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금)
[clearfix]
1. 소개
[image]
금(金) 제국의 5대 황제. 묘호는 세종. 시호는 광천흥운문덕무공성명인효황제(光天興運文德武功聖明仁孝皇帝). 휘는 여진식은 완안오록(完顏烏祿). 중국식은 완안옹(完顔雍).
2. 생애
아버지는 태조의 다섯째 아들 예종 와리타(訛里朶), 어머니는 추와지(雛訛只)[1] 의 딸 정의황후(貞懿皇后, 중국성은 이씨)며[2][3] 황후는 여진 오림답부(烏林荅部)의 수장인 석토흑(石土黒)의 딸 오림답씨(烏林荅氏, 소덕황후(昭德皇后)[4] ).
전임 황제였던 해릉양왕[5] 은 금나라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폭정이 말로 못할 지경이었다.[6] 거기에 무리하게 남송에 대한 침입을 계속하였다. 잘 됐으면 몰라도 번번히 실패하였는데 또다시 남송 침입을 해릉왕이 계획하다가 남정 중에 자신의 부장에게 살해되었다. 이 시기 동경 요양부에 있었던 황족 완안옹은 해릉왕에 반항하는 세력에 의해 옹립되어 중도 대흥부(中都大興府, 지금의 베이징)에 입성하였다.[7]
원래 해릉왕은 세종을 미워했고, 미녀였던 세종의 아내 오림답씨를 빼앗은 적이 있었다. 오림답씨는 남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갔다가 결국 자결하며 자신의 의지를 보였고 세종은 자신의 보물을 해릉왕에게 뇌물로 바치며 연명했다. 그러다가 반란군에 의해 옹립되어 해릉왕을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 세종은 오림답씨를 황후로 추존했지만 계속 그리워했고 평생 후궁들 중에서 황후를 따로 세우지 않았다.
2.1. 금의 전성기
이후 그는 1163년 남송과 평화 협정을 맺었고, 본격적으로 내치에 집중했다. 우선 1164년부터 여진 문자로 경사(經史)를 번역하는가 하면, 영토와 국방력뿐만 아니라 경제와 문화에도 힘을 쏟아서 금나라 최고의 절정기를 만들었다. 특히 여진 문자가 대단히 널리 퍼져 단순히 만주 지역뿐만 아니라 화북 전역으로 이 글이 퍼져 수많은 책들이 여진 문자로 번역되었고, 한족들도 여진 문자를 먼저 배우게 되었다. 해릉양왕 말기의 금나라의 인구는 1,900만명에 불과했는데, 1170년에 이르면 화북의 인구가 2,000만명을 넘고 대금 제국의 전체 인구수가 3,000만명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세종 말기, 장종 초기에 이르면 무려 5,000만 명에 가까운 수치까지 상승한다.
또한 옛 수도 회령부를 상경 회령부(上京會寧府, 지금의 하얼빈)로 고쳐 금의 5경을 설치하고, 여진족의 성씨를 한역(漢譯)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 요양에는 백탑(白塔)을 건설하였으며, 재정도 탄탄해져 1177년에는 하북과 산동의 조세를 면제하기도 했다.[8] 1187년 한족 복장의 착용을 금지하였다.
금 세종은 무엇보다 단순한 국방력 수준이 아니라 문화, 경제 등 나라의 근간이 되는 부분을 크게 발전시켰는데 화북 지방의 모든 문화재 중 70%가 이 시기 금나라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황하의 치수 사업도 성공적으로 끝나 화북 지역의 농작물 생산량도 크게 증가하여 정강의 변으로 황폐화 된 화북 지역의 경제가 복구되었다. 얼마나 태평성대였던지 이를 일컫어 사람들이 '''소요순시대(小堯舜時代)'''라고 부를 정도였다. 재위기간 동안의 연호는 대정(大定)이었다.
세종의 일화와 언행을 보면 과연 성군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조세를 면해주었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무거운 세금으로 백성의 고통이 가중되면 안 된다고 항상 말했다.
- 황실의 공노비와 귀족들의 사노비들을 해방시켜 평민으로 환원시켰다. 불교가 융성했던 요나라 시절부터 사찰에는 '이세호'라는 노비들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 이세호들을 해방시켜 평민으로 생활할 수 있게 해주었다.
- 상서성에서 황실 종친을 자사로 추천했지만 세종은 황족의 나이가 너무 어려 관리가 될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황제의 호위를 맡았던 무인이 지방관으로 천거되었을 때도 직무에 맞지 않는 이가 민생을 살피기에 무리가 있다고 말하며 반대하였다. 이렇게 인재 등용에 있어 공정함과 백성을 생각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세웠다. 무능력한 측근들이 요직에 앉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능력이 있으면 하급 관리라 하더라도 중요한 자리에 등용하였다.
- 개인적으로 대단히 검소한 황제였기에 송사전 금 열전에는 평소 자신의 식사 자리에도 4, 5가지 반찬만 올리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신들이 황제는 평민과 다르니 반찬의 수를 늘리라고 청했지만 세종은 "천자도 같은 사람이니 낭비를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며 대신들의 청을 듣지 않았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양 50마리도 넘게 먹을 수 있으나 그것이 백성의 피와 땀이라고 생각하면 입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태자의 생일과 정월, 추석을 제외하고는 술을 아예 마시지 않았다.
- 식사 도중에 자신의 딸이 알현을 하러 왔지만 평소에 세종은 꼭 먹을 만큼의 음식만 준비해서 먹었기에 공주와 식사를 같이 할 수 없었다.
- 음식뿐 아니라 궁전의 화려한 장식도 제한하여 궁전을 금으로 장식하지 못하게 하고, 백성을 동원하는 대규모 토목 공사도 금지하였다. 궁중의 시종들을 함부로 늘리지 못하게 하였다.
- 자신의 옷을 제후와 신하들에게 보여주며 입은 지 3년이나 되었지만 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 황실에서는 황제가 옷을 한 번만 입고 그것을 버리도록 되어 있었는데, 세종은 옷을 세탁하여 계속 입었다.
- 불교와 도교 등 종교에 지나치게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였다.[9]
- 길거리에 술취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마차로 태워 집으로 보내주었다. 또한 평소 먹던 음식 맛이 고르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수라를 담당하는 관리에게 물어보니 모친이 위독해서 모친 생각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모친의 병이 다 나을 때까지 그 관리에게 휴가를 주어 요양을 할 수 있게 하였다.
- 원비(元妃) 이씨가 세종보다 먼저 죽어 장례를 치르러 가는 길에 장례식 때문에 통행 금지가 내려져 길거리가 썰렁한 것을 보고 장례식이 백성의 생계에 누를 끼치면 안 되니 통행 금지를 풀고 백성들이 평소처럼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명하였다.
- 해릉양왕의 폭정을 자신이 직접 보아왔기 때문에 황족들과 신하들에게 사치를 하지 말고 검소하게 살 것을 누차 강조하였다. 덕분에 세종 시기에 금나라의 재정은 매우 좋아졌다.
2.2. 재위 당시 그림자
그러나 밝은 면이 있는 반면 어두운 면도 있었다. 여진족에 대한 혜택은 늘어난 반면 한족을 대상으로 하는 세금 징수는 더 강화되었다.
금나라가 중원에 들어온 후부터 세종 시기에 이르기까지, 터무니 없이 부족한 여진족의 숫자 때문에 민족 갈등이 벌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여진족은 금나라 인구의 7분도 1도 안 되고, 또한 문화 수준이 본래 낮은데 극단적인 속도로 지배층이 되었기 때문에, 한족의 바다에 표류하는 형태가 되어 어느새 여진족들이 자기네의 낮은 문화 등을 부끄러워하는 풍조가 생겼다.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은 여진족의 수렵 경제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농경으로 전환이 되면서, 그 과정에서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는 여진족들이 생겨난 것이다. 나태해지고 궁핍해지는 맹안, 모극이 많아졌으며 해릉양왕 때 동북 지방에서 화북 지방으로 여진족들이 대거 이주해오면서 한족과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여진족의 민족적 자존심을 강조하던 세종은 마땅히 그들의 빈곤도 구제해야 했다. 그래서 세종은 '''물력전(物力錢)'''이라는 새로운 세금 제도를 시행한다. 이 물력전은 맹안, 모극 등 여진 특수 계층과 노비를 제외한 모든 국민들을 대상으로 매긴 일종의 재산세였다. 물력전을 징수하기 위해 1164년부터 장종 시기까지 통검추배(通檢推排)라는 재산세 조사를 실시하여 물력전의 액수를 상, 중, 하 3등급으로 나누어 서열을 매겼다. 그러나 이 물력전의 실질적인 타깃은 경제적 이권을 가지고 있었던 대다수 한족들이었다. 세종은 세금을 공정하게 거두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재정난에 시달리던 여진족과 조정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가면 갈수록 가혹하게 징세를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금나라의 재정은 좋아졌지만 징세 대상이었던 한족들은 큰 불만을 가졌다. 세종은 또한 거란인과 여진인의 통혼을 장려하면서도 거란 출신 관료 숫자를 줄이는 등의 이중적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는 거란인의 불만을 가져와 후에 몽골 제국의 금나라 정벌때 거란인들이 몽골에 가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이 외에도 세도가의 대토지 소유를 금지시키고, 기존 세도가가 가지고 있던 토지를 여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며 빈부격차가 벌어진 맹안, 모극들에게 부과되는 과세를 공평하게 조정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재위 마지막 해인 1189년 금나라는 몽골과 남송을 상대로 양대전선이 펼쳐지면서 나라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3. 사망 이후
[image]
1189년 1월 20일에 사망했으며 그가 사망하자 적손 완안경이 뒤를 이어 장종이 되었다. 원래 세종의 황태자이자 장남이었던 완안윤공은 1185년에 사망했는데 장종에 의해 현종으로 추존되었다.
4. 여담
흥미롭게도 남송 최고의 명군인 송효종과 거의 같은 시기에 즉위해서 거의 같은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으르렁대는 두 나라의 최고 전성기를 같은 시대의 두 명의 황제가 다스린 것이다.
대체역사소설 왕조의 아침에서는 정치적 사례를 받고, 해릉왕에게 죽을 뻔한 주인공과 연합전선을 구축. 해릉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다. 주인공이 길러낸 총병 전력을 탐내지만, 권세에 협력하지 않음을 내세웠기에 다음을 기약했고, 후에 주인공이 금와의 무역을 할 때에 이때의 일을 말하며, 그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막대한 금액을 세금으로 내며, 이를 허락한다.
사극에서도 한 번 등장하는데 바로 무인시대에서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금 세종을 맡은 분이 문회원.[10] 아마 문회원씨의 연기 경력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을 연기 한 것일 거다.
5. 둘러보기
[1] 발해인이다.[2] 세종의 부모는 모두 세종이 황제가 되자 추존된 것이다.[3] 세종의 어머니는 불교에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를 위해 세종은 오늘날의 랴오닝성에 광우사(广佑寺)라는 절을 지었다. 이 절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하다.[4] 세종이 즉위한 뒤에 황후로 추존하며 올린 시호이다.[5] 인간 말종 쓰레기라 죽은 뒤 묘호를 받기는커녕 황제 대우도 못 받아서 그냥 왕으로 불린다.[6] 해릉양왕항목 참조. 특히 '''여자 관계가 막장'''이었다.[7] 금사에 의하면, 해릉왕을 죽인 부장이 새로운 황제가 중도 대흥부에 입성하였다고 하자 해릉왕은 웃으면서 "옹이 황제가 되다니! 그 녀석을 먼저 처리했어야 하는데!" 라고 말하고 죽었다.[8] 하북과 산동은 세종 즉위 이전에 반금 투쟁이 일어난 곳이기도 했다.[9] 양무제의 사례를 들어 종교에 심취했던 양 무제를 비판했는데, 정작 세종 본인도 말년에는 불교에 꽤 관심을 기울였다.(...) [10] 문회원씨는 다들 아시다시피 경애왕, 의자왕 등 안습한 최후를 맏는 군주 역이나 역사적 평가가 좋지 못한 인물들을 맡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