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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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동진(東晉)의 인물이자, 환초(桓楚)의 건국자. 권신인 환온(桓溫)의 아들. 시호는 무도황제(武悼皇帝). 환현은 결국 아버지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효무제의 아들 안제 사마덕종에게 선양을 받아, 환초를 건국하여, 환온의 유지를 이었으나, 불과 3개월 만에 유유(劉裕)에게 반격받아, 피살되고 만다.
2. 생애
융안 3년(399년) 4월, 손은의 난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해서, 동진 조정을 혼란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사마원현(司馬元顯)과 유유가 이끄는 관군이 손은의 반란군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동안에 형주, 강주 자사 환현은 수도인 건강으로 진군하였고, 사마원현은 북부군을 동원하여서 환현의 군대를 막으려 했으나, 북부군의 수장 유뢰지의 배신으로 실패한다.
원흥 원년(402년) 3월, 환현은 건강에 입성하여 사마도자(司馬道子), 사마원현 부자를 죽이고 시체를 뱃머리에 달아매어 동진의 대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환현의 사치와 방종은 사마도자 부자를 넘어섰으며 정령을 수시로 바꿔 조정의 당파는 더욱 분열되어 부패는 극을 달렸고 조정은 우스갯거리가 되었다.
원흥 2년(403년) 11월, 환현은 사마덕종을 협박하여 선양하게 하고[1] , 초나라(楚)를 세워 황제가 되었다. 사마덕종은 평고왕(平固王)으로 강등되어 심양으로 이주되었다.
원흥 3년(404년) 3월, 건무장군 유유가 건강으로 진격했다. 환현은 불리해지자 사마덕종을 강제로 데리고 강릉으로 도주했지만 유유는 환현의 선봉 환수(桓修)를 죽였다. 5월에는 환현이 유유에게 살해당했다.
3. 평가
사실 환현은 정치적 역량이 상당히 딸리는 인물이었다. 환현의 경우 수도인 건강 일대의 양주 군벌들에 대한 장악이 허술하다는 크나큰 단점이 있었다. 이는 삼국지로 비유하자면 관구검과 제갈탄 등의 세력이 버젓이 있는데 이들을 내버려두고 사마사, 사마소가 무리하게 찬탈해서 빌미를 줘, 반사마사 대연합을 만들어놓은 격이다.
아버지 환온이라면 몰라도 아들인 환현은 사마사, 사마소는커녕 사마염과 비교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치력과 교양이 함량 미달이었고, 당연히 평판도 좋지 못했다. 환현의 군재는 사마사보다 크게 모자라지는 않았지만, 사마사의 정치적 술수는 환온을 넘지 못할 정도로 환현을 훨씬 능가했다.
다만 유유는 환현의 사촌 동생 환수에게 배속된 상태라 어느 정도 구속을 시킨 상태였고, 유유를 지지했던 유도규, 제갈장민이 환홍의 수하였으니, 저 비유가 완전하지는 못하다. 그런데 유유가 거병했을때 환수와 환홍은 관광만 당하고 아무런 역할도 못했다. 즉, 환현 본인도 능력자라고 여겼던 유유를 저런 모자란 인물들에게 맡긴 것은 큰 무리였다. 그렇지 않다면 미리 군대에서 축출시켰어야 하는데 그런 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 환현에겐 유유를 손봐줘야 한다고 간언하는 참모들이랑 아내가 간언하고 있었으나, 북벌을 실시하기 위해 유유같은 인재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찬탈 전에 유유를 시험해 보고 유유를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때문에 환현에게 제거당한 유뢰지 휘하에서 틈을 엿보던 유유에게 당하고 만다.
한 예로 소설인 세설신어의 내용이긴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환현은 평소 사냥을 좋아해서 수십리에 걸쳐서 몰이꾼을 풀었다. 이 때 사냥감이 도망가는 일이 있으면 누구든 결박당해 끌려와야 했다. 그러자 환도공(위에 언급한 사촌 동생 환수)은 항상 붉은 색 비단끈을 가지고 다녔다. 환현이 이유를 묻자 환도공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공은 사람을 묶어 다니길 좋아하니, 나중에 제가 결박당할 때 끈 때문에 손이 아프지 않기 위해서 가지고 다닙니다.' 즉 환현을 비꼰 것.
4. 둘러보기(계보)
[1] 웃긴 건 이때 사마덕종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물론 그 덕택에 환현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이것도 행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