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전투

 

'''난징 전투
南京戦
'''
중일전쟁의 일부
[image].

'''날짜'''
1937년 12월 3일 ~ 1937년 12월 13일
'''장소'''
중화민국 난징시
'''교전국'''
<^|1>[image] 중화민국
<^|1>[image] 일본 제국
'''지휘관'''
[image] 탕성즈
[image] 유흥
[image] 주란

<^|1>[image] 하세가와 기요시
[image] 마쓰이 이와네
[image] 야나가와 헤이스케
[image]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결과'''
일본군의 승리
'''영향'''
난징 함락,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난징 대학살을 자행함.
'''전력'''
13개 사단 15만
8개 사단 24만
'''피해 규모'''
전사 2만, 포로 8만, 행방불명 1만
1953명 전사, 4994명 부상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난징 도양폭격
3.2. 일본군의 난징 진군
3.3. 천도 결정과 탕성즈의 사령장관 임명
3.4. 양군의 규모와 편제
3.4.1. 일본군
3.4.1.1. 육군
3.4.1.2. 해군
3.4.2. 중국군
3.5. 난징 공방전
3.5.1. 전투의 시작과 장제스의 탈출
3.5.2. 마쓰이 대장의 특별지시
3.5.3. 일본군의 최후통첩
3.5.4. 퇴로 차단과 최후의 협상
3.5.5. 난징의 함락
4. 결말
5. 매체에서
6. 참조문헌
7. 관련문서


1. 개요


중일전쟁중화민국수도난징을 둘러싼 중화민국 국민혁명군과 일본 제국 육군 중지나 방면군 간의 싸움을 말한다. 1937년 12월 3일부터 12월 13일까지 벌어졌으며 결국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은 일본 제국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 대학살을 자행했다. 이 문서에서는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8월의 난징 공습부터 난징 함락까지를 다루기로 하겠다.

2. 배경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의 발생으로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은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원래 일본 제국의 목표는 중화민국과의 전면전이 아니라 베이핑을 위시로 한 중화민국 화북 지역을 침탈하여 이를 괴뢰국으로 삼는 것으로 만주사변과 같은 국지전이었다. 하지만 북벌을 통한 통일을 완수하고 반장전쟁을 거쳐 집안단속을 어느 정도 끝내고 1930년대 내내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던 중화민국은 더 이상 일본의 침략에 맥없이 당할만큼 호락호락한 상대도 아니었고 일본의 계속된 침공으로 중국인들의 어그로가 끌어올라 내셔널리즘이 고취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1936년의 서안 사건으로 이미 국민당과 공산당은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한 항일에 합의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일본군의 침략이 시작되자 중국은 전에 없이 강경한 자세로 나와 전쟁은 전에 없던 국면으로 치달았다.
이 와중에 전선이 상하이로 확대되자[1][2] 일본군은 3개월 안에 중국의 항복을 받아내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상하이를 맹공격했지만 장제스가 육성한 독일식 중앙군을 비롯한 중국군은 독일 고문들의 조언으로 건설한 강력한 방어선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저항하여 일본군에게 전에 없던 피해를 강요하였다. 비록 전체적인 피해는 중국군이 훨씬 컸으며 공업화, 군 현대화, 장교진 양성이 완료되지 않았으며 대군을 지휘한 경험도 부재했던 중국군이 참패하여 상하이, 항저우 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었으나 3개월 안에 중국의 항복을 받아내겠다 운운하던 일본군은 3개월 만에 겨우 상하이를 함락하는 등 고전하면서 그간 일본 내부에서 크게 유행하던 대지일격론이 중국의 전투력을 경시한 그릇된 논리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기존의 논리를 수정하기는 커녕 중국이 강하게 저항하는 것은 일본을 업신여기는 것이라는 증거(侮日모일론), 지나의 난폭함 운운하며 오히려 더욱 중국을 공격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힘을 얻어 중국에 대해 증오를 품게 되었고 일본군은 스기야마 하지메 육상 등이 2개월이면 사변을 마무리할 수 있다, 단기간에 큰 타격을 가할 수 있다, 빨리 난징을 점령하면 국민정부가 항전을 단념할 것이다, 중국의 반성을 끌어내야 한다 등으로 난징을 목표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3. 전개



3.1. 난징 도양폭격


"'''폭격은 반드시 목표에 직격할 필요는 없으며 적의 인심에 공황을 야기하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고''', 적의 방어포화를 고려하여 투하점을 고도 2~3천 미터 부근으로 선정하고, 첫번째 접근에 투하를 완료하기 위해 힘쓰도록."

제2연합 항공대 참모가 배포한 '남경공습부대 제공대의 전투요령에 관한 희망사항'

1937년 8월 15일 오전, 난징에 거주하던 마지막 일본인 거류민단과 난징 대사관 직원들이 톈진-포구를 잇는 진포선을 타고 칭다오를 향해 출발했다. 이들 일본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분노가 심하여 이들이 해를 당할 것을 우려하여 중화민국 정부는 특급열차를 준비하는 한편 40명의 헌병과 2명의 외교부 장교를 수행시켜 이들을 보호했다. 그리고 이들이 떠난지 불과 3시간 후인 오후 2시 50분, 일본 해군 기사라즈 항공대 소속 96식 육상공격기 20기가 난징을 공습하기 시작했다. 가사하라 도쿠시가 지은 남경사건에선 당시 난징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937년 8월 15일 남경동지나해에는 태풍이 몰고 온 비구름이 상공에 낮게 깔려, 성밖 동쪽에 우뚝 솟아 있는 유명한 자금산을 덮은 검은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전월 7일의 노구교 사건과 이틀 전의 제2차 상해사변 발발을 계기로 본격화된 중일전면 전쟁의 전운이 중국의 수도까지 이른 것을 알리는 듯한 먹구름이었다. 열대 고기압이 가져온 고온, 고습도의 공기가 남경시민의 기분을 불안하게 불쾌하게 했다. (...) 점심식사와 낮잠을 자고 끝내고 오후에 직장으로 돌아온 직후 남경시민들은 갑자기 울리는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와, 비구름에 덮인 남경의 하늘을 뒤흔들며 울려 퍼지는 폭격기의 포효에 금세 공포와 혼란에 빠졌다. 떠들썩하게 외치는 소리가 도시를 뒤덮은 가운데, 시민들이 유아와 노인을 데리고 밖으로 뛰쳐나와 급하게 만들어진 근처 방공호로 뛰어들어갔다.
남경사건, 가사하라 도쿠시, 어문학사. 25~26페이지
이들 기사라즈 항공대는 8월 15일 오전 9시 10분, 나가사키 오무라 기지에서 발진하여 960킬로미터를 4시간 동안 비행하여 난징을 폭격한 것이었다. 기사라즈 항공대는 난징의 군사공항인 대교장 공항과 민간공항인 명고궁 공항, 대행궁, 제1공원, 신가구 등의 주요 시설과 그 인접 민가에 60킬로그램 짜리 육용 폭탄을 투하하고 법원에 기총소사를 하였다. 이때 남경시립도서관이 폭격당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중앙연구원 생물연구소 도서관도 폭격당해 3만권의 장서와 생물 표본들이 소실되었다. 폭격은 40분 동안 계속되었고 중국 측에서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은 공전의 전과를 세웠다고 자화자찬했지만 일본 측 피해도 없진 않아 폭격기 4기가 격추되고 6기가 중국 측 반격에 파괴되어 작전 불가능 상태가 되는 등 피해가 적지 않았다. 이는 일본 측이 중국군의 방공력을 깔보아 폭격기를 호위할 전투기를 대동시키지 않았으며 성과 욕심에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작전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측은 도양폭격을 야간공습으로 변경해 실행하고 부득이하게 낮에 폭격하게 될 경우 500미터 상공에서 폭격했던 1차 폭격과는 달리 3천미터의 고고도 폭격을 실시하게 했다.
하지만 아사히 신문을 비롯한 일본 언론들은 일본측 피해는 은폐하고 호외를 발행하여 이를 칭송했으며 해군성도 '세계 항공전 사상초유의 대공습'이라고 선전하며 이를 자랑했다. 이때 일본 제국은 중화민국에 정식 선전포고를 하기도 전이었다. 이는 명백히 전시 국제법의 개전에 관한 협약과 육전 법규관례에 관한 조약을 위반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 제국은 이걸 소년 잡지에까지 실었다.(...)
사실 이 난징 도양폭격은 전날인 8월 13일에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으나 악천후로 인해 나가사키에서 비행기가 뜨지 못해 연기된 것이었다. 8월 14일엔 타이베이에서 출격한 제3공습부대 소속 18기의 비행기가 항저우, 광더(현 안후이성 쉬안청시 광더현)를 공습했다. 일본 해군의 이러한 폭격은 해군의 실적을 과시하여 해군 군비확장을 꾀하려는 것으로 전쟁이 터지기도 전인 1936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또한 수도를 공습함으로 이때까지만 해도 국지적 해결을 모색하던 정부와 참모본부의 의도와도 배치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거의 매일 난징에 대한 야간공습을 실시하였는데 8월 27일의 폭격에는 오전 1시 40분, 2시 40분, 4시에 3차례 공습을 가해 국민정부 위생서, 중앙대학 실험중학교, 장쑤성립 제3병원을 비롯한 비군사시설에도 마구 공격을 가했고 빈민가에도 폭탄을 퍼부어 시내 3곳에 화재가 발생해 100여명이 사망했는데 이중에 불에 타죽은 수가 절반에 달했다. 게다가 일본군이 독가스탄을 투하할 것이란 공포에 시민들은 공습경보가 해제될 때까지 40도의 더위에도 창문을 완전히 닫고 살아야 했다. 일본군의 이런 무차별적인 폭격에 미국, 영국, '''나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왕국''' 5개국의 대표가 항의서를 제출했다.
어떤 나라의 정치적 수도, 특히 전쟁 상태가 아닌 나라의 수도를 향한 폭격에 대해서 인간성과 국제적 예양에 관한 배려를 필요로 하는 억제에 대해서, 일본 측 당국에 적당한 배려를 촉구해야 한다. (...) 군사적 목표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폭격은 실제로 교육이나 재산의 무차별적인 파괴 및 민간인 사상과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하세가와 기요시 제3함대 사령장관은 오히려 난징 시민들이 동요하고 있으니 더욱 폭격을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실제로 폭격을 견디지 못한 외국인, 부유층들을 시작으로 사정이 되는 사람들이 난징을 떠나기 시작했고 전후 욘 라베는 7월에 난징 인구가 135만에 달했으나 폭격의 두려움에 수십만명이 난징을 떠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여기에 해군이 기획한 상하이 비행장이 완성되면서 일본 해군은 1937년 9월 10일 상하이에 12,13 항공대를 합친 제2 연합 항공대[3]를 배치하고 전투기, 정찰기의 호위를 붙혀서 본격적인 주간 공습까지 실시하였다. 병원에 대한 집중공습을 비롯한 일본 해군의 야만행위에 9월 28일 국제연맹 총회에서 영국이 일본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제출, 만장일치로 <여러 도시폭격에 대한 국제연맹의 대일 비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일본 항공기에 대한 지나의 무방비 도시 공중폭격 문제를 긴급 고려하여, 이러한 폭격의 결과로써 다수의 자녀를 포함한 무고한 인민에게 행해진 생명의 손해에 매우 깊은 조의를 표한다. 또한 전 세계에 공포와 의분의 마음을 생기게 한 행동에 대해서는 조금도 변명의 여지가 없음을 선언하고, 여기에 위의 행동을 엄숙히 비난한다.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도 10월 5일 '격리연설'을 통해 일본을 비난했지만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제재조치가 없이 경고선언만 있자 일본군부는 오히려 영미를 얕잡아보며 더욱 기고만장해지기 시작했다. 난징시는 8월 15일부터 10월 15일까지 공습 65회, 시민과 군인 392명 사망, 438명 부상, 가옥 1천 949칸 파괴를 발표했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해군항공대는 11월 15일까지 26회의 공습, 600기의 비행기를 공원해 300톤을 투하했으며[4] 12월 13일 난징 함락까지 공습 50여회에 걸쳐 900여기의 항공기를 동원해 수백톤의 폭탄[5]을 떨어뜨렸다고 한다.

3.2. 일본군의 난징 진군


"(중일전쟁은) 국민정부가 존재하는 한 해결할 수 없다. (...) 장제스의 하야, 국민정부를 몰락시켜야만 하고 (...) 결말을 어떻게 내려야 하는가의 의논이 있어도, 본래 난징을 목표로 하여 이참에 단연코 감행해야 한다. 그 방법은 대략 5,6사단으로 구성해 선전 포고하여 당당하게 하는 것을 허락한다. 짧은 시일에 난징을 공략한다. (...) 장제스는 난징을 공략하면 하야해야 한다."

1937년 8월 18일, 참모차장, 총무부장, 참모 제1부장, 참모 제2부장과 만난 마쓰이 이와네의 발언.

한편, 상하이 함락 이후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의 목적은 '해군과 협력하여 상하이 부근의 적을 소멸, 상하이 및 북방지구의 요선을 점령, 제국신민을 보호해야 한다'[6]하는 것이었지만 마쓰이 이와네는 중국으로 가기 전부터 난징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었고 전 작전과장이었던 무토 아키라 대좌가 참모부장에 취임, 제3부장 쓰카다 오사무 소장 등의 확대파들과 함께 난징으로 진격할 것을 부추겼다. 무토는 난징만 정복하면 중국이 항복할 것이라 단언했다. 육군중앙은 일찍이 10월 28일 성명을 통해 상하이를 점령하면 공격을 정지하고 중일 우교 수습에 힘쓸 것을 지시한 바가 있다.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은 본국에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고 이들은 군기이완과 강간 등 불법행위를 저지르며 육군중앙을 골치 아프게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육군성 군무국 군사과장 다나카 신이치 대좌를 비롯한 불확대파들은 마쓰이 이와네의 야심을 질타하며 현재 일본군의 상태를 보아 공격 능력이 없으며 풍기 문란이 심각하니 최대한 빨리 소집해제 및 장교 및 부사관들의 재교육을 실시하는 등 너무 급조되어 많은 문제점을 보이는 파견군에게 휴양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현재 지치고 군기 퇴폐한 상하이 파견군을 난징 공략으로 내몰면 이들이 불법행위, 잔학행위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11월 15일, 10군 사령관 야나가와 헤이스케 중장이 독단으로 난징 공격을 결정했다. 결국 11월 20일, 제10군이 19일 아침부터 난징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참모본부에 올라갔고 놀란 타다 하야오 중장이 중지시킬 것을 지시했으나 확대파인 시모무라 제1부장이 중지나방면군에게 맡겨야 한다며 주장했다. 결국 타다 하야오의 강력한 주장으로 10군에 작전지구 지시 범위가 이탈되었다는 전보가 갔으나 11월 24일엔 중지나방면군이 난징 공격을 요청했고 여기에 시모무라가 가세하여 중지나방면군의 작전구역을 제한하던 제령선 제거를 끌어냈다. 타다 하야오는 중지나방면군 참모장에게 난징 진격을 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확대파 무토 아키라는 이런 명령 불복종 행위에 대해서 오히려 칭찬하는 편지를 보내는 짓을 저질렀다. 그리고 시모무라 부장도 히로히토 앞에서의 보고에 타다 하야오의 승인을 받지 않고 멋대로 난징과 그 외 지역 공격을 고려한다는 보고를 올려 타다의 질책을 받았으나 시모무라는 가능한 상황에서만 할 것이라고 주장하여 이를 기정 사실로 만들었다. 11월 27일, 시모무라 부장은 중지나방면군 참모장에게 아직 결재를 얻진 못했으나 순조롭게 심의 중이니 양해바란다는 연락을 하고 중지나방면군은 반색하며 "안심했다."라고 연락을 했다. 난징 공격은 이렇게 사실상의 하극상이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여기에 무토 아키라는 16사단 참모장 나카자와 미쓰오 대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도발하며 난징 공격을 할 것을 부추겼다.
귀 사단은 상륙 이래 기후와 지형이 나빴기 때문에 아직 사단의 진가를 충분히 발휘할 기회가 없어 참으로 딱하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북지나에서 전용된 제6사단은 무운이 넘쳐 먼저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더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 파견군의 무석 부근에서의 전투모습을 보면 상주 점령은 언제가 될는지 초조합니다. 제10군 방면은 2,3일 안에 의홍, 율량, 광덕을 점령해야 한다는 것이 아주 유감스럽게 여겨집니다. (...) 현재의 태세에서 수비로 옮기는 것과 같은 일은 황군의 위무를 안팎으로 현양하는 방법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전황의 진전이 좋지 않다고 생각되면 중앙부로부터 전진정지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이 점도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때문에 상하이 인근에 대해서 설명도 듣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투입되어 '의붓자식' 취급을 받던 16사단은 크게 어그로가 올라 훗날 난징에서의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결국 각 부대는 상하이 인근 작전만을 상정하여 제대로 된 병참부를 조직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난징 입성을 외치면서 난징으로 몰려들게 되었는데 당연히 병참의 문제가 발생하자 현지조달주의를 취해 중국인들을 공격, 식량을 닥치는대로 약탈하고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강간하였다. 일부 기강이 잡혀 있던 부대는 저항이 없는 지역에서의 약탈이나 살상을 자제했으나 대부분의 병력이 기강이 형편없는 상황이고 상부에서 이를 제어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7] 가는 곳마다 살육, 강간, 약탈을 벌이며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 11월 19일 쑤저우에선 '''35만 쑤저우 시민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이처럼 무리수가 잔뜩 낀 진군 이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래 일본의 꿈 이었던 대륙진출의 화룡점정 이자 가토 기요마사 의 한양입성 이후 처음으로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것 이라 일본군 대본영을 비롯 야전 수뇌부도 난징 공략이 가시밭길이 될 것을 알았지만 그대로 진행하게 되었다.

3.3. 천도 결정과 탕성즈의 사령장관 임명


일본군이 난징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하자 중국군은 난징을 사수하기 위해 타이후 호를 기점으로 15군, 19군, 21군으로 구성된 좌익군과 8군, 10군, 23군으로 구성된 우익군을 조직하여 젝트 라인에 배치했지만 이들은 신병과 패잔병으로 구성되어 사기도 질도 형편없었다. 일본군은 푸산-쑤저우=우장-자싱을 연결하는 중국군 제1방어선에서 중국군 토치카에 막혀 다시 고전해야 했지만 11월 18일 창수를 점령했고 19일 쑤저우, 자싱을 돌파했다. 타이후 호 북방 방어선이 뚫리면서 11월 27일 우시, 11월 28일에 창저우가 함락되었다. 남방 방어선도 뚫려 11월 24일 후저우, 11월 30일 안후이 성의 광더가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본군이 수송수단을 인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진격속도가 느렸다는 것이다.
장제스는 난징이 위태로워지자 3차례에 걸쳐 국방회의를 열었다. 11월 17일 국방최고회의에서 장제스는 정부와 당기관을 우한으로, 수도를 충칭으로 옮기는 것을 결정하고 11월 20일에 천도 선언을 발표했다. 이러한 천도와 장기항전 태세를 갖추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으나 난징 사수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11월 20일과 11월 24일 군사위원회와 참모회의를 열었다. 평야지대인 난징을 지키는건 사실상 불가능했고 난징은 전략적인 가치도 없는 곳이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었으나 국부 쑨원의 묘가 안장되어 있는 수도 난징을 싸우지도 않고 버린다는 것은 정치적 타격이 너무도 컸으며 이 때문에 장제스는 바이충시, 허잉친, 쉬융창 등의 막료들이 지구전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전투력을 회복하기 위해 병력을 후방으로 철수시켜야 한다, 지형적으로 방위가 곤란한다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했음에도 장제스는 난징의 실함은 국민 심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고 쑨원의 능묘가 더럽혀지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게다가 난징을 사수하면서 외국의 개입을 유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장제스의 희망이었다. 이러한 장제스의 주장에 유일하게 동조했던 것이 바로 난징에서 다른 군대가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주장한 탕성즈였다.
결국 장제스의 강력한 주장으로 난징 사수가 결정되었으나 방어군 사령장관을 누구로 할 것인가 라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결국 후난 군벌이자 군사위원회 상무위원 탕성즈가 나서서 "위원장님, 혹시 책임을 질 사람이 달리 없다면 제가 감히 그 어려움에 부딪쳐 보겠습니다. 저는 난징을 강력히 사수하고 난징성과 생사를 함께할 각오입니다."라고 발언하였다. 장제스는 "모두가 반대하니 내가 남든, 당신이 남든 해야 하오."라고 하였고 탕성즈는 "어찌 위원장님을 남게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결국 탕성즈가 난징방어군 사령장관에 임명되어 난징 방어를 지휘하게 되었다. 탕성즈는 기자 간담회를 열고 수도와 존망을 같이 하겠다고 선언했고 이에 간담회에 참석한 기자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당시 탕성즈는 아메바 이질에 걸렸다가 완쾌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 평소보다도 훨씬 늙어보였고 몇몇 기자들은 그가 멍한 얼굴로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11월 20일 장제스는 난징성 복곽진지의 진지공사를 개시하였고 이로써 중화민국은 난징을 방어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사실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일본군 입장에서도 지친 부대를 무리하게 독촉해서 점령할 전략적 가치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공명심과 전쟁 확대에 눈이 먼 일본군들은 그런 이성적 판단을 하지 않았다. 여기에 일본 언론이 남경성에 일장기를 부추기라는 식으로 연일 일본군을 부추겼다. 결국 11월 28일에 참모본부도 난징 공격에 동의하였고 12월 1일 대본영이 해군과 중지나방면군이 난징을 공격하라고 대륙명 제8호를 하달했다. 12월 2일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중장이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같은날 장제스는 트라우트만 대사를 통해 만약 일본이 중국의 화북에 대한 명목상 주권을 인정해준다면 일본의 요구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사를 전달했지만 일본군은 이미 협상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히로타 외상이 "많은 희생을 낸 지금, 이와 같은 경이한 조건으로는 용인하기 힘들다."고 떠들었고 고노에 수상은 "패배자로서 아주 무례한 언사다."라면서 목청을 높였고 이러한 분위기에 처음에는 화평교섭에 찬성했던 스기야마 육군대신도 번복해서 "이번에는 일단 독일의 알선을 거절하고 싶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고노에는 강화를 받아들이면 중국과 열강이 일본을 우습게 알 것이라면서 군부를 질타했다(...). 이로써 중일전쟁을 조기에 종결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트라우트만 공작은 사실상 결렬되었고 난징에 대한 군사적인 공격, 그걸 넘어 중일 간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 군부의 대표적인 불확대파인 타다 하야오 중장은 "참모본부와 내각의 입장이 바뀌었다. 내각이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한다."고 한탄했다.[8] 이시이 이타로는 "기가 막힌 대신들이다. 이젠 갈데까지 가버려 정신차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일본은 정말로 국난에 부딪히지 않으면 배울 수 없는 걸까."라고 한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3.4. 양군의 규모와 편제



3.4.1. 일본군


[image]
일본군 수뇌부, 왼쪽부터 지나방면함대장 하세가와 기요시, 중지나방면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야스히코 친왕, 제10군 사령관 야나가와 헤이스케다.
난징 인근 일본군의 총수는 24만, 난징 공략에 투입된 부대는 16~20만에 달했다. 여기에 지나 방면함대 소속 제1공습부대가 난징 폭격에 가세했다.

3.4.1.1. 육군

  • 중지나방면군:사령관 마쓰이 이와네 대장
    • 제10군: 사령관 야나가와 헤이스케 중장
      • 제114사단: 사단장 스에마쓰 시게하루 중장.
        • 보병 127여단: 여단장 아키야마 주사부로 소장.
          • 보병 제66연대: 연대장 야마다 쓰네타 중좌.
          • 보병 제102연대: 연대장 치바 고타로 대좌.
        • 보병 128여단: 여단장 오쿠 야스카타 소장.
          • 보병 제115연대: 연대장 야가사키 세쓰조 중좌.
          • 보병 제150연대: 연대장 야마모토 주조 중좌.
        • 기병 제16대대, 야포병 제120연대, 공병 제114연대, 치중병 제114연대
      • 제6사단: 사단장 다니 히사오 중장.
        • 보병 제11여단: 여단장 사카이 도쿠타로 소장.
          • 보병 제13연대: 연대장 오카모토 야스유키 대좌.
          • 보병 제47연대: 연대장 하세가와 마사노리 대좌.
        • 보병 제36여단: 여단장 우시지마 미쓰루 소장.
          • 보병 제23연대: 연대장 오마코토 진진 대좌.
          • 보병 제45연대: 연대장 다케시타 요시하루 대좌.
        • 기병 제6연대, 야포병 제6연대, 공병 제6연대, 치중병 제6연대.
      • 제5사단 구니사키 지대: 사령관 구니사키 노보루 소장, 보병 제 9여단 제41연대.[9]
      • 무호방면의 제18사단.
    •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아카사노미야 야스히코 중장.
    • 제9사단: 사단장 요시미즈 료스케 중장.
      • 보병 제6여단: 여단장 아키야마 요시미쓰 소장.
        • 보병 제7연대: 연대장 이사 가즈오 대좌.
        • 보병 제35연대: 연대장 후지이 스에키치 대좌.
      • 보병 제18여단: 여단장 이데 센지 소장.
        • 보병 제19연대: 연대장 히토미 슈조 대좌.
        • 보병 제36연대: 연대장 와키사카 지로 대좌.
    • 제26사단: 사단장 나카지마 게사고 중장.
      • 보병 제19여단: 여단장 구사바 다쓰미 소장.
        • 보병 제9연대: 연대장 가타기리 고로 대좌.
        • 보병 제20연대: 연대장 오노 노부아키 대좌.
      • 보병 제30여단: 여단장 사사키 도이치 소장.
        • 보병 제33연대: 연대장 노다 겐고 대좌.
        • 보병 제38연대: 연대장 스케가와 세이지 대좌.
      • 기병 제20연대, 야포병 제22연대, 공병 제16연대, 치중병 제16연대.
    • 제13사단 야마다 지대, 보병 제103여단[10], 보병 제65연대.[11]
    • 제3사단 선견대, 보병 제68연대: 연대장 오모리 다카시 대좌.
    • 장강 북안의 제13사단 주력, 후방경비를 맡은 제3사단 주력, 제11사단, 제101사단

3.4.1.2. 해군

  • 지나방면함대: 사령관 하세가와 기요시 중장.
    • 제3함대: 함대 사령장관 하세가와 기요시 중장 겸임.
      • 제11전대: 전대장 곤도 에이지로 소장.
        • 아타카
        • 가시타
        • 도바
        • 야에야마
        • 구리
        • 쓰가
        • 하스
        • 호쓰
        • 히라
        • 세타
        • 사가
        • 후타미
        • 아타미
        • 제24구축대
          • 야마카제
          • 우미카제
          • 가와카제
          • 스즈카제
        • 제1수뢰대
          • 가사사키
          • 오오토리

3.4.2. 중국군


당초 난징 방위군은 7만명 정도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난징에 몰려드는 20만에 달하는 일본군의 규모를 본 난징 조기 함락을 저지하기 위해 헌병대, 경찰, 비정규군, 노무자들까지 동원하여 당초 계획의 두배를 넘는 13개 사단, 15만에 달하는 병력을 배치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상하이 전투에서 파괴되어 만신창이가 된 사단에 농촌에서 허겁지겁 징병하여 무기를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신병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 신병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하지만 살아남은 87, 88사단을 비롯한 독일식 사단과 중국군에 얼마 없던 기계화 부대들 역시 있었으며 무엇보다 일본군(침략자)들에 대한 전의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 2군
    • 41사단
    • 48사단
  • 66군
    • 159사단
    • 160사단
  • 71군[12]
    • 87사단
  • 72군[13]
    • 88사단
  • 74군[14]
    • 51사단
    • 58사단
  • 78군[15]
    • 36사단
  • 83군[16]
    • 154사단
    • 156사단
  • 장갑병단 3대대[17]
  • 교도총대[18]
    • 103사단
    • 112사단
  • 헌병대
    • 2연대
    • 10연대
    • 교도연대
  • 고사포 부대

3.5. 난징 공방전



3.5.1. 전투의 시작과 장제스의 탈출


12월 4일과 5일에 걸쳐 16사단과 9사단이 구용현을, 114사단이 율수현을, 6사단과 구지나키 지대가 고수현으로 돌입함으로 난징 지구로 일본군이 진입하여 본격적인 난징 방어전이 시작되었다.
탕성즈는 상하이에서 패퇴해 전열을 가다듬은 독일식 87, 88사단을 중심으로 난징 교외의 모든 건물을 불태우고 난징 성에 병력을 모았는데 난징 성곽은 높이 13~25미터, 두께 13미터, 둘레 35킬로미터의 견고한 물건이었지만 항공기와 야포를 막기엔 너무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탕성즈는 교량과 배를 모두 없애고 무단후퇴자는 참수하겠다는 명령을 내리고 본인도 난징에서 죽겠다며 배수진을 쳤지만 덕분에 50만에 달하는 난징 시민들의 피난길도 막아버렸다. 하지만 12월 8일까지 외국인을 소개하는 작업은 했었기 때문에 탕성즈는 후일 아이리스 장 등에게 난징대학살의 큰 원인을 제공한 인물 중 하나로 큰 비판을 받았다.
12월 6일 일본군 선두부대가 난징성 외곽에 도달했다. 일본군 포병대는 난징을 포격할 수 있게 되었고 제1공습부대 예하 제2연합항공대가 상주에 전진 기지를 배치, 난징을 맹폭하였고 아직까지 살아있던 중국 공군이 맞섰다. 일본군의 공격이 매서워 장제스의 안위마저 보장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자 장제스는 12월 6일 사단장 이상의 모든 고급 지휘관을 소집하여 "난징을 사수하고 있으면, 이미 출동을 명령해 놓은 윈난의 신예부대를 몸소 이끌고 일본군의 포위를 격멸할 작전이다."라며 이들에게 결사항전을 독려했다. 탕성즈도 "나는 난징과 운명을 함께할 것을 맹세한다. 수도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다음날인 7일 새벽, 장제스는 날이 밝자마자인 오전 5시 45분, 아내인 쑹메이링 및 여러 측근들을 거느리고 강서로 향하는 두대의 대형 단엽기를 타고 난징을 빠져나갔다. 이어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을 비롯한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도 우한으로 철수했으며 난징시장을 비롯한 난징시의 요인들과 정부 및 군의 간부들이 난징을 탈출했다.

3.5.2. 마쓰이 대장의 특별지시


일본군은 탕성즈가 배치한 중국군 2개군, 4개 사단으로 구성된 최외곽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난징을 포위했다. 이미 일선의 사단들의 군기 이완을 인지하고 있던 마쓰이 대장은 이미 12월 5일 각 사단의 각각의 입성을 막는 것을 지시했고 이이누마 마모루 참모장도 성벽에 일장기를 꽂는 것을 금하며 각 부대의 입성을 금지한다는 지시를 보내는 등 일선 부대의 통제에 힘쓰고 있었다. 장제스가 난징을 빠져나간 12월 7일, 난징 함락이 목전에 있다고 판단한 중지나방면군은 <남경성 공략요령>, <남경 입성후의 처리>, <남경성 공략 및 입성에 관한 주의사항>을 예하 부대에 하달했다. 엄격히 선발된 군기가 확립된 부대만 난징에 입성시켜 나머지 사단은 성외에 주둔시켜 중국인들의 피해를 막을 것을 촉구한 중지나방면군의 지시는 다음과 같다.
하나, 황군이 외국의 수도에 입성하는 유사 이래의 성사를 앞두고, 오래도록 역사에 남겨야 할 업적으로 전 세계가 주목하는 대사건이 될 것을 감안해 정정당당하게 장래의 모범이 될 마음가짐으로 각 부대의 난입, 우군과의 싸움, 불법행위 등이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하나, 부대의 군기풍기를 특히 엄숙히 하고, 지나군민으로 하여금 황군의 위풍에 존앙 복종하게 하고, 적어도 명예를 훼손하는 것같은 행위가 절대 없도록 한다.
하나, 입성부대는 사단장이 특별히 선발하기로 하고, 미리 주의 사항 특히 성내 외국권익의 위치 등을 철저하게 파악하여 절대로 과오가 없도록 하며 필요하면 보초를 배치한다.
하나, 약탈행위를 저지르고, 또 부주의로라도 불을 내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 군대와 동시에 다수의 헌병, 보조헌병을 입성시켜 불법행위를 적발하게 한다.
불행하기도 마쓰이 이와네의 이러한 지시는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폐결핵으로 와병한 마쓰이를 대신해서 공성전을 지휘하던 야스히코 친왕은 "난징 공격의 통제선 같은 것은 굳게 지킬 필요는 없다."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며 날뛰고 있었고 무엇보다 마쓰이 본인의 무리한 난징 공격에 그 원인이 있었다. 12월 7일 시점에서 난징을 포위한 일본군은 7만에 달했는데 그들을 관리할 헌병은 '''17명'''이었다.(...) 그리고 그간 난징으로 진격하면서의 불법행위도 전혀 단속하지 않고 오히려 부추긴 것이 일본군 지휘부였는데 난징에서만 이들이 갑자기 신사적으로 변할 리 만무했다. 게다가 중국군의 청야 작전 때문에 난징 밖에서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일본군은 통제를 무시하고 마구 난징 안으로 난입하기에 이른다.

3.5.3. 일본군의 최후통첩


"아군의 손해는 매우 극심하고, 우리는 단지 피와 살로만 강철에 맞서 싸우고 있다."

1937년 12월 10일, 탕성즈가 총사령부로 보낸 전보

12월 7일 마쓰이 장군은 탕성즈에게 12월 10일 오전까지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탕성즈는 이를 묵살했다.
12월 8일 일본군은 조롱산-막부산-자금산-우화대의 복관진지로 접근, 난징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12월 9일 저녁 일본군은 "일본군은 저항자에 대해서는 준열하게 관용을 베풀지 않지만, 무고한 민중 및 적의가 없는 중국 군대에게는 관대함으로 이를 범하지 않는다."라는 일본어와 중국어가 병기된 투항권고문을 마쓰이 이와네 사령관의 명의로 성내 8개 소에 투하했다. 탕성즈는 성문을 모두 막는 조치로 대응했다. 그동안 일본군 6사단, 9사단, 16사단, 114사단이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12월 10일 중지나방면군 참모부장 무토 아키라 대좌와 중지나방면군 참모 나카야마 야스토 소좌가 통역관을 대동하고 오후 1시까지 중산문-구용 도로에서 투항권고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탕성즈는 이를 무시했다. 이에 마쓰이 사령관은 오후 1시, 쑤저우의 중지나방면군 사령부에서 "상하이파견권 및 제10군은 난징성 공략을 속행하고 성안을 소탕해야 한다"라는 중방작전명령 제34호를 통해 난징 총공격을 지시했다. 이에 일본 육군과 해군의 합동 총공격이 개시, 4개 사단, 10만명의 일본군이 공격해왔다. 6사단이 중화문으로, 9사단이 공화문으로, 16사단이 중산문과 태평문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전차대를 앞세워 돌격했으나 독일제 PaK 36 대전차포의 대응에 격퇴되었다. 이날 오후 7시 탕성즈는 "본군은 복곽진지에서 난징 고수 최후의 전투에 몰입했다. 각 부대는 진지와 존망을 함께 하기로 결심하고, 사수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라."고 지시, 조금이라도 진지를 포기한 병력을 엄벌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각 군의 배편을 모두 운송사령부가 압수함으로 임의 퇴각의 여지를 막았다. 그리고 송희렴 휘하 36사단에게 장강 연안 경비를 강화하고 사령관의 허락 없는 모든 도강을 금지했다. 그리고 헌병과 경찰들에게 "대오를 이탈한 군인들이 제지에 응하지 않고 도강하려고 했을 때는 무력으로 저지하라."고 엄명했다.
허나 일본군의 맹공에도 중국군은 악착같이 저항하여 12월 11일까지 전선은 교착 상태였지만 12월 10일 저녁에 일본군 9사단 36연대 공병대인 와키사카 부대가 광화문 앞문의 성벽 일부를 폭파시키고 그 잔해 위에 일장기를 게양한 것을 두고 난징에 입성한 것이라고 오보가 나와 NHK를 비롯한 일본 언론들은 난징을 점령했다고 난리를 쳤고 일본 전체가 좋아 열광하었다. 곳곳에서 난징 함락을 축하하는 집회와 등불행력이 이어졌고 "황군이 용감하게 난징에 입성/적의 수도에 역사적인 일장기/각 성문을 확보, 잔적 소탕/맹렬한 시가전을 전개"[19], "남경성 위에 찬란한 일장기/감격의 10일, 수도 점령/광화문, 와키사카 부대 명예로운 첫 진입/전선 일제 돌입 시가전 전개/쓰러진 성벽 옆에서 만세"[20], "축. 적의 수도 난징 함락/역사에 새긴 빛나는 대첩/난징 성문에 일장기/성내 남은 적들 완강히 저항/와키사카 부대의 결사적인 돌입"[21] 등의 황당한 보도들이 이어졌다.
[image]
환호하는 일본국민
당시 난징의 수서문과 한중문을 공격하느라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던 제6사단 제45연대 마에다 요시히코 소위는 36여단에서 전해진 승전보에 가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뉴스를 들은 그 시각에 난징 수비군은 여전히 완강하게 저항을 계속하고, 상공에는 고사포 탄막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성벽 부근 또한 포연에 덮여 끊임없이 총소리가 들리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난징 함락은 누가 퍼뜨린 소문인가?
마에다 요시히코 소위 진중일기, 1937년 12월 11일
사실 일본군은 난징 시내에서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성문을 폭파시킨 데에 만족해야 했다. 문제의 와키사카 부대는 오히려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내면서 중국군의 반격을 맞고 있었다. 권성욱의 중일전쟁에서는 12일 오후, 1개 대대가 광화문 안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으나 중국군의 결사저항에 교착 상태에 빠졌다고 쓰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본에선 12월 12일까지 애드벌룬을 띄우고 상점가에 일장기, 욱일기를 휘날리며 난징 함락을 축하하고 뉴스 영화 방영, "결사" 종군 기자의 보고, "육탄소장"이라는 사쿠라이 타다요시 육군 소장의 강연회 등을 가졌다. 도쿄외국어학교 학생 700명이 일장기를 휘두르며 황궁을 방문했고 곳곳에서 봉축 퍼레이드와 축하행진이 벌어졌다.

3.5.4. 퇴로 차단과 최후의 협상


본국에서 저런 뻘짓을 하고 있을 동안, 일본군은 12월 12일 새벽에 전에 없던 격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군의 폭격기와 야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6사단과 114사단이 우화대 진지를 점령, 난징 시내를 바라보며 포격을 퍼부었다. 2사단은 우화문에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자금산 북쪽 기슭에 16사단 예하 사사키 지대가, 남쪽 기슭에 16사단 주력이 계영청 휘하의 난징 방어군 중 최고 정예 부대 중 하나였던 난징 교도총대와 3일째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166사단 중포 부대를 비롯한 막강한 일본군의 포격으로 중산문의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우롱산 포대에서 132사단의 야마다 지대가 공세를 펼쳤고 난징 서쪽의 상신하진에서 강동문, 하관에 걸친 습지대 쪽으로 6사단이 진격, 중화문에서 수서문에 이르는 지역을 공격했다. 수서문에는 일본군 전차대가 진격해 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독가스를 사용하면서 방어선이 무너졌고 중국군은 시내로 철수하면서 시가전을 벌였다. 한편 일본군이 중국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파견했던 구니사키 지대가 중국군이 양쯔강 너머로 철수할 거점인 푸커우를 함락해 중국군은 퇴로가 차단되고 말았다.
12월 11일 정오, 장제스는 33전구 부사령장관 구주퉁을 통해 탕성즈에게 구두로 퇴각을 허락했다. 탕성즈는 그날 밤 안으로 바로 철수 작전을 실시할 것을 권고했지만 탕성즈는 지금 철수하는 것은 큰 혼란을 불러 일으킬 것이며 늦어도 내일 밤에는 철수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장제스는 그날 밤 정식 철수 허가서를 보내왔다. 12월 12일 새벽, 탕성즈는 난징 북동부의 백자정 관저에서 막료들을 모아 철수 명령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13일 일출이 있기 전에 돌격 작전으로 일본군 포위를 돌파하겠다는 것이 탕성즈의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럴 여유를 주지 않고 12일, 일본군은 다시 엄청난 맹공을 퍼부어왔고 당황한 탕성즈는 오전 11시, 부사령장관 유흥 대령과 참모장 주란 대령을 난징 국제 위원회 위원장 욘 라베에게 파견하여 일본군에게 3일 간의 휴전을 제안하는 것을 중재해달라고 부탁했다. 3일간 휴전하는 대신에 중국군은 철수하고 난징을 일본군에게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복창 호텔 관리인 슈페르링이 백기를 들고 마쓰이 이와네를 찾아가 휴전 조건을 전달하였고 라베는 일본 대사관에 보낼 전보를 준비하였다. 탕성즈는 미국 군함 파나이호를 통해서 장제스에게 협상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장제스가 일본군과의 공개적인 타협을 허락하지 않아 탕성즈로부터의 정식 외교 문서가 오지 못하는 바람에 최후의 교섭은 없던 일이 되었다.
12일 정오, 중화문과 중산문이 파괴되어 일본군이 성벽을 점거했고 우화문에서도 일부 일본군이 성내로 진입했다. 정오, 철도부 지하실의 사령장관부에서 탕성즈는 고급 지휘관 회의를 소집해 오후 3시에 전군 철수 명령을 내릴 계획이었으나 전황의 급변으로 지휘관 회의 개최가 불가능해져서 오후 5시는 되어서야 겨우 회의가 열릴 수 있었다. 게다가 이미 철도부 부근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어 백자정의 탕성즈 관저에서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일선에서 지휘하던 주요 지휘관들은 참석조차 하지 못했다. 탕성즈는 일방적으로 본대는 포위망을 뚫고 나머진 서쪽으로 퇴각하여 11시까지 안후이 남단에서 집결한다는 철수 명령서를 전달한 후 5시 반에 회의를 종결했다. 하지만 참석하지 못한 지휘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참석한 지휘관들조차 자신들의 일선 부대에 연락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미 난징 방위군은 붕괴되고 있었다. 철수 명령서같은 것은 집행될 수 없었다. 이때 미 해군 함선 파나이 호와 파나이 호를 구하려던 영국 경비정 레이디버드 호가 일본군의 공격에 침몰하여 50명의 사상자를 냈다. 중국은 영미의 참전을 기대했지만 미국과 영국 모두 배상금만 받고 물러났다.

3.5.5. 난징의 함락


[image]
중산문을 점령한 일본군

난징에 입성하는 일본군.
탕성즈의 명령에 따라 사령장관부 직속 부대와 36사단 헌병대가 오후 6시부터 기선을 타고 철수하기 시작했고 오후 3시부터 사령장관부와 연락이 두절된 일선부대는 크게 동요하여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통신선이 끊어진 관계로 후퇴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음에도 탕성즈는 군사 기밀서류를 소각하고 관저에 불을 지른 다음에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참모들을 데리고 달아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사령장관부를 들르려 했으나 교통혼란으로 인해 차를 이용할 수 없어 그만두고 오후 8시에 해군함정 전용 부두에 도착, 방위군 간부 전원을 모은 다음에 9시에 마지막 기선을 타고 육합현으로 탈출했다. 허나 난징시장 대리이자 헌병대 부사령관 샤오산링 소장은 퇴각을 거부하고 권총으로 자결했고 159사단 부사단장 뤄처췬 소장도 부하들과 함께 일본군을 향해 돌격하다 전사했다. 그외의 여러 중국군 고급 지휘관들이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하거나 자결함으로 난징과 생사를 같이 하였다.
하지만 탕성즈가 달아났단 소식과 일본군 대군이 성안으로 몰려온다는 소문에 중국군은 완전히 무너져내려 각자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탈출을 위해 같은 국민당 군 끼리 총격전을 벌이는 등[22] 와해되었다. 시민들 역시 패닉에 휩싸여 남주의 주택밀집가에서부터 대규모 탈출행렬이 퇴각하는 병사들의 뒤를 따랐다. 시카고 신문의 기자 스틸은 당시의 혼란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병사들이 퇴각하는 주요 간선도로인 중산로에서 불과 몇 야드 밖에 떨어지지 않은 교통부의 100만 달러짜리 청사에 방화했을 때, 지옥을 방불케했다. 그곳은 탄약고로 사용되고 있어 불이 포탄, 폭탄창고에 이르렀을 때 무서운 폭음이 밤 하늘을 관통했다. 총탄과 포탄의 파편이 높게 모든 방향으로 새된 소리를 내며 흩어져 강가에 이르는 도로를 배회하는 군중의 공포와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타오르는 청사는 드높게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무섭게 열을 뿜어냈다. 공포에 빠진 군중의 행렬이 주저하며 걸음을 멈추었고, 교통은 정체되었다. 트럭, 대포, 오토바이 등과 말이 끄는 수레가 맞부딪히며 뒤엉키는 한편, 뒤에서는 계속 앞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행로를 열겠다는 일념으로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길바닥의 집적물에 불이 옮겨붙어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불꽃의 장벽을 만들었다. 퇴각하는 군대에 남아 있던 질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제 각자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불타는 장해물을 우회해서 간신히 하관문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잔해나 시체로 막혀 있는 문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는 이 거대한 성벽을 넘으려는 야만적인 돌격이었다. 옷을 벗어 묶어서 줄을 만들었다. 공포에 휩싸인 병사들은 흉벽에서 소총과 기관총을 내던져 버리고 기어 내려갔다. 하지만 그들은 또 하나의 진퇴유곡에 빠진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1938년 1월 3일자 시카고 데일리 뉴스
9시, 육군장갑병단 병력이 사령장관부와 연락이 더 이상 닿지 않자 무단 퇴각을 감행하여 자신들을 막는 36사단 기관총 부대를 전차로 짓밟고 탈출했다. 이렇게 퇴로가 뚫리자 시민과 병사들의 물결이 성밖으로 쇄도했다. 하지만 강을 건널 방법이 전무했으므로 10시 쯤에 몇킬로에 걸친 강변에 엄청난 숫자의 패잔병과 난민들만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발을 구를 뿐이었다. 1만명 정도의 병력이 장강 남안을 건너려다가 6사단 기병연대의 공격에 1천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쫓겨났다. 성벽 서쪽 습지대로 탈출하려던 중국군도 6사단 45연대에 저지되었다. 결국 사람들은 너도나도 장강에 몸을 던져 헤엄치거나 급조한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익사하거나 탈진해서 사망했다.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던 사람들은 총을 버리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어 숨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안전할 것이라 믿어졌던 난징 안전구 [23]로 몰려들었다.
일요일(12일) 밤, 중국 병사는 안전구 내로 흩어져 많은 군인이 군복을 벗어버렸다. 민간인의 옷을 훔치거나 지나가던 시민들의 옷을 구하기도 했다. 또 "평상복"을 찾지 못한 군인들은 군복을 벗어버리고 속옷만 입고 있었다. 군복과 함께 무기도 버렸기 때문에 길가에는 소총, 수류탄, 검, 배낭, 상의, 군화, 군모 등으로 가득했다. 하관문 근처에서 버려진 군장품은 엄청난 양이었다. 교통부 앞에서 두 블록 앞까지 트럭, 대포, 버스, 사령관의 자동차, 짐마차, 기관총, 휴대무기 등이 쌓여 쓰레기장처럼 되어 있었다.
1938년 1월 9일자 뉴욕타임스
13일 0시 30분부터는 더 이상 저항하는 병사들이 없었다. 최후의 방어진지인 중산문을 일본군 18사단 20연대가 점령, "쇼와 12년 12월 13일 오전 3시 10분, 오노 부대 점령"이라고 분필로 써놓았다. 12월 13일 일본군은 총공세를 취했고 오전 4시에 난징 정부 청사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이제부터 소위 잔적 소탕을 명령, 담당구역을 할당하고 성내로 몰려들었다. 10군 사령관 야나가와 헤이스케 중장은 다음과 같은 명령서를 보냈다.
정집단명령(정집작명갑호의)
12년 13일 오전 8시 30분.
하나, [정] 집단은 남경성내의 적을 소탕하라.
하나, 각 병단은 성내를 향해 포격은 물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적을 소탕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성안을 소각하고, 특히 패적의 기만행위에 놀아나지 않아야 한다.
9사단 8여단장 아키야마 요시미쓰 소장도 <남경성내 소탕명령>, <소탕실시에 관한 주의>를 내보냈다.
하나, 도주한 적은 대부분 평상복으로 가장했을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런 의심이 가는 자는 모두 검거하고 적절한 장소에 감금한다.
하나, 청장년은 모두 패잔병 또는 편의병으로 보고, 모두 체포감금해야 한다.
입성한 일본군은 마치 토끼사냥을 하듯이 안전구와 시내를 샅샅이 뒤지며 중국군과 중국군 부역자들을 색출하고 패잔병을 소탕한다는 구실로 대학살을 벌이게 된다. 대략 중국군 15만명 정도가 난징 방위전에서 싸웠고 가사하라 도쿠시는 이 중에서 4만명이 난징을 탈출하여[24] 후에 집결하여 다시 일본군과 싸웠고 2만명이 전사 혹은 부상, 1만명이 행방불명, 나머지 8만명이 포로로 잡히거나 투항하거나 학살되었다고 추정했다.
이후 우한으로 달아났던 탕성즈는 책임을 지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다.[25] 12월 17일 입성한 마쓰이 장군은 난징 함락을 기념하는 퍼레이드를 행했으나 이후 학살을 방조한 전범으로 교수형당했다.

4. 결말


[image]
난징에 입성하는 마쓰이 이와네
난징시의 운명에 대해서는 '''난징 대학살'''로 설명 끝.
중일전쟁에 관해서는, 확대파들의 주장과 달리 난징이 함락됐음에도 장제스가 하야하기는커녕 장제스는 우한을 거쳐 충칭으로 정부를 이전하고 오히려 전에 없던 권위 위에서 군림하며 중국의 전쟁 최고 사령관으로 영향력을 과시했고 장제스에게 적대적인 군벌들까지도 일본제국을 거부하며 중화민국과 장제스에게 복종하였다. 중국의 결속력은 이후 왕징웨이탈출에서 일본에 포섭된 군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에서 다시 한번 드러났다. 그 외에 난징 전투가 중일 화평공작에 끼친 영향과 일본 정치권의 반응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면 트라우트만 공작 문서 참조.
난징 사수 자체는 정치, 군사, 외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응당 해야하는 것이 맞았지만 탕성즈는 세부적인 전략이 떨어져[26] 그동안 키워놓은 독일식 사단이 죄다 갈려나갔고 후에 미국의 지원을 통한 미국식 사단 육성 이전까지 중국군은 일본군 보다 몇 수 아래의 무장과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편제로 싸워야 했다.
일본은 마치 몇백년 전 조상들 처럼 적국의 수도만 공략하면 전쟁을 이길 줄 알고 모든 역량을 동원했지만 오히려 전쟁의 수렁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27]

5. 매체에서


난징 대학살 사건을 다루는 영화라면 높은 확률로 난징 전투를 오프닝이나 초반부에서 훑고 지나간다. 대표적으로 욘 라베, 난징! 난징! 등이 있다.

6. 참조문헌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국인민해방군사, 국방군사연구소.
  • 중일전쟁 초기 국민정부군의 항전전략과 전술 재검토, 기세찬, 국방부 군사편찬소.
  • 남경사건, 가사하라 도쿠시, 어문학사.
  • 일본군사사 상, 후지와라 아키라, 제이앤씨.
  • 서문당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7. 관련문서



[1] 이에 대해서 일본군에게 유리한 남북전선을 불리한 동서전선으로 바꾸어 항전의 시간을 벌고 압력을 덜려는 중화민국의 전략적 구상이었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합의된 것으로 보이나 중화민국은 성공적인 전략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은 실패한 전략으로 평가한다.[2] 이와 별개로, 일본 제국 내부에서도 전공에 눈이 먼 해군 등이 자신들도 중일전쟁에 깊게 참여할 구실을 얻기 위해 상하이 쪽을 도발하였다. 즉 양측의 구상이 나름 시너지 효과를 낸 셈.[3] 지휘관은 미쓰나미 데이조 대좌였다.[4] 해군항공본부 교육부장 오니시 다키지로의 강연에서 나온 수치.[5] 해군성 해군 군사보급부 <지나사변에서의 제군해군의 행동>에 나온 수치.[6] 임참명 73호.[7] 일본군 수뇌부는 강간이 '병사들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난징을 공략하여 '중국 여성을 정복하고' '완력으로 여자를 제것으로 만들라'는 것을 부추기며 병사들을 독전했다. 이 무슨 개막장(...)[8] 수많은 피를 흘리고 3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상하이 하나 함락시켜 군부에선 전략을 바꾸는 수 밖에 없었지만 분노와 증오에 찬 전투현장에 있는 야전부대 들은 사령부의 명령 따위 씹고 계속해서 진격해 나갔는데 이게 도쿄에 있는 내각에선 승승장구 하는 것 처럼 보여 그런 자세를 취했다. 더군다나 일본이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건 임진왜란 때 한양함락 이후 처음인데 그래서 더 고무 된 것도 있고.[9] 지휘관 야마다 데쓰지로 대좌.[10] 여단장 야마다 센지 소장.[11] 연대장 모로즈미 교사쿠 대좌.[12] 난징 남부 방위.[13] 난징 남부 방위.[14] 난징 25킬로미터 최외곽 방어 병력.[15] 난징 북부 방위.[16] 난징 25킬로미터 최외곽 방어 병력.[17] 지휘관 두위밍. T-26, CV-33, 르노 FT-17를 비롯한 전차 17량을 보유하고 있었다.[18] 쑨원의 묘 방어.[19] 도쿄니치니치신문.[20] 요미우리 신문.[21] 도쿄 아사히 신문.[22] 성문들과 포구에는 탕성즈의 명령으로 배치된 독전대가 있었고 후퇴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무단후퇴금지령은 유효한 상태였다.[23] 욘 라베가 다른 외국인들과 난징대학을 중심으로 만든 안전구역이다.[24] 역으로 일본군이 난징으로 쳐들어 온 동쪽방면으로 도망갔다. 일본군도 상하이에서 급하게 난징으로 몰려온거라 지휘체계와 점령 정책이 원활하지 않아 가능했던 일이다.[25] 1939년 5월에 복권되었으나 그는 다시 실권을 쥐지 못했고 국공내전 중에 공산당에 전향해서 후난성 부주석과 국방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나 문화대혁명 중에 숙청되어 전 국가주석 류사오치처럼 홍위병들에게 구타당하여 온갖 질병은 다 얻은 채 82세에 죽는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26] 만약 자금산과 난징 교외 요충지를 요새화 해 기습을 통한 지연전을 펼쳤으면 일본은 더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궁극적으로는 휴전협상 까지 이끌어 낼 수 있었을 것 이다. 아니면 적어도 질서있는 철군과 민간인 대피를 가능케 해 인명피해를 크게 줄였을 수도 있지만 탕성즈는 모든 병력을 난징 성 안에 끌고들어와 고립되게 만들었고 중세시기 지은 성벽은 비행기와 야포 사격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27] 난징대학살과 같은 뻘짓으로 중국인들의 항일 의지가 높아진 것도 있지만 애초에 중국이 일본군의 분투로만 정복하기엔 너무도 컸고 국민정부의 수뇌부는 우한, 광저우 등 으로 옮기다 내륙의 충칭에서 농성했고 일본 육군은 종전까지 쓰촨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늘어진 전선으로 인해 어려워진 보급에 국민당군과 공산군의 게릴라전 으로 인해 일본의 출혈은 갈수록 심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