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zy-E
'''My days ain't long I'm comin' strong and fast'''
'''내 삶은 그리 길지 않아. 나는 강하고 빨라.'''
'''Lock up 8 niggs, kill up 10 pigs Innocent fuckers are also dying too.'''
'''깜씨 8명을 가두고 경찰 10명을 죽이고 무고한 놈들도 죽어가고 있지.'''
'''Now what else can I do? Fuck, fuck, fuck and plant my seeds.'''
'''이제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xx, xx, xx하며 내 씨앗을 심지.'''
'''Leavin' kids in this world like me.'''
'''나처럼 이 세상에 아이들을 남기지.'''
'''The lunatic psycho mutherfucka Eazy-E.'''
'''미치광이 살인자 Eazy-E.'''
24 Hours To Live 中
'''갱스터 랩의 대부(Godfather of gangster rap)'''#
1. 데뷔와 성공
데뷔 전엔 Kelly Park Compton Crips[1] 에서 갱스터로 일하고, 심지어는 포주 짓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더 큰 사업을 원한 그는 자기 갱단에서 번 돈 전부로 Ruthless Record를 세워 최고경영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동료들인 닥터 드레, 아이스 큐브, DJ 옐라, 아라비안 프린스와 함께 힙합 역사상 악명높은 그룹 '''N.W.A'''를 세워 1987년 N.W.A 컴필레이션 1집 앨범 N.W.A and the Posse의 곡 중 Boyz-n the hood (랩)로 데뷔했다. 하지만 그다지 큰 영향은 끼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아라비안 프린스도 이지와의 불화로 팀을 나갔지만, 1988년에 MC 렌을 영입한 후 1집 앨범 '''Straight Outta Compton'''으로 큰 사회적 이슈와 파장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다. 특히 Fuck Tha Police는 미국 사회에 대한 강렬한 욕 다발을 날려서 보수주의자들과 교사들, 학부모들, 경찰에게 엄청난 항의를 받았고, 언론들에게도 두고두고 까여서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방송국에서도 외면받을 뿐더러 몇몇 도시는 이들의 공연을 막았다.
이 때문에 멤버들과 함께 경찰서 정모까지도 간 적이 있으며, FBI의 감시도 받고 영국에서도 수출 금지가 되었다.
2. N.W.A의 해체
하지만 N.W.A 활동 중, 멤버들과의 충돌이 일어났는데, 특히 닥터 드레와 아이스 큐브가 이지 이의 그룹에 대한 지휘에 상당한 불만을 표출했다. 그리고 닥터 드레와 이지 이는 음악적 성향도 다른 점도 멤버들 간의 갈등에 한몫했다. 그러다가 이지 이와 N.W.A 간의 부당한 수익분배에 관한 문제제기로 갈등이 커져 결국 닥터 드레와 아이스 큐브는 1991년에 팀을 나가버리고 N.W.A도 얼마 안가 해체되어 버린다.[2] 그야말로 흑역사. 사실 원인은 매니저였던 제리 헬러에게 있다고 보는게 정설. 이지 이도 제리 헬러에게 분노했다.
3. 닥터 드레와의 갈등
N.W.A가 해체된 후 아이스 큐브와 닥터 드레는 슈그 나이트(Suge Knight)의 Deathrow Record로 들어가서[3] 아이스 큐브는 1991년에 Death Certificate를 발표해 N.W.A, 이지 이를 디스하지만[4] 이지 이는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진 않았으나, 1년 후엔 드레도 1집 앨범 The Chronic에서 이지 이를 까는데, 특히 Fuck With Dre Day에서 이지 이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두드러진다.[5] MC 렌이 여러 디스곡으로 맞대응 을 해줬으나 제대로 빡친 이지 이는 소송을 걸었지만 기각되고, 결국 1993년 It's On ( ) 187um Killa[6] 에서 폭풍 욕 다발 디스를 날려 드레와 이지의 갈등은 더더욱 심화되었다. 갈등은 1995년 Str8 off tha Streetz of Muthaphukkin’ Compton의 발표로 절정에 다다랐지만, 본인 레코드 사에서 수제자들인 본 석스 엔 하모니가 투팍과 함께 Thug Luv라는 싱글을 발표하면서 싸움은 끝나게 된다.
4. 말년
이지 이의 말년은 상당히 비참했다. 돈 벌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데다가, 그의 여자문제는 날로만 갈수록 부풀어 올랐다. 어떤 노래 가사에 여자를 성적 도구로 취급하는 저속한 비하 발언까지 썼고,[7] 그의 집에서 그와 성관계를 한 그루피가 셀 수 없을 정도면 이건 뭐...[8] 답이 없다. 결국 계속되는 성관계로 인한 에이즈에 걸렸고 에이즈가 악화되어 Cedars-Sinai 병원에 입원한지 얼마 안가 1995년 3월 26일에 30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그래도 유언만 보면 자기 삶의 말년에 후회는 했었던 듯하다. 그래 봤자 후회하기엔 심각하게 늦었지만. 아래는 그의 유언.
내가 설교 같은 것을 할만한 인간 같지는 않아 보일 거야. 그러나 나는 지금이 내가 회개할 시간이라고 생각해. 지금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나에 대해 상관하고 내 말을 들을 사람이 있으니까. 그래, 난 컴튼의 길거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을 여러 가지 했어. 하지만 역시 충분히 할만했어. 그 뒤에는 LAPD와 FBI가 재수 없어할만한 래핑을 시작했지. 그러나 우리의 메시지는 미국 전역이 우리 말을 듣게 할 정도로 유명해졌어. 곧 우리의 분노와 희망이 모두를 흥분시켰지. 내 성격에도 아주 좋은 보답이 많았지. 비싼 자동차와 빵빵한 여자와 좋은 삶, 거의 멈추지 않는 흥분상태였지. 난 무교지만, 나쁘거나 착하거나 그게 나야. 난 천국 가기 위해 이딴 말 하는게 아니야. 그냥 몇천, 몇만의 어린 팬들이 에이즈에 대해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나 이전의 다른 이들처럼 나의 문제들이 좋은 행실로도 바뀔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나를 생각해주는 모든 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싶어. 왜냐면 너무 늦기 전에 도와주고 싶거든..(욕은 변호사가 뺐다고 전해졌다.)
난 이것도 전부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 저번 몇 주 동안 이것이 현실이고 아무것도 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지. 내 여친 토미카와 나는 4년 동안 같이 있다가 최근에 결혼했어. 그녀는 좋아, 착하고 멋진 엄마지. 우리는 한살된 남자아이가 있어. 토미카 이전에 난 다른 여자를 많이 범했지. 6명의 엄마 밑에 7명의 아이를 가지고 있어. 성공이 나한테는 너무 컸던 것 같아. 난 내 아이들을 전부 사랑하고 항상 돌봤지. 이제 나는 내 인생 최대의 싸움에 있고 쉽지 않아. 하지만 나에게 영향을 미친 모두에게 사랑을 보내고 싶어. 모든 도움 고마워. 그냥 기억해: "너의 진짜 시간이고 너의 진짜 인생이야 ."
5. 사후
그의 Ruthless Record는 그의 아내 토미카 라이트(Tomica Wright)가 차지했으나, 운영 능력이 개판이라서 결국 수제자인 본 석스 엔 하모니와 N.W.A 해체 후에도 남아있던 MC 렌마저떠난다. 그야말로 죽은 뒤에도 안습. 특히 MC 렌의 인터뷰를 보면 대락 어떤지 알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생전 그렇게 티격태격하던 드레의 수제자 에미넴이 피처링한 I Need A Doctor 뮤비에서는 드레의 회상씬에서 인터뷰 영상, N.W.A 시절 뮤비 중 한 장면과 사진으로 나오고, 뮤비의 마지막 부분에서 드레가 이지의 무덤을 방문하는데, 뭔가 쓸쓸하면서도 묘한 여운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9]
2013년 투팍과 올 더티 바스타드에 이어 홀로그램으로 등장하여 공연을 펼치셨다. #
6. 디스코그래피
6.1. 정규
- Eazy-Duz-It (1988)
- Str8 off tha Streetz of Muthaphukkin Compton (1996)[10]
6.2. EP
- 5150: Home 4 tha Sick (1992)
- It's On ( ) 187um Killa (1993)
- Impact of a Legend (2002)[11]
6.3. 컴필리케이션
- Eternal E (1995)[12]
- Featuring...Eazy-E (2007)[13]
- Tri-Pack (2010)[14]
- Merry Muthafuckin' X-Mas (2015)[15]
7. 기타
- 작은 키에 듣는 사람 꼴받게 만드는(...) 간사하고 날카로운 랩이 특징으로, 몇몇 창작물에 나오는 전형적인 '재수없는 땅딸보' 클리셰를 완전 빼다박은 스타일이다. 본인의 고향인 콤프턴에 대한 자부심을 지녀서 랩 가사에 콤프턴을 자주 언급한다. 하지만 랩 스타일이 하이톤이라고 해서 이지가 평소에도 하이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지 이의 원래 목소리는 저음에 가깝다. 다만 중간에 톤을 높여서 말하는 것을 보면 일부러 내리깐 듯. 아무튼, 랩 실력은 상당히 대단하다.
- 랩 실력뿐만 아니라 프로듀싱 능력도 뛰어난데, 본 석스 엔 하모니나 타이리 B, 브라운사이드같은 후에 널리 유명세를 떨치던 래퍼들도 이분의 작품들이다.
- GTA 산 안드레아스의 등장인물인 랜스 '라이더' 윌슨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이지 이의 대표적 상징인 선글라스와 모자부터 입에 착착 붙은 걸진 욕이나 작은 키(...) 모델링 등 많은 면에서 그를 닮았다. 게다가 입고 다니는 초록색 바람막이는 문서 맨 위에도 나온 이지 이의 유명 사진과 일치한다.
- 어반 딕셔너리에 따르면 이지 이의 노래 중 하나인 Boyz In The Hood의 한 구절인 It's all about making that G.T.A가 GTA(Grand Theft Auto)라는 말을 미국 사회 내에서 유행시켰다고 한다.
- 처음에는 그냥 멤버들 돈만 대줬는데 멤버들이 그의 랩핑을 듣고 감탄을 금치 못해 결국 래퍼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지는 나오는 노래 벌스마다 소극적으로 참여하고 지휘에만 열중해서 멤버들이 빡치고(...) 이것은 N.W.A 붕괴의 시발점이 된다.
- 게임이 존경하는 래퍼 중 하나다. 오른팔에 이지 이의 문신을 새길 정도.
- 서부 지방 간판 랩퍼인데다가 젊은 나이에 사망한 비운의 거물들이라는 점 때문인지, 주로 투팍의 랩과 리믹스 되는 경우가 많다.
- 생전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락 밴드로 건즈 앤 로지스를 꼽았다. N.W.A의 곡중에 Appetite for Destruction도 있다.[16]
- 모자를 자주 써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지 이는 아프로헤어다. 다만 항상 아프로였던 건 아니고 아이스 큐브와 더불어 80년대 유행한 '제리 컬' 스타일[17] 을 선보이기도 했으며 그 시절의 이미지가 가장 유명하다.
- 갱스터 랩의 대부라는 점과 실제 갱 활동을 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과묵하고 무덤덤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실제로는 유쾌하고 활발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 N.W.A. 시절에 Express Yourself 뮤직비디오에서 백악관을 접수하여 흑악관으로 바꾸고 Fuck Tha Police 가사 문제로 정부 기관에게 경고를 받은 것과는 별도로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일명 아버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만찬을 가진 적이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벌인 자선 사업에 대한 노고의 치하 목적에서 연 거라고. 이 일은 이 문서의 각주 4번에서 설명한 아이스 큐브의 곡 'No Vaseline'에서 언급되었다.
- Eazy-E가 죽기 전에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백인이 내게 와서 Nigga라고 해도 괜찮아. 왜냐하면 그건 나를 친근하게 부르는 표현이거든. 그런데 만약 그 백인이 Ni**er라고 해버린다면, 나는 그 백인을 그 즉시 처리해 버릴꺼야" 투팍도 이러한 투의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건 이 두 사람의 의견일 뿐이다. Eazy-E나 투팍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N-word를 마구 남발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