직에서 사퇴하여 외유를 떠나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하여 봉천군벌은 순식간에 몰락했고 화북 지역은 국민정부가 접수하였다. 국민정부는 베이핑 정무정리위원회, 속칭 정정회를 설치하여 장제스의 측근 황푸를 위원장에 임명하고 인루겅, 왕커민 등 문관 집단을 중심으로 화북의 군정대권을 장악하여 화북의 군벌들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국민정부의 통치권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9월 시점에서는 화북 재정이 국민정부 재정부의 관할에 들어옴에 따라 구 동북계나 화북 정객들은 영향력이 일소되었다. 황푸는 1934년, 당고정전협정을 취소하고 외교권을 중앙에 집중시켜 국가 대 국가 외교를 통해 일본과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장제스는 1934년 가을 시점에서는 내몽골 지역을 시찰하며 데므치그돈로브와 회견, 차하얼성과 수원성을 국민정부의 직할령으로 만들고자 했다.
허나 관동군이나 톈진군은 이런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다. 1934년 10월 23일, 중국 주둔군 참모장 사카이 타카시 대좌가 '일본의 중국에 대한 경제적 발전을 조장하고 전시 일본 국방 자원 부족의 충실'을 명목으로 만철 총무부장 이시모토 겐지에게 화북경제조사를 의뢰했다. 이로서 만주-일본-화북을 잇는 블록경제권이라는 개념이 고안되었는데 군부에서 대중 유화론을 주장하던 황도파가 약화되고 나카타 데쓰잔, 하야시 센주로를 비롯한 통제파가 권력을 잡으면서 육군의 대중 태도 역시 강경화되였다. 1934년 1월, 황도파인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가 병환으로 사직하고 통제파인 하야시 센주로가 육군대신에 취임했는데 아라키는 원래 우가키 가즈시게 파벌과 매우 적대적인 성향으로 그의 재임 기간 군부에서 우가키 파벌을 일소시켰다. 그런 그가 물러나자 우가키 파벌은 중앙에서 부활, 아라키 파벌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이는 당시 100만엔으로 책정된 육군의 기밀비를 어느 파벌이 더 많이 책정받느냐를 두고 일어난 싸움이었다.
1934년 3월 5일, 나카타 데쓰잔이 육군성 군무국장에 취임하자 지나주둔군 사령부는 <중국 북부 점령지 통치 계획>을 책정하였다. 1934년 12월 7일, 육군, 해군, 외무성 3성 과장은 <중국 정책에 관한 건>을 결정하여 화북에서 국민정부의 활동을 정지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이 시기에는 아직 일본이 실력으로 화북에서 국민정부의 영향력을 일소시키는 것은 부족하므로 점진적으로 실현하며 적극적으로 지방정권을 조장하지는 않겠다고 했으나 어쨌거나 일본의 목표가 화북에서 국민정부 축출이 되었다는 점은 괄목할만한 일이었다.
3. 전개
3.1. 다롄회의와 찰동 사건
3.2. 하매 협정에서 진토 협정까지
3.3. 일본의 군벌 매수와 풍대 사건
3.4. 향화 사건
3.5. 기동사변과 12.9 운동
3.6. 내몽골 독립운동
4. 결과
5. 참고문헌
5.1. 일본 현대사 관련
-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삼인.
- 기타 잇키 평전, 마쓰모토 겐이치, 교양인.
- 일본제국 흥망사, 구태훈, 히스토리메이커.
- 일본근현대사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가토 요코, 어문학사.
-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가토 요코, 서해문집.
- 태평양 전쟁사 1권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일본역사학연구회, 채륜.
- 일본 군사사 상, 후지와라 아키라, 제이앤씨.
5.2. 중국 현대사 관련
- 일제의 대륙침략사, 소운서, 이문영, 고려원.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중일외교사연구, 구정승미, 선인.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
6. 관련사건
- 나카무라 사건(1931.6.27)
- 만보산 사건(1931.7.1)
- 만주사변(1931.9.18~1932.3.1)
- 마옥산 사건(1932.1.18)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1.28~1932.5.5)
- 송호정전협정(1932.5.5)
- 열하사변(1932~1933)
- 당고정전협정(1933.5.31)
- 찰동 사건(1935.1.18~1935.2.2)
- 대탄 협정(1935.2.2)
- 하북 사건(1933.5.2~1933.5.24)
- 장북 사건(1935.6.5)
- 하매 협정(1935.6.10)
- 돈목방교령(1935.6.10)
- 진토 협정(1935.6.27)
- 풍대 사건(1935.6.27~1935.6.28)
- 타다 성명(1935.9.24)
- 히로타 3원칙(1935.10.4)
- 향화 사건(1935.10.18~1935.11.5)
- 법폐개혁(1935.11.4)
- 기동사변(1935.11.25)
- 12.9 운동(1935.12.9)
- 수동사변(1936.11.14)
- 7군자 체포 사건(1936.11.23)
- 서안 사건(1936.12.12)
- 루거우차오 사건(193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