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류관
1. 개요
중국에서 유래해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의 각국 군주가 썼던 왕관의 일종이다. 복두나 익선관이 만들어지기 전인 고대 중국에서는 면류관만이 왕관이었다. 면관(冕冠)·평천관(平天冠)이라고도 하며 보통 세트로 입는 곤복과 합쳐 면복이라고 부른다.
원래 고대 중국 왕조(상, 주)에서 숭배 대상인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쓰는 의복이었다. 하늘과의 소통, 즉 제사는 하늘의 대행자인 천자(天子)만이 주관할 수 있었는데 이 때 제사장이 쓰는 모자가 면류관. 다시말해 제정이 일치하던 시대로부터 유래된 유물이다.
따라서 유교의 영향력 아래 들어 있던 동양 문화권에서는 왕관하면 곧 면류관이었다.[1] 면류관은 보통 황제나 국왕이 쓰지만 류의 개수나 곤복에 들어가는 무늬의 개수에 차등을 둬서 황족 또는 신하들도 쓸 수 있도록 허락된다.[2]
면은 위의 넓직한 판으로써 달리 평천판이라 부른다. 류는 앞뒤에 드리워 얼굴을 가리는 구슬 꿴 발을 뜻하나, 류를 면류라고 부르는 경우가 흔하다.
류를 드리우지 않고 판만 있는 작변(爵弁)이라는 모자도 있다.
2. 역사
2.1. 중국
중국 천자들이 평상시와 행사 때를 불문하고 항상 쓰던 왕관이 면류관이다. 그러나 당나라 대에 이르러서 천, 비단이나 말총 등으로 만들어 더 가벼운 복두관을 써, 평상시에는 복두관, 즉위식, 종묘 제사, 조회 등 국가적 행사 때에만 면류관을 썼다.[3] 이러한 풍조는 후대 왕조에도 이어져 송나라 때는 전각복두[4] 와 절상건[5] 이, 명나라 때는 익선관이 천자가 평상시에 쓰는 왕관이 되었다. 면류관 자체는 고대부터 시작되어 명나라 때까지 존속했지만 왕조마다 그 제도에 있어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가령 면류관에 늘어뜨리는 류에 들어간 구슬이 백옥인지 아니면 5가지 옥 또는 7가지 옥인지, 평천판의 길이가 얼마나 긴지, 관모에 꽂는 비녀가 옥잠인지 아니면 금잠인지 등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원나라와 청나라 때는 중화풍의 면류관을 사용하지 않고 각각 몽골족과 만주족의 전통 관을 썼지만[6] 청조 멸망 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통해 중화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를 자칭했을 때 잠시 등장한 것이 마지막이다. 하지만 류가 없다.중국 드라마 삼국연의(84부작)에 묘사되는 면류관
2.2. 한국 왕조
한국에서 면류관의 상세한 기록은 조선 왕조 밖에 없다. 면류관은 주나라 예법에 기초한 유교식 예법이고, 설령 유교를 받아들였다 해도 한국 고유의 예법이 있는데 굳이 먼 서쪽 나라의 예법을 따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고대 ~ 남북국 시대까지 면류관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고려 시대에 조금, 조선 시대에 들어서 아주 자세해진다.
삼국시대는 백령관, 금관 등 철저히 한국의 관을 썼다. 이후 진덕여왕이 당나라 의복 제도를 수용하고 신라가 그대로 한국을 통일하면서 왕은 복두를 썼다고 추정한다.[9]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은 어진에서 사각형 면류관을 쓰고 4개의 류가 달려있다. 또한 면류관 위에 해와 달을 표현한 듯한 문양이 있다.
중국식 면류관 기록은 고려 시대에서 점차 나타난다. 하지만 자세하진 않은데 우선 고려가 그닥 기록한다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은 점, 잦은 전쟁으로 그나마 있던 기록이 날아갔다는 점 때문이다.
경기도 연천 숭의전에 있는 태조 왕건의 어진은 앞이 9류, 뒤가 4류인 금색 면류관이다.[10] 북한이 그린 어진엔 12류 면류관을 썼다.[11]
고려사 여복지에 당시의 기록이 나와있는데 최초의 기록이 정종 때 거란이 면복을 선물해 준 것이다. 이후 계속 타국에서 면류관과 면복을 선물 받는다.
고려 숙종이 동생 대방공을 봉할 때 대방공의 (복장)제도가 구장(九章)에 이르렀다는 언급으로 보아 숙종 대에 제후 중 공작급은 구장 면류관과 면복을 입은 듯 하다.[12]
인종 때 드디어 자국의 면류관 예법을 정한 기록이 나오는데 9류면을 사용한다고 정했다. 또한 신하들의 면류관도 정하였다.
의종 대에 의종고금례[13] 를 만들어 면류관 예법을 정하는데 국왕은 9류면을 쓰되 각 류에 12개의 구슬을 빨강, 하양, 파랑 색 순으로 꿰고, 뒤가 조금 들리고 앞이 살짝 내려 온 모습이다. 이 외에도 신하들의 면류관을 정했다.
최소 인종부터 고려 시대에는 관리들도 직급에 따라 면류관을 썼고 고려 말부터 신하들의 조복에는 금관[14] 을 쓰게 되면서 면류관은 왕, 혹은 세자, 세손의 전유물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익선관이 왕의 평상시 왕관으로 자리잡았고, 이 때 면류관도 같이 들어왔는데 1403년에 명나라로부터 사여받은 이후 대한제국 때까지 면류관은 행사용으로만 사용했다. 결국 특별한 날에만 사용한다는 점에서 장교 정복과 의미가 비슷하다. 면류관을 쓸 때는 옷도 평상시의 곤룡포가 아니라 '곤복'이라는 더 복잡한 구조의 옷을 입는다.
순종황제의 면류관 #, #, #
2.3. 베트남
2.4. 일본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일본도 천황들은 면류관을 사용했다. 7세기 스이코 덴노 시절 관복을 정비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발표하는 학회 모습). 정창원에는 아직 면류관을 비롯한 관련 복식 유물들이 남아 있다고 하나 이를 묘사한 그림만 공개되었을 뿐 유물 자체는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다. 또 다른 면류관으로는 고메이 덴노의 것이 남아 공개되어 있다. 이 면류관들은 관 위에 광선 문양의 장식과 야타가라스의 모양이 있는 등 중국 면류관과는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가 일본에 의복이나 제작 기술을 가르쳐준 기록이 있기 때문에 백제의 영향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칸무리와 소쿠타이로 교체되면서 완전히 다른 독자적 의복을 쓰게 된다.
3. 구조
면류관의 구조를 보자면 관모 위에 '평천판(平天板)'을 얹어놓았으며 앞뒤로 '면류(冕旒)'라고 하는, 실에 구슬을 꿰어놓은 것을 매달아 만들었다. 그런데 무조건 아무렇게나 만드는 게 아니라 임금의 관모이니만큼 만드는 것부터도 격식이 중요했다. 명나라 천자가 쓰는 면류관과 조선 임금이 쓰는 면류관은 면류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명나라 천자의 면류관은 면류가 앞뒤로 각 12개씩 24개를 달아서 만들도록 되어 있는 반면 조선 임금의 면류관은 앞뒤로 각 9개씩 18개를 달아서 만든다. 면류에 꿰는 구슬도 아무렇게나 꿰는게 아니라 황제는 붉은색-백색-푸른색-누른색-검은색의 순서로 1줄당 12개를, 조선 국왕은 1줄당 9개를 꿴다. 양 옆에는 간신배들의 아첨하는 소리로부터 귀를 보호한다는 의미로 청옥을 귀 부분에 늘어뜨린다. 곤복도 명나라 황제는 12가지 무늬가 들어간 12장복, 조선 왕은 9가지 무늬가 들어간 9장복으로 차별되었고, 조선 세자는 8면류관[15] 7장복을 입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들어선 청나라는 만주족 고유의 황제복을 도입했기 때문에 익선관과 장복은 폐지되었으나 조선에서는 대한제국 선포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대한제국에서는 황제의 예를 따라 12면류관 12장복으로 승격되었다. 현재도 종묘제례 행사 재현 때 황사손 또는 황사손을 대신해 황제 역을 하는 분은 12면류관 12장복을 입고 참석한다.
삼국지 시리즈를 보면 헌제나 조환, 등이 면류관을 쓰고 있다.면류의 숫자를 세어보면 12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 가시 면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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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총독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데리고 가서 그분 둘레에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그분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조롱하였다. 또 그분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외투를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총독 관저였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자주색 옷을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가 메시아라는 소문이 퍼지자, 예수를 잡아서 처형하려는 로마 제국 군인들은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로마 제국 황제가 쓰는 월계관을 본따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예수의 머리에 강제로 씌워서 가혹행위를 했다. 이때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나자렛 사람 예수, 유다인들의 왕'('''I.N.R.I.'''[16] )이라는 명패를 십자가에 달았고, 예수가 피를 흘리며 강제로 쓴 가시관을 왕관이라 불렀다. 이후 동양 문화권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월계관을 면류관으로 번역한 것이다.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그분께 다가가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복음서 원문에는 그냥 '가시 왕관'(마르코 복음서, 요한 복음서에서는 ἀκάνθινος στέφανος(thorny crown).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στέφανος ἐξ ἀκανθῶν(crown made from thorns). 루카 복음서에는 언급 없음)으로 나온다. 요한묵시록 등에서 '면류관'으로 번역된 어휘 역시 원문에서는 그냥 στέφανος이다.
해당 가시나무는 지중해, 아라비아 원산의 대추나무의 일종인 ''Ziziphus spina-christi''로 여겨진다. 영칭은 '''Christ's-thorn jujube'''
5. 같이보기
[1] 유교에 나오는 예법은 주나라 왕실 예법임으로.[2] 가령 후한 시기 배경으로 한 중화권 삼국지 드라마를 보면 황제가 아닌 제후들도 면류관을 쓰고 나온다. 코에이 삼국지 게임에도 익주의 주목 유장이 작변을 쓴 일러스트가 있다.[3] 유럽에서도 철 왕관, 이슈트반 왕관, 삼중관 등 금속으로 된 왕관이 점점 예식용, 투구 등으로 밀려나면서 군주들이 평상시에는 천으로 된 모자를 쓴 것과 유사하다.[4] 일반 신하들이 쓰는 전각복두 사모와 달리 매미날개가 엄청나게 길다.[5] 일반 복두와 달리 익선관처럼 매미날개가 위쪽을 향한다.[6] 몽골족의 친척뻘인 거란족의 요나라,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의 금나라는 면류관을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요나라가 초대 황제부터 면류관을 쓴 반면 금나라는 3대 황제부터 비로소 면류관을 쓰기 시작했다.[7] 위안스카이와는 용모도 다르고 위안스카이는 당시에 이미 수염이 하얗게 세었기 때문에 위안스카이의 사진이 아니다. 다른 곳에서 찾아본 결과 당시 내무부총장 주치치엔(朱啓鈐)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류'가 없는 면관이기 때문에 군주라고 할 수 없다.[8] 류가 얼굴을 가림을 피하여 왜곡이 일어남.[9] 면류관에 대해선 기록이 너무 적다. 발해도 당식 의복을 받아들인 만큼 면류관을 사용했을 수도 있지만 기록이 전무.[10] 뒤가 4류인건 그냥 뒤 다섯 개가 가려져서 안 그린 것일지도.[11] 정말 12류 면류관을 사용했는지는 미상이다.[12] 아니면 대방공이 말 그대로 제후니까 그냥 제후 지위의 비유일 수도 있다.[13]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한다.[14] 위의 금관과는 다르다. 위의 금관은 금으로 만들어진 관이지만 이 금관은 금칠을 했을 뿐이다[15] 구슬은 붉은색, 백색, 푸른색 3개 색만 사용하고 1줄당 8개를 뀀[16]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