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숙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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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성종과 명빈 김씨 사이의 3남 3녀 중 장녀. 어머니 명빈 김씨는 형조 판서 김작(金碏)의 딸로, 성종 대에는 종4품 숙원이었으나 후일 정1품 빈으로 추증되었다.
2. 생애
2.1. 혼인
1491년(성종 22) 8월 27일 휘숙옹주는 임사홍의 넷째 아들 임숭재를 부마로 맞이한다. 이때 풍천 임씨 가문은 왕실과 관계가 깊었다. 우선 임사홍은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아들 보성군의 사위였고, 임사홍의 장남 임광재는 예종과 안순왕후의 딸 현숙공주의 남편이었다. 그러니까 임사홍의 큰 아들과 넷째 아들이 각각 왕의 딸들과 혼인하였으니 왕실과 겹사돈을 맺은 것. 이에 따라 휘숙옹주는 사촌 언니인 현숙공주와 동서 사이가 된다.[1]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혼인 첫 날부터 임숭재의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옹주는 이웃집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사관은 이를 두고 소인배 주제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복이 지나쳐 재앙이 찾아왔다며 논평했다.[2] 당시에도 임사홍과 임숭재 부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2.2. 패륜
성종 대에는 임사홍이 유배를 다녀오면서 정계 활동을 잘하지 못했고, 또 임숭재의 활동도 아주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인 명빈 김씨의 자식들과 비교적 친밀한 관계였고, 왕위에 오른 후 휘숙옹주에게 땅과 노비 등 각종 혜택을 안겨 주었다. 뿐만 아니라 임숭재는 춤과 노래에 일가견이 있어서 장악원[3] 제조가 되어 연산군의 예술적 감각을 만족시켰고, 채홍사의 역할을 맡아 경상도 지역의 미녀를 찾아내고, 남의 처첩이 된 자라도 미모가 있으면 빼앗아서 바치는 등 악명을 쌓았다. 또한 임숭재는 이미 시집간 자신의 누이동생[4] 으로 하여금 연산군의 시침을 들게 했는데, 임숭재의 암묵적인 허락이 있었는지 아니면 알지 못했는지 휘숙옹주도 연산군과 간통했다.[5]
그래서 연산군은 임숭재가 죽자, 그의 빈소에 환관을 보내 관곽을 열고 입에 무쇠조각을 물렸다고 한다. 이런 행동은 휘숙옹주와 간통한 일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야사에는 천하의 악명높은 임숭재가 자기 부인의 간통에 충격받아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2.3. 최후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이에 휘숙옹주는 그동안 누렸던 혜택들을 모두 내려놓아야 했다. 연산군으로부터 받은 노비 및 집 등을 반납해야 했고, 옹주의 시아버지 임사홍은 부관참시를 당한다. 당시 반정을 주도한 공신들은 임숭재도 똑같이 부관참시하고 가산을 적몰 해야한다고 했지만, 휘숙옹주가 살아있다는 이유로 중종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연산군의 권력이 살아있을 때와 같은 영광을 누릴 순 없었다. 하지만 중종실록에 보면, 1530년(중종 25) 옹주의 사위 최극광이 도박으로 전재산을 날려서 어렵게 살자 "옹주의 딸도 성종의 지친"이라면서 중종이 재산을 되찾아준 일이 실려있다. 중종의 너그러움 덕택에 그런대로 잘 살아간 듯.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 반대로 야사에 따르면, 옹주는 반정 세력에게 숙청 당했다고도 하고, 돌팔매에 맞아 죽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옹주와 임숭재의 묘소까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역시 야사는 야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