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배

 

1. 개요
2. 상세



1. 개요


趙德培
1959년 8월 21일생의 발라드, 포크 가수이자 前 삼호까뮤 CEO.

2. 상세


1985년 데뷔하여 '꿈에'[1], '나의 옛날 이야기',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2],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을거야' 등 주옥같은 곡들을 지니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오래된 노래들이지만 그다지 세대를 타는 멜로디는 아닌지라 아이유, 조PD, 성시경, 조성모, 이수영 등 여러 가수들이 조덕배의 노래를 커버했다. 하지만 원곡의 감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하다.
같은 노래를 불러도 매번 다른 감성과 편곡으로 부른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나가수에서 조관우가 '그대 내맘에 들어오면은'을 불렀고 나가수 2기에선 정엽이 '꿈에'를 불렀다. 조관우는 너무 유명한 노래인 탓인지 경연 직전까지 걱정에 마음을 놓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괜찮은 순위를 냈고 곡해석은 호불호가 갈리지만 괜찮다는 평가. 그리고 정엽의 꿈에는 시작은 좋지만 클라이막스에서 맹하다는 평가가 대다수였다.
2005년 조PD가 커버한 "나의 옛날 이야기" 랩버젼으로 그의 노래 역시 재주목받았으며, 2014년 아이유가 커버한 "나의 옛날 이야기"가 꽃갈피에 수록되어 큰 인기를 끌고있다. 아이유의 맑은 목소리와 잘 어울린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이 곡은 현재 뉴욕에서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임상아의 1집 "Drama"에도 리메이크 버전이 수록되어 있다.
2016년에 마마무솔라가 솔라감성 part.3로 "꿈에"를 리메이크했다.
보통 노래를 부를때 다른 가수들과 달리 앉아서 부른다. 그 이유는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 때문이다. 목소리가 가늘고 시다.
2007년문근영이 부른 KTF 광고의 "&Design"이라는 곡이 자신의 곡 "나의 옛날 이야기"와 100% 유사하다고 표절 시비를 제기했다. 사실상 두 곡의 후렴구 멜로디가 흡사했고, 결국 표절 판정이 났다. 이에 대해 그는 문근영의 팬이었으며, 작곡가가 괘씸했지만 이젠 별 관심도 없다고 말했을 뿐더러 "문근영 양에 맞는 더 예쁜 곡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인터뷰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에게 굴욕적인 별명이 붙었으니..
[image]
그의 사진이 하필이면 스타크래프트테란 유닛인 벌처의 운전수와 닮게 나온 것이다. 그 뒤로 네티즌들은 조덕배를 벌처라고 부르게 되었다.
[image]
비니모자와 썬글라스를 벗고 수염을 기르면 이렇게 짐 레이너가 된다.
[image]
젊었을 때는 이랬다.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전두환 정권에 공중분해됐던 삼호그룹 일가의 한 사람이었다고. 그 때는 회장의 조카로 서른살 가까이까지 건설업을 했다고 한다.[3] 1985년 1집 데뷔 한 해 전인 1984년까지 조덕배는 (주)삼호까뮤의 CEO로 재직하고 있었다. 당시 연간 매출 3억원, 직원이 100명에 이를 만큼 건실한 회사였다. 전국에 산재한 삼호아파트 및 삼호 관련 빌딩의 외장과 도장 공사를 독점 공급받던 회사였다. 조덕배는 “당시 노란색감으로 유명했던 삼호아파트의 외벽은 전부 내가 공사를 맡아 진행한 것”이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다 망한 후 남은 재산은 어음 3,800만 원. 삼호그룹이 망한 뒤 가수 생활을 하게 되었으므로, 개인적으로 아이러니라고 한다. #

“84년 그룹 해체 발표가 나오기 직전에 이순자 전 영부인이 서울 방배동에 위치한 작은 아버지의 저택 ‘강남원’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정원에 500년 된 미루나무가 있었는데 그걸 자신의 정원으로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더군요. 숙모님이 그 자리에서 무안을 줬는데 공교롭게도 그 다음날 합동수사본부에 사촌형이 끌려갔고, 또 다음날 각 신문에 삼호그룹 해체 기사가 나왔지요. 저는 그때 제주 그랜드호텔 공사 계약건으로 제주도로 출장을 갔던 날이었죠. 똑똑히 기억합니다.”

조덕배에 따르면 당시 작은 아버지 조봉구 회장은 뇌출혈로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대신 회사를 이끌던 아들(조덕배의 사촌형)이 합동수사본부에서 백지서류에 서명을 했고, 곧바로 해체 절차에 들어갔다. 일순간 모든 걸 잃었던 조덕배는 당시 갖고 있던 3800만원짜리 어음을 명동에서 현금으로 바꾼 뒤 평소 즐겨부르던 노래를 담은 첫 정규 앨범을 세상에 내놨다. 오늘날의 조덕배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는 “혹시 집안 내력이 알려질까봐 말문을 닫고 지냈다”며 “노래의 가사만 잘못돼도 출연금지가 내려지던 시기였기에 5공 시절 내내 숨죽여 지내야했다”고 말했다. 또 “절대 권력이 얼마나 무서웠냐하면, TV에 그(전두환 전대통령)가 나오기만 해도 주눅이 들곤 했다”면서 “심지어 그시절엔 ‘합동 요구르트’라는 음료 조차도 뭔가 꺼림직해 마시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조봉구 회장은 지난해 미국 LA에서 8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30년만에 말문을 연 배경에 대해 조덕배는 “세월이 지나면서 권력에 의해 인생이 철저히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내가 가수가 될 수 있게(?) 해준 전 전 대통령이 어떨 때는 고맙다는 생각도 들더라”며 “뇌출혈에서 회복돼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면서 가문의 일원으로 삼호그룹의 명예만이라도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같은 사연을 털어놓게 됐다”고 설명했다.

조덕배는 “전두환 전 대통령 측에 이같은 내 이야기에 대한 반응을 들어달라”고 부탁하면서 “전씨도 이제 권력을 내려놓고 나이 든 할아버지일 뿐이니 지금이라도 그때 일에 대해 사과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라도 ‘나 때문에 조덕배가 가수를 한다네’라고 한 마디 했으면 한다”고 바랐다. 또 “언젠가는 가족을 대표해 그와 함께 밥 한 끼를 먹고싶은 생각도 있다”고 덧붙였다.#

삼호그룹은 당시 국내 최대 면방직기업으로 1980년대 초반 13개 계열사를 이끌며 한국 재계 순위 9위의 대기업이었다. 하지만 ‘삼호그룹’도 국제그룹과 비슷한 이유로 한순간에 공중분해됐다. 삼호그룹 해체와 관련된 뒷이야기가 알려지기 시작한 건 지난 1998년 3월25일 <뉴욕타임스>가 조봉구 삼호그룹 회장 일가가 미국에서 벌인 소송을 보도하면서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1984년 8월24일 김만제 당시 재무부 장관은 조 회장 아들 조용시씨를 장관실로 불렀다. 조 회장은 뇌출혈 치료를 위해 미국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삼호그룹 경영을 조용시씨가 맡고 있었다.

김만제 장관은 조용시씨에게 “우리나라 일부 기업들의 부실 상태가 감당할 수 없는 선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고위층과 협의해 산업합리화 조처를 마련했다”며 “삼호그룹은 대림에 합병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고 삼호그룹 해체 통보를 했다. 조용시씨는 곧바로 송기태 조흥은행장을 만났으며 “위에 로비를 하지 않으니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느냐”라는 말과 함께 위임장이라는 제목만 쓰인 백지에 ‘서명’을 강요 받았다고 전했다.

이에 1997년 조 회장 일가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지방법원에 한국정부와 조흥은행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에서 조 회장 일가는 “신군부에 자금을 대지 않아 미운털이 박혀 당시 국제그룹과 함께 그룹이 해체됐고, 약 2조5000억원을 신군부에 의해 몰수당했다”고 주장했다.

또 조 회장 일가가 소송을 제기하고 일주일 뒤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당선되자마자 국민통합을 명목으로 전두환을 사면했다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한편 삼호그룹 일가로 알려진 가수 조덕배는 지난 2011년 한 언론을 통해 삼호그룹 해체 당시 상황을 털어놨다. 조덕배는 “1984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끄는 신군부와 5공 정권에 의해 공중분해된 삼호그룹의 조봉구 회장이 나의 작은아버지”라며 “그룹이 해체될 때 가족이 전부 해외로 피신을 해야 했고, 나 역시 출국금지를 당하는 동시에 내가 운영하던 회사가 없어지는 등 큰 고초를 겼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룹 해체 발표가 나오기 직전에 이순자 전 영부인이 서울 방배동에 위치한 작은아버지(조 회장)의 저택 ‘강남원’을 찾아왔고, 정원에 500년 된 미루나무를 본인 정원으로 가져가고 싶어했다”며 “숙모님이 그 자리에서 무안을 줬는데 공교롭게도 그 다음날 합동수사본부에 사촌형이 끌려갔고, 또 그 다음 날 각 신문에 삼호그룹 해체기사가 나왔다”고 말했다.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 신세를 졌으나, 수술 이후 다시 무대에 오르고 싶은 마음 덕에 2012년 5월 21일 오후 3시, 7시 30분 두 차례에 걸쳐 신촌 연세대학교강당에서 '위드 프렌즈'라는 제목의 콘서트를 연다고 한다.
그 뒤 2014년에 마약 혐의로 긴급 체포됐으며 마약 혐의로 조덕배를 구속 기소했다.11월 13일에 검찰은 조덕배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으며 11월 27일에 법원은 조덕배에게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나중에 2015년 2월 5일 항소심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
2016년 9월 22일 아내 무고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었다.출처 2016년 10월 26일에 MBC에서 출연정지 명단에 올랐다.출처
2018년 현재 23살 딸이 있다. 30대 후반에 딸을 본 늦깎이 결혼.
1988년 서울 하계 패럴림픽 폐회식때 출연했으며 당시 부른 노래는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을거야.”였다.
[1] '''중학생''' 때 만든 노래라고. "'꿈에'란 노래는 중학교때 쓴 곡이에요. 당시 제가 사는 집 창가에서 보이는 언덕 위의 하얀집에 한 소녀가 살았는데, 저는 그 소녀를 짝사랑했어요. 그 마음을 담은 노래가 '꿈에'이죠."#[2] “이 노래는 지금의 아내를 위해 쓴 곡이다. 사람들은 이 곡의 가사가 아름답다고 하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밀당(연인 사이에서 서로 주도권을 갖기 위해 벌이는 밀고 당기는 가벼운 다툼)’을 노래 한 거다”#[3] 대림산업에서 나온 그 삼호아파트의 회사다. 1986년에 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