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관저
1. 개요
일본 내각총리대신의 관저로 도쿄도 치요다구 나가타초(永田町)에 있다. 일본 행정부의 지도자인 '''총리'''부터 관방장관, 각 부처의 장관(대신)의 주업무의 장소로 국가 정무를 총괄하는 최고기관이다.
본 문서에서는 편의상 수상관저라 하지만 이는 언론 등에서 주로 쓰이는 명칭으로, 법령이나 공문서에서는 내각총리대신 관저(内閣総理大臣官邸), 혹은 총리대신 관저(総理大臣官邸 そうりだいじんかんてい)라는 말이 쓰인다. 총리관저(総理官邸 そうりかんてい)라는 말도 쓰인다.
수상관저는 '''총리가 국정 업무를 총괄하는 집무실만을 일컫는 명칭'''으로 사용하며, 총리가 생활하는 공간은 수상공저(首相公邸)라고 부른다. 수상관저와 수상공저는 서로 인접하여 연결통로를 통해 오갈 수 있으며, 본 문서에서는 둘을 같이 서술한다.
청와대나 백악관과는 달리 특징적인 명칭을 갖지는 않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에 수상관저를 로마자로 칸테이(Kantei, 官邸의 일본식 독음)라고 표기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영미권에서는 Kantei를 수상관저(Official Residence of the Prime Minister)에 대한 별도의 명칭으로 간주하고 사용하고는 한다. 일본에서는 공식적으로 '관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기관이 오직 '''수상관저'''밖에 없다.
지상 5층, 지하 1층인 일본 총리 관저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인 2002년 완공됐다. 신축된 수상관저 총 공사비만 당시 돈으로 7백억 엔(한화 7천억 원)이 들어갔다.
2. 구역
수상관저 본관 지하1층 국가위기관리센터. 1층은 출입구의 로비에 기자회견장/각종회견장. 2층은 각/국가 정상들의 귀빈실/회의실. 3층은 각/성 사무실, 현관홀. 4층은 내각의 모든 장관들의 각의 집무실. 5층은 총리대신 집무실과 내각부의 총괄대변인 관방장관 집무실과 부장관의 집무실이 있다.
수상관저 외부엔 수상의 거주지인 '''수상공저'''가 연결되어 나뉘어져 있는데. 각국의 정상(대통령, 총리 등)들과 각종 연회나 만찬회 등의 장소로 쓰이고 있다. 관저구역의 관리시스템은 일본 경찰청 관저경비대가 담당한다.
3. 역사
3.1. 2002년 신축 이전
초기의 관저는 메이지 시대 초기에 태정대신 관저로서 사용되던 것이었고, 1885년에 내각총리대신 직위가 신설되면서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 입주하였다. 당시 건물은 유럽 양식의 2층짜리 목조 건물이었다.
1923년에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관저와 공저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일본 정부는 중앙관청 복구 계획을 세우면서 총리 관저도 다시 짓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옛 사가 번 다이묘 집안이었던 나베시마(鍋島)[2] 가문의 도쿄 저택 부지를 매입하였고, 이곳에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새로운 관저가 1929년에 완공되었고 그 옆에 일본 양식의 2층짜리 목조 건물이 총리의 생활공간인 공저(公邸)로 지어졌다. 이 건물에 처음 입주한 사람은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였다.
그러나 관저 완공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5.15 사건과 2.26 사건이 발생하면서 수상관저와 수상공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 뒤로도 수상관저는 복구를 거쳐 그대로 사용했지만 수상공저는 너무 심한 피해를 받아서 복구를 포기하고 그 옆에 있던 관저 사무소를 임시 수상공저로 사용했다. 그러나 그 뒤로 일본 총리들은 공저에 입주하는 것을 꺼렸고 그 대신에 자택에서 관저로 출퇴근했다. 고노에 후미마로나 도조 히데키 등이 그랬다.
도쿄 대공습으로 수상공저는 파괴되었고, 수상관저도 피해를 입었다. 항복 이후 둘 다 복구를 했지만 그 뒤로 일본 총리들은 대부분 자택에서 관저로 출퇴근했으며, 수상관저조차 비워두고는 자신의 저택에 관저 기능까지 그대로 옮겨놓는 경우도 많았다. 요시다 시게루는 외무대신 시절부터 사용해온 메구로의 외무대신 관저를 총리 영전 후에도 그대로 써먹었고, 다나카 가쿠에이도 신주쿠 인근에 있던 자택을 관저처럼 써먹었다.
수상공저는 패전 이전처럼 관저 사무소로 사용되었지만, 전쟁통에 망가진 걸 임시 복구만 하고 쓰는 수준이라 시설이 매우 좋지 못했다. 안보투쟁 당시 시위대가 관저를 포위해서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퇴근하지 못했던 일이 있었던 것을 계기로 총리의 출퇴근에 따른 경호 문제가 대두되어 관저 사무소로 쓰였던 수상공저는 대규모 리모델링을 거쳐 1963년부터 총리의 생활공간으로 다시 쓰게 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살기 좋은 건물은 아니어서, 흉흉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그래서 총리들이 구 공저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나카 가쿠에이, 스즈키 젠코, 후쿠다 다케오, 오히라 마사요시, 다케시타 노보루, 미야자와 기이치 등은 리모델링 이후로도 자택에서 출퇴근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이후 모든 총리들은 공저에 거주했지만 공저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3.2. 현재
한편 생활공간인 공저뿐만 아니라 관저도 1929년에 지은 걸 수리만 하고 쓰고 있어서 매우 비좁았다. 이 때문에 신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내 새 관저가 착공되어 2002년에 완공되었다. 현 관저는 대지 46,000㎡에 연건평 25,000㎡로 지상 5층 및 지하 1층의 초현대식 건물로 옛 관저(지상 3층, 지하 1층)보다 2.5배나 넓다. 새로운 총리 관저는 설계 당시부터 외관과 내장 모두 ‘일본다운 단순미를 추구한다’는 기조 아래 꾸며졌다. 관저를 찾은 외국 손님들에게 일본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도록 박물관 또는 미술관적 컨셉트에 주안점을 두었다.
총리 관저를 새로 신축하는 과정에서 이미 기존의 초고층 빌딩이 인접하고 있는 문제로 경호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상당히 면밀한 설계를 거쳤으며, 미국의 백악관 상황실을 본딴 위기관리센터를 지하에 배치하는 식으로 총리 관저의 집중도를 높였다. 또 태양광발전 및 풍력발전 설비를 설치하고 연료전지를 통한 발전과 난방 시스템도 갖추는 등 친환경적인 면에도 신경썼다.
관저 신축과 함께 옛 관저는 남쪽으로 80m쯤 옮기고 대규모 리모델링을 거쳐 2005년부터 총리 공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4. 기타
- 현재 총리 공저로 쓰이고 있는 구 총리 관저와 구 총리 공저는 5.15 사건과 2.26 사건 등으로 흉흉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모리 요시로 전 총리는 "구 공저에서 귀신을 봤다." 하고 방송에서 이야기하였다. 모리는 후임 총리인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도 이 말을 했는데, 고이즈미는 '귀신 같은 게 있을 리 없다.'며 그냥 무시했다고(...) 그래도 신경 쓰였는지 신사의 신관들을 불러 의례를 행한 바 있다고 한다.
- 관저 신축 이후 모든 총리들은 그 옆에 있는 공저에 거주했지만 아베 신조 전임 일본 총리는 도쿄도 시부야구에 있는 사저에서 관저로 출퇴근했다.# 2006년-2007년의 1기 아베 내각 당시에는 공저에서 살았었지만 2012년에 재집권에 성공한 이후에는 공저에 입주하지 않은 것. 아베 본인은 이에 대해 '관저에 살면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아 기분전환을 할 수 없다.'고 이유를 밝혔지만, 언론에서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2013년 야당이 국회에서 "귀신이 있다는 소문 때문에 공저에 입주하지 않는가?" 하고 질의했더니, 아베 총리는 "그런 건 들어본 바 없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모리가 귀신을 봤다는 말을 아베에게도 한 만큼, 아베도 귀신 소문을 알 것이다. 그렇다고 공저를 아주 안 쓴 것은 아니었는데 2012년 재집권 이후로는 가끔 관저에서 저녁 행사가 있을 경우에 공저에 묵기도 했다고.
- 아베 총리의 후임인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현재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에 있는 중의원 의원 기숙사에서 출퇴근하고 있다. 아베와는 달리 스가는 수상공저에 입주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결국 공저로 이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 관저 1층에는 기자회견실과 기자 대기실이 있어 총리가 관저로 출입시 기자들이 바로 달라붙어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기도 하며 총리가 누굴 만났다는 이야기 등이 언론에 바로 드러나기에 총리가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지 국민들이 감시하기 좋은 환경이라 대한민국의 권위적 대통령제 개편 및 청와대 이전 등의 이야기가 나올 때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일본 총리관저를 언급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