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제(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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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진나라(晉)의 제14대 황제이자, 동진(東晉)의 제10대 황제이다. 선대 황제인 진혜제 사마충과 함께 백치 황제로 유명하다.
2. 생애
태원 7년(382년), 효무제(孝武帝) 사마요와 안덕태후(安德太后) 진씨(진귀녀, 陳歸女)[1] 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자는 안덕(安德)이다.
태원 12년(387년) 8월, 사마덕종은 태자에 책봉되고, 태원 21년(396년) 9월, 사마요의 어이없는 죽음으로 황제가 되었다. 사마덕종의 나이가 어려 숙부인 회계왕 사마도자(司馬道子)[2] 가 섭정하며 보좌했으나, 나이가 어린 것보다 심각했던 것은 사마덕종이 서진 혜제 사마충을 넘어서는 저능아였다는 것이다. 촉한 후주 유선은 통치자로서는 무능했지만 사람 자체는 정상이었고, 동오 말제 손호 역시 인간성은 시궁창이지만 통치자로서 평타였으며, 사마충은 지능에 떨어져도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는 그냥 바보였지만, [3][4] 사마덕종은 <진서(晉書)> 안제기(安帝記)에 의하면 '''말을 제대로 못하고 추움, 더움, 배고픔을 몰랐으며 음식과 용변 등 생활 일체를 스스로 할 수 없었다.'''[5]
따라서 사마덕종의 생활은 그의 숙부로 후견인이자 섭정을 맡은 회계왕 사마도자가 전적으로 돌봤다. 문제는 사마도자도 정상인이기만 할 뿐 통치자로서는 극히 무능한 인간이라는 데 있었다.[6] 사마도자는 큰일이 있으면 귀신의 힘을 빌렸고 늘 술에 빠져 취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융안 3년(399년) 4월, 사마도자는 아예 정사를 보는 일을 18세 된 아들 사마원현(司馬元顯)에게 맡겼다. 사마원현은 17세의 나이에 동진 절반이 들고 일어난 왕공(王恭)의 난을 내부로부터 붕괴시켜 진압하는 등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나 징집령을 내려 민심을 잃고 손은의 난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해 동진을 혼란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사마원현과 유유가 이끄는 관군이 손은의 반군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동안 환온(桓溫)의 아들이었던 형주, 강주 자사 환현(桓玄)이 수도 건강으로 진군, 사마원현은 북부군을 동원하여 이를 막으려 했으나 북부군의 수장 유뢰지의 배신으로 실패한다.
원흥 원년(402년) 3월, 환현은 건강에 입성하여 사마도자, 사마원현 부자를 죽이고 시체를 뱃머리에 달아매어 동진의 대권을 장악했다. 환현은 스스로 승상, 태위에 오른다. 그러나 환현의 사치와 방종은 사마도자 부자를 넘어섰으며 정령을 수시로 바꿔 조정의 당파는 더욱 분열되어 부패는 극을 달렸고 조정은 우스갯거리가 되었다.
원흥 2년(403년) 11월, 환현은 사마덕종을 협박하여 선양하게 하고[7] 초나라(楚)를 세워 황제가 되었다. 사마덕종은 평고왕(平固王)으로 강등되어 심양으로 이주되었다.
원흥 3년(404년) 3월, 건무 장군 유유가 건강으로 진격했다. 환현은 불리해지자 사마덕종을 강제로 데리고 강릉으로 도주했지만 유유는 환현의 선봉 환수(桓修)를 죽이고 5월, 환현도 죽였다.
의희 원년(405년) 정월, 환현의 잔당 환진(桓振)이 다시 사마덕종을 끌고 가서 강진으로 도망치며, 사람을 보내 강주와 형주를 주면 사마덕종을 보내겠다고 제의했으나, 유유는 이 협상을 거절하고 되려 환진을 쳐서 죽였다. 3월, 사마덕종은 다시 건강으로 돌아와 복위했고 유유는 조정의 대권을 모두 장악했다. 유유는 모용선비족의 남연, 강족의 후진(오호십육국시대) 등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유의, 제갈장민, 초종 등의 군벌 등을 제거하면서 북벌에 성공하고 서량과 황하 이북을 제외한 중원 일대를 수복하며 동진 최강의 권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유유는 자신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던 유목지가 죽자 북벌을 팽개치며 돌아왔고, 결국 일부 영토를 다시 잃었다. 이렇게 나날이 유유의 위망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의희 14년(418년) 12월, 몸이 달아오른 유유는 '창명(昌明)[8] 이후로는 두 황제가 즉위할 뿐이다.'라는 참언을 날조하며 황제를 돌보던 아우 사마덕문이 병든 사이에 중서시랑 왕소지를 시켜 건강 동당에서 사마덕종을 교살했다. 이렇게 사마덕종은 재위 23년 만에 3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이듬해 정월에 휴평릉(休平陵)에 안장되었다.
유유가 안제를 죽인 이유는 사마덕종이 천치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선양이 정치적 쇼라고 하나 최소한의 틀은 지켜야 위신 및 어느 정도의 정통성이 확보되는데, '''똥오줌도 제대로 못 가리고 자기 자신이 살아있는지도 모르는 작자가 선양을 한다면''' 누가 봐도 찬탈임이 드러나니 안 한 것만 못한 결과가 나올 것이 뻔했다. 그래서 유유는 정상적인 인물인 사마덕문을 내세우지만 결국 죽인다.
3. 여담
참고로 안제 사마덕종의 황후였던 안희황후(安僖皇后) 왕씨(王氏)[9] 는 왕희지(王羲之)의 손녀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왕희지의 7남 왕헌지(王獻之)였고 어머니는 간문제 사마욱의 장녀 신안민공주(新安愍公主)[10]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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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도원결의에서는 이 인물의 초상화를 만들었는데 얼빠진 표정에 콧물과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으로 지적 장애가 있다는 걸 잘 표현했다. 참고로 원본은 아마 삼국지 10, 삼국지 11의 왕업인 듯하다.
4. 둘러보기(계보)
[1] 사마요가 살아있을 때는 부인(夫人)이었으나, 아들 사마덕종이 황제가 되자 태후가 된 것이다.[2] 사마요의 친동생으로 간문제 사마욱의 7남이다.[3] 지금에서 평가하면 경계선 지능 정도로 추측된다.[4] 다만 혜소가 사마충을 지키려다 죽어서 피가 사마충의 옷에 묻었는데, 시종이 닦아내려 하자 '''충신의 피니 닦지 말라'''고 한 일화가 있긴 하다.[5] 지금 기준으로 1급 이상의 특수 지적장애나 2급 이상의 자폐성 장애로 추측된다.[6] 항상 그렇지만 통치하는 인간의 지능에 문제가 없다고 통치를 잘하는 건 아니다. 역사상 수많은 암군 중에는 지능에 문제가 있는 인간이 드물고 오히려 지능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나은 편인데, 통치자로서는 부적격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예를 들어 명 4대 암군이라든가. 유송 왕조의 유자업, 유욱이라든가...[7] 웃긴 건 이때 사마덕종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물론 그 덕택에 환현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이것도 행운일지도 모른다.[8] 사마요의 자.[9] 이름은 왕신애(王神愛) 또는 왕신수(王神受)이다.[10] 이름은 사마도복(司馬道福)이었다. 결국 신안민공주는 안제 사마덕종의 고모이므로 왕씨는 사마덕종의 고종 사촌이 된다. 사실 신안민공주는 원래 환현의 일족이었던 환제(桓濟)의 아내였다가 환제가 죽은 후에 왕헌지에게 재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