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종(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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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나라의 3대 황제. 묘호는 희종(熙宗) 또는 민종(閔宗), 시호는 홍기찬무장정효성황제(弘基纘武莊靖孝成皇帝). 휘는 완안합라(完顔合剌). 한자로는 완안단(完顔亶).
금태조의 적자였던 종준(宗峻,繩果)의 장자였다. 본처는 여진 귀족 배만홀달(裴満忽達)의 딸 배만씨(裴満氏). 아들은 배만씨(裴満氏)가 낳은 태자 제안(濟安). 어머니는 여진 귀족의 딸 포찰씨(蒲察氏).
2. 생애
금태종이 자기 자식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시도하다 여진족 부족장들의 반발로 실패하자 1132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어 1135년 태종이 사망하자 제3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희종은 여진족 부족장들의 지원을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즉위 후부터는 부족장들을 탄압하고 황제 독재의 확립을 통한 중국풍의 관제를 도입하였으며 과거 제도를 처음 시행했다. 희종 자신도 금나라 황제들 중 최초로 중국식 면류관과 곤룡포를 착용하였다. 또 중앙 집권화로 중국 북부 지배를 강화시켰다. 단 금나라의 중국화는 희종 때부터 시작이었지만 본격적인 중국화는 해릉양왕 때부터였다.
이 시기에 남송의 재상 진회와 화평을 맺었는데, 그 결과 금나라는 매년 25만냥의 은과 25만필의 비단을 조공으로 받았고, 남송의 황제가 금의 황제한테 '신하의 예'를 취했다.
여기까지는 나름 잘 통치하던 황제라고 볼 수 있겠지만... 아들들이 줄줄이 요절하고 공신인 완안종한(完顔宗翰)마저 명을 달리하자 제어력을 잃은 채 나태해지면서 사치와 술에 빠져 산채 여진족 중신과 완안씨 황족들을 숙청하는 등 공포 정치를 폈다.
끝내 1149년 사촌 동생인 해릉양왕 완안양(完顔亮)이 반란을 일으켰다. 해릉왕은 호위 군관을 매수한 뒤 일부 귀족 대신들과 짜고 금 희종의 침실에 뛰어들어 칼로 희종을 암살해버렸는데 이 때 불과 31세의 젊은 나이였으며 이후 동혼왕(東昏王 : 동쪽의 혼미한 임금)이란 시호를 받았다. 참고로 혼(昏)이라는 이름은 선대 황제인 금태종이 송휘종에게 준 이름(혼덕공)이었다. 육조 시대의 동혼후보다는 조금 낫지만.
다만 폭군을 몰아낸다며 사촌형의 목숨을 잃게 만든 뒤 제위를 찬탈한 '''해릉왕은 사촌형의 막장 행각은 가볍게 뛰어넘은 금나라 최고의 막장 황제가 돼버렸으니...'''
3. 사후
뒷날 해릉왕이 부장들의 반란으로 처참히 목숨을 잃고 금세종 완안옹(完顔雍)이 즉위하자 다시 황제로 추증받아 희종의 묘호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