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요

 


'''대요'''
'''大遼'''

존속기간
1216년 ~ 1219년
이칭
후요(後遼), 대요수국(大遼收國)
위치
중국 랴오닝, 한반도 북부
수도
등주(澄州)[1]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국성
야율(耶律)
언어
거란어, 중세 중국어
문자
한자
종족
거란족
성립 이전
금나라
멸망 이후
몽골 제국
고려
1. 개요
2. 거란족의 국가 목록
3.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1216년 금나라에서 독립하여 동요를 세웠던 야율유가(耶律留哥)가 결국 칭기즈 칸몽골 제국에 복속되기로 했을 때, 이에 반대했던 야율유가의 동생 야율시불(耶律厮不)[2]을 중심으로 한 거란족들이 야율유가를 축출하고 현 랴오닝 성에 위치한 등주에서 건국했다. 동요, 서요에 대비되어 이는 후요(後遼)라고도 불린다. 야율시불(1216) - 야율걸노(耶律乞奴, 1216) - 야율금산(耶律金山, 1216) - 야율통고여(耶律統古與, 1217~1218) - 야율함사(耶律喊舍, 1218~1219)로 이어졌다. 연호는 천위(天威) - 천우(天佑) - 천덕(天德)이었고, 1216년부터 1217년까지 사용했다.
하지만 사실 포선만노의 동진(東眞)→동하(東夏)와 더불어 제대로 된 국가 체계가 갖춰졌다고 보기도 어려운,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당시 금나라가 물러나고 몽골군이 진입하지 않던 공백기 시절 요동에서 독자 행보 좀 걸어보려던 사람들의 이합집산에 불과했다. 야율유가가 건국한 동요의 땅을 직접 계승한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내분이 많았다. 속자치통감에 의하면 후요의 초기 병력을 이끌었던 것은 승상이었던 야율걸노인데 야율걸노는 야율시불의 아들인 야율금산에게 죽었고, 야율금산은 왕을 자칭했다가 다시 야율통고여에게 죽었고, 야율통고여는 다시 왕족인 야율함사에게 죽었다고 하니 내부 갈등이 어지간했던 모양이다.[3]
심지어 후요는 주변 국가 모두와 적대하는 최악의 상황이 된다. 야율유가가 몽골에 복속되려 할 때 이탈했기 때문에 몽골과도 사이가 안 좋았고, 금나라에 반란 일으키고 시작한 동요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금과도 사이가 안 좋고, 동요와 지독하게 싸웠던 포선만노의 동진/동하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건국 이듬해에 축출됐던 야율유가가 이끄는 몽골군의 공격을 받게 된다.
문제는 후요인들의 상당수가 고려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후요가 몽골과 동진/동하의 합동 공격으로 멸망 지경에 이르게 되자, 요동에 있던 거란족 거의 전부가 고려로 밀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거란족 패잔병들이 다시 고려의 북부지방을 약탈하다 못해, 개경을 위협하는 상황이 된다. 고려는 다시 병력을 집중시킨 다음에 이들을 개경에서 밀어내는데, 이들이 밀려나다가 틀어박힌 곳이 평양 동쪽의 강동성이었다. 이렇게 하여 후요가 한국사에 등장해서 인지도를 쌓게 된다. 고려 입장에서는 거란족의 4차 침입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약탈을 포함한 처자식을 동반한 집단이주에 가까웠다.[4] 고려에 식량을 주면 약탈하지 않겠다고 통보를 했을 정도. 하지만 약탈당하고 있던 고려 최충헌 정권 입장에서는 거란족을 내버려두면 문제가 생길 것이므로 병력을 동원한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조충김취려(金就礪)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생긴다. 후요를 치겠다고 하면서 몽골이 카치운살리타이[5]에게 1만 병력을 주어 고려로 내려 보낸 것이다. 몽골이 고려사에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바로 후요 때문이다. 이 때 몽골군이 고려와의 화친 및 군량 지원을 요구한다.
덤으로 동진/동하의 포선만노도 부하 장수 완안자연(完顔子淵)에게 2만 병력을 붙여서 내려 보냈기 때문에, 강동성 전투는 몽골, 동진/동하, 고려의 3군 연합군의 공격으로 이뤄졌다. 마침내 야율함사가 자살하고 그 가족이 항복하면서, 후요의 마지막 잔당이 멸망한다. 그리고 몽골이 고려에 은혜를 베풀었다고 엄청나게 생색 내는 것으로 여몽 관계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어 여몽전쟁으로 이어진다.

2. 거란족의 국가 목록



3. 같이보기




[1] 후요가 건국된 곳일 뿐이며 후요인들은 계속 고려 국내로 진입해 들어온다.[2] 야율사포(耶律斯布), 야사불(耶斯不)로도 기록되었다.[3] 내분이 어지간히 심했는지 이게 다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때 일어난 사건이다. 쳐들어올 때는 야율걸노가 필두였는데 마지막 강동성 전투에서는 야율함사가 자살하면서 끝난다.[4] 그수가 9만에 이르렀다.[5] 이 두 명은 고려사에서 합진차라(蛤眞札剌)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한문 특성상 띄어쓰기가 없기 때문에 1명인 줄 착각하는 사례가 가끔 있다. 이 정도는 아니라도 찰랄이 살리타이인지는 모르는 경우는 이보다 훨씬 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