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서울 패럴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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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8 서울 올림픽과 함께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최한 패럴림픽이다.
2. 상세
당시에는 패럴림픽을 '장애자 올림픽'이라고 불렀으며 추후 장애인 올림픽, 그 후 현재의 패럴림픽으로 이름이 굳어졌다. 그래서인지 2018년 평창은 1988 서울 장애자 올림픽과 달리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으로 표현된다.[5]
'''패럴림픽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회이다.''' 이 패럴림픽을 시작으로 패럴림픽은 올림픽 개최지에서 같이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6] . 그뿐 아니라 패럴림픽의 주관단체인 '세계 장애인 스포츠 기구 국제 조정 위원회'[7] 의 상징인 '''ICC기'''를 만들었으며 '''패럴림픽 최초의 성화봉송'''을 한 대회이기도 하다.[8] 마지막으로 후술하는 '''황연대 극복상'''(현재는 황연대 성취상)이 처음 만들어지고 수여된 대회이다.
사실 결과적으로 보면 서울 페럴림픽이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을 개선시키고 장애인 복지가 이전보다 크게 나아지는 등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지만[9] 개최 과정에서 장애인들 사이에서 냉소적인 시선들이 적지 않았다. 원채 정부 차원에서 페럴림픽 개최에 대해 크게 염두에 두던것은 아니었고 일단 페럴림픽도 유치했지만 페럴림픽이 올림픽에 밀려 후순위로 밀려났던데다가 당시 당국에서 이중적인 정책을 펼친것이 크게 작용했다. 비록 장애인들의 복지향상을 명분삼아 페럴림픽을 개최하기는 했지만 장애인 복지에 대한 예산이 그에 걸맞게 배정된것이 아니라서 장애인에 대한 복지는 여전히 열악했던데다가 결정적으로 '''올림픽을 치른다면서 미관향상을 이유로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길거리에 보이면 잡아서 강제로 수용시설로 집어놓았던데다가''' 수용시설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이루워졌던것도 아니라서 '''형제복지원사건'''같은 일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위낙 86-88을 진가의 보도처럼 써먹었고 아직 독재정권 시절인지라 이에 대한 불만을 대놓고 토로하기는 힘들었지만 어쨌든 장애인 입장에서 불만이 안 쌓일수 없던 시절이었고 장애인 올림픽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조직위원회 사무국을 의료보험관리공단 청사에 마련했을때 장애인 단체 사이에서 장애자올림픽 개최할 돈으로 장애인에 대한 복지에 써라, 우리는 수십년 노력해도 사무실 한칸 얻기도 힘든데 무슨 과도한 낭비하느냐는 식의 질타가 많이 쏟아져 나왔을 정도로 분위기가 꽤 험악했다고 한다.
이러한 불만과 비판과는 별개로 페럴림픽에 대한 준비는 자원봉사단 모집을 시작으로 하여 차근차근 진행되었고 1987년도에 본격적인 준비과정에 들어갔는데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선수촌이었다. 당초에 김포에 선수촌 아파트를 마련할 계획이었지만 김포는 잠실경기장과 거리가 멀었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그러다가 잠실선수촌아파트 가운데 일부를 장애인 편의시설을 추가해서 쓴다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다만 계획준비가 올림픽에 비해 늦었기 때문에 개회식과 폐회식은 서울올림픽의 그것을 그대로 재연해서 써먹었고 대회도 운영상의 미흡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이전보다 크게 나아지면서 대체적으로 성공적이라고 평가받으며 대회를 마무리했다.
3. 엠블럼과 태극
1988년 서울 패럴림픽의 엠블럼은 성낙훈 (1956~1985) 디자이너가 디자인했으며 (#, #), 태극문양과 오륜기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는데 추후 이 엠블럼은 올림픽의 오륜기와 함께 패럴림픽을 상징하는 문양이 된다. 2004년 아테네 패럴림픽까지 이 상징물을 사용하였으며, 2006년 이후에 개최되는 대회에는 현재 사용 중인 패럴림픽 상징물 '아지토스'가 사용되고 있다.
4. 마스코트
이름은 곰두리로, 이윤수 당시 경기공업개방대학 (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가 디자인했다. (#) TV 애니메이션 등이 따로 만들어진것도 아니고 해서 아쉽게도 서울올림픽의 호돌이에 밀려 기억에 깊게 남은 캐릭터는 아니지만 이 캐릭터가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의 마스코트 반다비로 계승된다. #올림픽 마스코트는 IOC에 저작권이 귀속되는 반면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서 지금도 가끔 서울특별시에서 운영하는 장애인/노약자 무료 셔틀버스에서 도색이 되어있으며 지금도 종이컵에 찍혀 생산된다.# 그리고 서울 곰두리 FC의 팀로고에도 쓰이고 있다.
마스코트를 잘 보면 오른쪽 곰두리는 오른팔, 왼쪽 곰두리는 오른발이 결손된 것처럼 보인다. 장애인들을 위한 올림픽이니 그렇게 디자인한 것이지만 아무래도 마스코트 그림에 직접적으로 결손 부위를 보여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적절히 가린 것. 물론 실제 인형옷에 들어간 사람들은 비장애인이었기 때문에 인형까지 그렇게 만들지는 않았다.
5. 개, 폐회식
1988년 서울 패럴림픽은 올림픽 개최지에서 한 달 이내에 패럴림픽 대회를 개최하기로 한 IOC와 IPC의 첫 번째 파트너십이 적용되는 대회였다. 페럴림픽에 대한 본격적인 준비가 1987년이 되어서야 시작되었기 때문에 패럴림픽 개,폐회식까지 따로 준비할 여력이 없었던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는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프로그램을 패럴림픽 개,폐회식에 거의 그대로 사용하였다. TV 광고에서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의 감동을 장애자 올림픽에서 그대로 다시 느껴보세요!" 라고 노골적(?)인 멘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다만 100% 다 재활용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프로그램을 바꾸었고, 개회식도 오전 10시 30분부터 진행한 올림픽과는 다르게 오후 3시부터 진행되었다. 폐회식때 장애인 가수 조덕배의 단독 무대가 펼쳐지기도 하였다. 당시 조덕배씨가 부른 노래는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을거야" 였다. 패럴림픽 역사상 최초로 성화봉송 및 개회식 성화점화가 시행되었는데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채화한 불을 사용하였다.
6. 황연대 극복상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장애인 의사이자 대한민국 장애인의 대모로 불리웠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황연대(黃年代 ,1938~) 교수가 한 해외언론에서 오늘의 여성상과 함께 받은 상금 200만원을 IPC에 전액 기탁하면서 1988년 서울패럴림픽때 처음으로 상이 제정되었는데 바로 황연대 극복상이다. 이는 후에 2008 베이징 하계패럴림픽에서 황연대 성취상(Whang Youn Dai achivement award)으로 바뀌면서 폐회식 공식행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황연대 극복상은 성적과 상관없이 패럴림픽에서 장애를 딛고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선수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부상으로 순금 75g(약 20돈)으로 만든 메달이 수여된다.
7. 참고
8. 여담
- 한국은 이 대회에서 금40 은35 동19 로 7위를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패럴림픽에서 거둔 최고의 기록으로 이 대회 이후엔 평균 금메달 11개 정도를 획득 중.
- 대회초기에는 입장권 판매율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서 학생들이나 관변단체, 교회신도들을 동원했고, 당연히 관중들도 선수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여서, 분위기도 썰렁했다지만 시간이 갈수록 관중이 늘면서 열기도 뜨거워졌다고 한다. 외국방송에서도 관중들의 열기에 많이 놀랐을 정도였다고.
- 서울올림픽때와 비교하면 운영이 미숙했다는 평인데 운용본부에서 규칙을 숙지하지 않은 채로 경기를 진행하다보니 메달이 무더기로 취소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 덧붙여 방송에서도 꽤 푸대접을 받았는데 서울올림픽때에는 뉴스와 일부 드라마, 특집프로그램을 제외하면 하루종일 올림픽 관련 프로그램으로 내보냈는데 반해 페럴림픽때에는 페럴림픽에 대한 관심이 낮을 것으로 예상해서인지 방송사에서 페럴림픽을 중계했을 때 하이라이트나 일부 경기 정도나 생중계하고 남는 시간에는 예능프로그램이나 드라마 재방으로 때우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래서 페럴림픽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을 때 시청자들에게 항의가 많이 오면서 결국 페럴림픽 중계를 늘려주기는 했지만 아무튼 씁쓸한 단면을 엿볼 수가 있었다.
- 하지만 이러한 운영상에 미숙이 있었음에도 당대에는 나름대로 감동을 많이 준 대회였고, 한국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을 바꾸는데 큰 공헌을 한 대회로 평가된다.[10] 하지만 88올림픽에 묻히다보니까 기억하는 사람은 적다.
- 2019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한국 정부의 패럴림픽 몰이해로 하머터면 호주에서 개최될 뻔한 상황이 있었다는 것이 나왔다. 이는 1983년 초 호주는 한국 정부에 1988년 장애인올림픽을 자국에서 개최할 의사가 있다고 타진했고, 처음에 우리 관계 당국은 시설 부족 등을 들어 개최권을 호주에 넘기려고 했다. 그러다 장애인 보호 등에 대한 국제적 이미지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재검토가 이뤄졌고, 1년이 지난 1984년 초에야 우리가 패럴림픽도 치르기로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9. 관련 문서
[1] 일부 경기는 경기도에서 개최[2] 척수장애, 탁구[3] 시각장애, 육상[4] 1988 서울 올림픽 핸드볼 금메달리스트[5] 이것은 관련 특별법 명칭의 변경과 연관이 있다. 패럴림픽 항목 참조.[6] 정확히는 1960년에 이탈리아 로마에서 올림픽과 패럴림픽을 개최한 게 처음이며, 서울 대회는 '''올림픽 시설을 재정비'''하여 패럴림픽을 개최하는 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회이다.[7] International Coordination Committee of World Sports Organization for Disabled, 약칭 ICC. 다음해 설립되는 국제패럴림픽위원회의 전신단체이다.[8] 다만 현재처럼 패럴림픽 발상지인 스토크맨더빌에서 채화하는 행사는 2012 런던 패럴림픽부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개최지의 조직위원회에서 알아서 지정했다고 한다. 서울 패럴림픽 성화는 강화도 마니산에서 채화하였다.[9] 이는 서울올림픽이 독재정권의 권력공고화를 위해 개최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의 민주화와 자유화에 공헌했다고 평가받는것과 비슷하다.[10] 사실 위에 적혀있듯이 정부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낮아서 바로 앞선 서울올림픽 개최과정에서 외관정비를 명목으로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붙잡아서 복지시설로 강제로 수용시켜놓는 일이 벌어졌고 복지시설에 대한 감사가 제대로 이루워진 것도 아니었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