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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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드코프 Gu-82 (Гудков Гу-82)'''
형식 : 시제 전투기
개발 : 제301실험설계국(ОКБ-301)
설계 : 미하일 이바노비치 구드코프(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Гудко́в : 1904~1983)
초도비행 : 1941년 9월 11일
전장 / 전폭 / 전고 : 8.71 m / 9.80 m / 4.40 m
익면적 : 17.50 m2
중량 : 2,700~3,000 kg
동력 : 쉬베초프 ASh-82 공랭 14기통 엔진 (1,450 hp)
최대속도 : 580 km/h
항속거리 : 680 km
상승률 : 878 m/min.
상승한도 : 9,600 m
무장 : 20mm ShVAK 기관포 1문 / 12.7mm 베레진 UB 중기관총 2정
생산수 : 1대
1939년,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던 전훈을 바탕으로 소련 정부는 공랭 엔진 전투기인 폴리카르포프 I-16과 I-153으로 무장한 공군을 현대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 무렵 차세대 전투기의 기준은 전면노출면적을 줄이고 매끈한 실루엣을 바탕으로 더 높은 성능을 내는데 유리한 액랭식 V-12 엔진을 갖추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기에, 소련 공군도 이 조건을 붙인 차기 전투기에 관한 사양을 발표했다.
이 사업에는 4개의 실험설계국들이 제안서를 제출했는데, 그 중 3개가 야코블레프 Yak-1, 라보츠킨-고르부노프-구드코프 I-22, 미코얀-구레비치 MiG-1이 승인되고 채용이 진행되었다. 나중에 LaGG-1로 다시 명명된 I-22는 기술적인 개선이 필요한 것으로 밝혀져 100대만 만들어졌지만 이 기체는 성능보다는 금속 재료를 적게 쓴 구조 때문에 보험격으로 생산된 것이었다. LaGG-1의 후속 개량형인 LaGG-3도 클리모프 엔진을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많은 문제에 시달렸는데, 공군 심사관들은 특히 양산형이 원형기에 비해 40 km/h나 느려진 것이 제일 불만이었다. 잘 알려진대로, 겉보기로는 멀쩡해 보이는 이 전투기는 조종사들에게 "보증서 붙은 관짝(Лакированный Гарантированный Гроб)"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붙여질 정도여서, 도저히 영공방어를 맡길 만한 전투기라곤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공군은 다른 대안을 확실히, 그것도 빨리 필요로 하고 있었다.
세미욘 알렉세예비치 라보츠킨(Семён Алексеевич Лавочкин : 1900~1960)과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고르부노프(Владимир Петрович Горбунов : 1903~1945)와 함께 신형 전투기 설계에 협력하고 있던 미하일 이바노비치 구드코프(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Гудков : 1904~1983)는 LaGG-3의 결점을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쉬베초프 설계국에서 새롭게 발표한 ASh-82(M-82) 공랭 엔진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문제는 정부가 정해놓은 기준과 사양에 정반대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구드코프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쉬베초프의 새 엔진은 LaGG-1과 LaGG-3에 달렸던 클리모프 M-105의 1,100마력 보다 훨씬 더 높은 1,540마력의 파워를 제공하고 있었다. 비록 전면노출면적이 약간 늘어날 것은 분명하더라도, 그 정도의 항력은 30% 이상 늘어난 출력이 보상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1941년 8월 25일에 미하일 구드코프는 쉬베초프 엔진을 할당받아 LaGG-3에 설치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와 함께 직경이 큰 공랭 엔진에다 기관포 1문과 기관총 2정을 어떻게 통합시킬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엔진 회전축 중앙에 유성기어(Planetary Gear)와 플라이휠(Fly Wheel)이 달린 성형 공랭식 엔진의 경우, 직렬 액랭식 엔진과는 달리 프로펠러 축을 통과하는 모터캐논을 갖추는 것이 구조적으로 어려운 탓에 사실 이것은 엔진의 교체에 필요한 구조 변경과 무게중심 계산 따위보다 훨씬 까다로운 문제였다. 구드코프는 기수 카울링의 매끈한 라인을 고치지 않으려면 기관포 대신 부피가 작은 12.7mm 기관총을 설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임의적인 사양 변경은 얼마 안가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있던 항공인민병참국(НКАП)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았고, 다시 기관포로 되돌려야만 했다. 결국 구드코프는 기수 전면에 통합되어 있던 오일 쿨러용 공기흡입구를 떼어낸 다음 그 자리에 기관포를 설치하고 그 위에 돌출된 상태로 인테이크를 부착하는 형태로 타협을 보았는데, 이 설계 변경이 Gu-82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줄은 설계자인 그조차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라보츠킨 La-5가 첫 비행을 하기 6개월 전인 1941년 8월 25일, 미하일 구드코프는 항공인민병참국장 알렉세이 I. 샤쿠린(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Шахурин : 1904~1975)에게 ASh-82 엔진을 올려 개조된 LaGG-3의 개조 기체가 평가 테스트를 받을 준비를 마쳤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이 시제 전투기는 ShKAS(ШКАС) 기관총 2정과 12.7mm 베레진 UB 중기관총 1정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두 번째 시제기의 기수 상단에는 동조기어가 딸린 베레진 중기관총 2정과 20mm ShVAK(ШВАК) 기관포 1문이 추가되어 공격력이 보강되어 있었지만 앞서 설명한대로 카울링 상단이 부풀려져 있는 상태였다. 임시로 '''Gu-82(Гу-82)'''라고 불린 원형 1호기의 기수는 2호기와 같은 기관포 사양으로 고쳐진 후 1941년 9월 11일에 첫 비행에 나서게 된다.
첫 번째 비행 테스트에서 Gu-82는 573 km/h의 속도를 보였는데, 이는 LaGG-3 보다 약간 빠른 수준이었으나 전반적으로 비행 영역은 더 넓었다. 9월 24일까지 테스트 파일럿을 맡았던 알렉세이 I. 니카쉰(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Никашин : 1906~1943) 소령은 12회의 비행을 하면서 나름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공랭 엔진을 가진 이 전투기는 후술한 여러 사정에 의해 결국 양산에 돌입하지는 못했다.
1941년 10월 11일, 개발 주임이자 제301실험설계국의 국장을 맡고 있던 미하일 구드코프는 공장을 견학하러 온 스탈린에게 업무보고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이 이와 같은 구드코프의 진언을 얼마만큼 이해했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다만, 비상한 두뇌를 가진 이 독재자는 소련의 공업화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항공산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항공기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적어도 히틀러처럼 공군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얼마전까지 공군의 주력기였던 폴리카르포프 전투기들이 공랭 엔진의 한계에 부딛혀 최근 국경을 침범한 루프트바페에 의해 추풍낙엽처럼 격파당한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섣부른 선입견은 구드코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은 경험과 업적을 쌓아 '''전투기의 황제'''라고 불리던 니콜라이 N. 폴리카르포프(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Поликарпов : 1892~1944)가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고성능 공랭 엔진 전투기인 I-185 마저도 찬밥 신세로 만들었으니, 구드코프의 제안이 이빨도 먹히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제안에 대한 응답은 거의 두 달 동안이나 질질 끌게 된다. 한편, 미하일 구드코프는 함께 작업했던 고르부노프와 라보츠킨 사이에서 빠져나와 독단적인 프로젝트를 밀고 나간 탓에 퍽이나 불편한 관계가 되어 있었고, 이와 같은 상황은 Gu-82의 추가 개량에서 큰 걸림돌이 된다. [2] 라보츠킨 같은 경우는 대놓고 구드코프에 대하여 공공연히 이렇게 비난했다고 한다.
시제기의 제작을 같은 공장의 다른 격납고에서 진행한 탓에 라보츠킨은 구드코프의 전투기가 변해가는 과정을 속속들이 볼 수 있었고, 이것은 라보츠킨 휘하의 기술진과 직공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라보츠킨은 미하일 구드코프의 설계를 완전히 마스터할 수 있었으며 그것을 본딴 전투기를 서둘러 만들었다. 1942년 12월이 되자 장차 La-5로 공군에 채용될 전투기의 제작이 시작되었는데, 두 전투기는 같은 계열의 엔진을 얹었고[3] 일부 소소한 차이점을 빼면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서로 닮아있었다.
문제는 굳이 왜 그랬는가? 이다. 이미 Gu-82는 완성 단계에 있었고, 약간의 보완을 거치면 곧바로 생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구드코프의 권고를 받아들였다면 Gu-82는 La-5보다 최소한 5~6개월이나 더 빨리 일선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소련 공군이 백척간두에 서 있던 1941년 말이나 1942년 초에 Gu-82와 같은 고성능 전투기가 동부전선 상공에 수 백대가 출현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자. 물론 유럽 최강임을 자타가 공인하던 루프트바페가 신형 전투기가 하나 전선에 등장했다고 해서 밀려났을 것이라곤 볼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토록 쉽게 제공권 장악을 할 수 없었을 것은 분명하다. Gu-82는 La-5와 비교했을 때 최대속도는 약간 느렸을 뿐이고 무장은 비슷한 수준에 상승률도 조금 더 처질 뿐이었다. 만약 구드코프의 전투기가 일단 생산에 들어가고 후속 개량형에 400마력이나 출력이 증강된 M-82FN 엔진을 이식했다면 그 성능은 La-5를 앞지르고도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분명히, 누군가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고 전선에 보냈어야 할 Gu-82의 마무리 작업을 늦추었다.
항공병참국장 샤쿠린은 어떻게든 라보츠킨과 구드코프 사이의 얽히고 설킨 매듭을 풀려고 나름의 시도를 했다. 1942년 1월에 샤쿠린은 스탈린에게 Gu-82는 유망한 성능을 품고 있으니 소량 생산해 시험적으로 군에 배치해보는 방안을 스탈린에 제안했다. 이 제안에는 모스크바의 항공창 중에 하나를 구드코프에게 할당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스탈린은 이에 대한 답변을 미루었다. 항공 역사가들은 스탈린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때는 LaGG-3의 생산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또한 아마 스탈린이 항공병참국의 권고를 받아들였다면 말썽많던 LaGG 전투기의 생산 체제도 빨리 치워버릴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LaGG 생산 라인을 가동하고 있던 제21호 공장은 반 년이나 지난 후에야 La-5를 생산하게 된다.
6개월 후, 라보츠킨의 전투기는 같은 쉬베초프 ASh-82 엔진을 더 개량한 모델을 얹어서 다시 등장했는데, 언뜻 보면 Gu-82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있었다. LaGG-3와 마찬가지로 이 극초기형 La-5의 날개에는 슬랫이 없었으며 저속에서 쉽게 실속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따라 1942년 8월까지 모든 La-5에는 슬랫이 추가되었고 전선에 투입할 준비를 마쳤다.
Gu-82의 테스트 과정을 지켜 본 심사관들도 구드코프의 설계를 지지하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들은 층층시하 관료 체계를 거쳐 여러 차례나 항공병참국장과 스탈린에게 이 전투기를 전선에 보내줄 것을 호소했지만, 매번 이 과정을 늦추고 결국에는 무위로 돌아간 배경에는 당의 여러 관리들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1941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그로모프 시험비행 센터(Лётно-исследовательский институт имени М. М. Громова / ЛИИ)에서 조사된 Gu-82의 비행 특성은 이듬해 3월부터 시험을 시작한 La-5보다 눈에 띄게 낮았다. 앞서 밝힌 대로 최대 속도는 27 km/h 느렸고 상승률에서 특히 부진을 보였다. 하지만 비교 평가에 사용된 Gu-82에는 카뷰레터가 달려서 추운 날씨와 고공에서는 말썽이 잦으며 출력도 1,500마력에 그치고 있던 ASh-82-112 엔진이 장비된 반면 La-5에는 나치 전투기들과 마찬가지로 연료 직분사 장치와 최소한 1,850마력을 내는 ASh-82FN 엔진이 얹어져 있어 같은 출발선에서 비교한 공정한 평가가 아니었다. 구드코프의 전투기는 단지 La-5가 얼마나 훌륭한 신형 전투기인가를 두각시키기 위한 들러리로 소비된 것이다.
그 시간, 전투기 개발 사업에서 밀려난 미하일 구드코프는 동쪽 우랄 산맥 너머로 공업 지대를 옮기는 소개령에 필요한 수송차량을 시간에 맞춰 완성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제도판과 부품 시방서에 파묻혀있었다. 그 작업을 하면서도 구드코프는 자신의 작품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곧 언젠가는 당이 크게 개선된 자신의 전투기를 선택해 줄 것이라고 믿으며 묵묵히 과업을 완수해냈다.
1943년 7월 22일, 그로모프 비행센터의 소장인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체살로프(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Чесалов : 1898~1968)는 항공인민병참국장인 알렉세이 샤쿠린에게 Gu-82의 평가 결과에 관한 실험인증서를 보냈는데, 이 문건에는 Gu-82에 비해 더 나은 비행 데이터를 제공한 La-5의 주된 차이점은 Gu-82의 기관포 탑재로 인한 부풀어오른 카울링에 비해 공기역학적으로 더 세련된 노즈 형상을 가졌으며, 거기에 더해 신형 엔진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지적하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이 문제점은 장갑 돌격기 후보에서 보조적 역할에 그친 수호이 설계국의 Su-2가 겪었던 것과 완전히 같았다고 덧붙이고 있었다. 물론 처세술이 좋았던 샤쿠린은 이 보고서를 자신만 읽고 지도자 스탈린에게는 보내지 않았다.
'''구드코프 Gu-82 (Гудков Гу-82)'''
1. 제원
형식 : 시제 전투기
개발 : 제301실험설계국(ОКБ-301)
설계 : 미하일 이바노비치 구드코프(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Гудко́в : 1904~1983)
초도비행 : 1941년 9월 11일
전장 / 전폭 / 전고 : 8.71 m / 9.80 m / 4.40 m
익면적 : 17.50 m2
중량 : 2,700~3,000 kg
동력 : 쉬베초프 ASh-82 공랭 14기통 엔진 (1,450 hp)
최대속도 : 580 km/h
항속거리 : 680 km
상승률 : 878 m/min.
상승한도 : 9,600 m
무장 : 20mm ShVAK 기관포 1문 / 12.7mm 베레진 UB 중기관총 2정
생산수 : 1대
2. 차기 전투기는 전부 액랭식으로!
1939년,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던 전훈을 바탕으로 소련 정부는 공랭 엔진 전투기인 폴리카르포프 I-16과 I-153으로 무장한 공군을 현대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 무렵 차세대 전투기의 기준은 전면노출면적을 줄이고 매끈한 실루엣을 바탕으로 더 높은 성능을 내는데 유리한 액랭식 V-12 엔진을 갖추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기에, 소련 공군도 이 조건을 붙인 차기 전투기에 관한 사양을 발표했다.
이 사업에는 4개의 실험설계국들이 제안서를 제출했는데, 그 중 3개가 야코블레프 Yak-1, 라보츠킨-고르부노프-구드코프 I-22, 미코얀-구레비치 MiG-1이 승인되고 채용이 진행되었다. 나중에 LaGG-1로 다시 명명된 I-22는 기술적인 개선이 필요한 것으로 밝혀져 100대만 만들어졌지만 이 기체는 성능보다는 금속 재료를 적게 쓴 구조 때문에 보험격으로 생산된 것이었다. LaGG-1의 후속 개량형인 LaGG-3도 클리모프 엔진을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많은 문제에 시달렸는데, 공군 심사관들은 특히 양산형이 원형기에 비해 40 km/h나 느려진 것이 제일 불만이었다. 잘 알려진대로, 겉보기로는 멀쩡해 보이는 이 전투기는 조종사들에게 "보증서 붙은 관짝(Лакированный Гарантированный Гроб)"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붙여질 정도여서, 도저히 영공방어를 맡길 만한 전투기라곤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공군은 다른 대안을 확실히, 그것도 빨리 필요로 하고 있었다.
3. 발상의 전환
세미욘 알렉세예비치 라보츠킨(Семён Алексеевич Лавочкин : 1900~1960)과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고르부노프(Владимир Петрович Горбунов : 1903~1945)와 함께 신형 전투기 설계에 협력하고 있던 미하일 이바노비치 구드코프(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Гудков : 1904~1983)는 LaGG-3의 결점을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쉬베초프 설계국에서 새롭게 발표한 ASh-82(M-82) 공랭 엔진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문제는 정부가 정해놓은 기준과 사양에 정반대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구드코프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쉬베초프의 새 엔진은 LaGG-1과 LaGG-3에 달렸던 클리모프 M-105의 1,100마력 보다 훨씬 더 높은 1,540마력의 파워를 제공하고 있었다. 비록 전면노출면적이 약간 늘어날 것은 분명하더라도, 그 정도의 항력은 30% 이상 늘어난 출력이 보상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1941년 8월 25일에 미하일 구드코프는 쉬베초프 엔진을 할당받아 LaGG-3에 설치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와 함께 직경이 큰 공랭 엔진에다 기관포 1문과 기관총 2정을 어떻게 통합시킬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엔진 회전축 중앙에 유성기어(Planetary Gear)와 플라이휠(Fly Wheel)이 달린 성형 공랭식 엔진의 경우, 직렬 액랭식 엔진과는 달리 프로펠러 축을 통과하는 모터캐논을 갖추는 것이 구조적으로 어려운 탓에 사실 이것은 엔진의 교체에 필요한 구조 변경과 무게중심 계산 따위보다 훨씬 까다로운 문제였다. 구드코프는 기수 카울링의 매끈한 라인을 고치지 않으려면 기관포 대신 부피가 작은 12.7mm 기관총을 설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임의적인 사양 변경은 얼마 안가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있던 항공인민병참국(НКАП)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았고, 다시 기관포로 되돌려야만 했다. 결국 구드코프는 기수 전면에 통합되어 있던 오일 쿨러용 공기흡입구를 떼어낸 다음 그 자리에 기관포를 설치하고 그 위에 돌출된 상태로 인테이크를 부착하는 형태로 타협을 보았는데, 이 설계 변경이 Gu-82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줄은 설계자인 그조차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4. 시험 비행
라보츠킨 La-5가 첫 비행을 하기 6개월 전인 1941년 8월 25일, 미하일 구드코프는 항공인민병참국장 알렉세이 I. 샤쿠린(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Шахурин : 1904~1975)에게 ASh-82 엔진을 올려 개조된 LaGG-3의 개조 기체가 평가 테스트를 받을 준비를 마쳤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이 시제 전투기는 ShKAS(ШКАС) 기관총 2정과 12.7mm 베레진 UB 중기관총 1정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두 번째 시제기의 기수 상단에는 동조기어가 딸린 베레진 중기관총 2정과 20mm ShVAK(ШВАК) 기관포 1문이 추가되어 공격력이 보강되어 있었지만 앞서 설명한대로 카울링 상단이 부풀려져 있는 상태였다. 임시로 '''Gu-82(Гу-82)'''라고 불린 원형 1호기의 기수는 2호기와 같은 기관포 사양으로 고쳐진 후 1941년 9월 11일에 첫 비행에 나서게 된다.
첫 번째 비행 테스트에서 Gu-82는 573 km/h의 속도를 보였는데, 이는 LaGG-3 보다 약간 빠른 수준이었으나 전반적으로 비행 영역은 더 넓었다. 9월 24일까지 테스트 파일럿을 맡았던 알렉세이 I. 니카쉰(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Никашин : 1906~1943) 소령은 12회의 비행을 하면서 나름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공랭 엔진을 가진 이 전투기는 후술한 여러 사정에 의해 결국 양산에 돌입하지는 못했다.
5. 스탈린에게 진언
1941년 10월 11일, 개발 주임이자 제301실험설계국의 국장을 맡고 있던 미하일 구드코프는 공장을 견학하러 온 스탈린에게 업무보고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소련 인민의 정점에서 국가의 전권을 한손에 쥐고 있던 독재자는 파이프 담배를 물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구드코프는 한번 더 용기를 내기로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현재까지 시험비행을 통해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Gu-82는 고도 6,400 m에서 580 km/h의 최고 속도를 가지고 있으며 7분에서 7분 30초만에 5,000 m의 고도까지 상승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21호 공장에서 가져간 기체[1]
와 비교하면 45~55 km/h가 더 빠르고 5,000 m 고도까지 60~90초 더 빨리 상승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또한, 이 기체는 초기 실험기면서도 고리키 공장에서 생산 중인 직렬 엔진을 갖춘 LaGG-3의 양산형 보다 더 빠르기 때문에 생산라인을 할당해줄 것을 고려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지도자 동지."'''
'''"현재까지의 개발 진도로 미뤄볼 때, 저희들은 약간의 결점만 제거하면 M-82 엔진으로 600 km/h까지 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도자 동지께 명확하게 우리가 공랭 엔진 전투기를 일선에 배치해야만 할 당위성에 관해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공중전에서 다량의 물로 냉각시키는 액랭 엔진은 큰 취약점을 품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기체의 구성 요소와 부품 손실율이 훨씬 높을 것입니다. 그 대신 공랭 엔진을 장착한 전투기가 있으면 내구성과 생존성도 9배나 더 높아지므로 이런 큰 손실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이상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Gu-82의 테스트가 완료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초기 생산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아무쪼록 부탁드립니다."'''
6. 독재자의 고집
스탈린이 이와 같은 구드코프의 진언을 얼마만큼 이해했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다만, 비상한 두뇌를 가진 이 독재자는 소련의 공업화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항공산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항공기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적어도 히틀러처럼 공군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얼마전까지 공군의 주력기였던 폴리카르포프 전투기들이 공랭 엔진의 한계에 부딛혀 최근 국경을 침범한 루프트바페에 의해 추풍낙엽처럼 격파당한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섣부른 선입견은 구드코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은 경험과 업적을 쌓아 '''전투기의 황제'''라고 불리던 니콜라이 N. 폴리카르포프(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Поликарпов : 1892~1944)가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고성능 공랭 엔진 전투기인 I-185 마저도 찬밥 신세로 만들었으니, 구드코프의 제안이 이빨도 먹히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제안에 대한 응답은 거의 두 달 동안이나 질질 끌게 된다. 한편, 미하일 구드코프는 함께 작업했던 고르부노프와 라보츠킨 사이에서 빠져나와 독단적인 프로젝트를 밀고 나간 탓에 퍽이나 불편한 관계가 되어 있었고, 이와 같은 상황은 Gu-82의 추가 개량에서 큰 걸림돌이 된다. [2] 라보츠킨 같은 경우는 대놓고 구드코프에 대하여 공공연히 이렇게 비난했다고 한다.
사실, 라보츠킨 또한 3인 개발팀에서 독립해 La-5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스탈린과 항공인민병참국에게 많은 요구를 해왔기 때문에 이런 비난을 할 자격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구드코프는 Gu-82를 만들면서 독립된 설계국장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고 라보츠킨은 설계국을 차릴 수 있었으니 누가 더 당으로부터 혜택을 입었는지는 분명하다.'''"동료들을 배신하고 저 혼자 뛰쳐나가 지도자 동지 앞에서 아양을 떤 교활한 인간 같으니..."'''
7. 라보츠킨의 맹추격
시제기의 제작을 같은 공장의 다른 격납고에서 진행한 탓에 라보츠킨은 구드코프의 전투기가 변해가는 과정을 속속들이 볼 수 있었고, 이것은 라보츠킨 휘하의 기술진과 직공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라보츠킨은 미하일 구드코프의 설계를 완전히 마스터할 수 있었으며 그것을 본딴 전투기를 서둘러 만들었다. 1942년 12월이 되자 장차 La-5로 공군에 채용될 전투기의 제작이 시작되었는데, 두 전투기는 같은 계열의 엔진을 얹었고[3] 일부 소소한 차이점을 빼면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서로 닮아있었다.
문제는 굳이 왜 그랬는가? 이다. 이미 Gu-82는 완성 단계에 있었고, 약간의 보완을 거치면 곧바로 생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구드코프의 권고를 받아들였다면 Gu-82는 La-5보다 최소한 5~6개월이나 더 빨리 일선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소련 공군이 백척간두에 서 있던 1941년 말이나 1942년 초에 Gu-82와 같은 고성능 전투기가 동부전선 상공에 수 백대가 출현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자. 물론 유럽 최강임을 자타가 공인하던 루프트바페가 신형 전투기가 하나 전선에 등장했다고 해서 밀려났을 것이라곤 볼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토록 쉽게 제공권 장악을 할 수 없었을 것은 분명하다. Gu-82는 La-5와 비교했을 때 최대속도는 약간 느렸을 뿐이고 무장은 비슷한 수준에 상승률도 조금 더 처질 뿐이었다. 만약 구드코프의 전투기가 일단 생산에 들어가고 후속 개량형에 400마력이나 출력이 증강된 M-82FN 엔진을 이식했다면 그 성능은 La-5를 앞지르고도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분명히, 누군가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고 전선에 보냈어야 할 Gu-82의 마무리 작업을 늦추었다.
항공병참국장 샤쿠린은 어떻게든 라보츠킨과 구드코프 사이의 얽히고 설킨 매듭을 풀려고 나름의 시도를 했다. 1942년 1월에 샤쿠린은 스탈린에게 Gu-82는 유망한 성능을 품고 있으니 소량 생산해 시험적으로 군에 배치해보는 방안을 스탈린에 제안했다. 이 제안에는 모스크바의 항공창 중에 하나를 구드코프에게 할당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스탈린은 이에 대한 답변을 미루었다. 항공 역사가들은 스탈린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때는 LaGG-3의 생산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또한 아마 스탈린이 항공병참국의 권고를 받아들였다면 말썽많던 LaGG 전투기의 생산 체제도 빨리 치워버릴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LaGG 생산 라인을 가동하고 있던 제21호 공장은 반 년이나 지난 후에야 La-5를 생산하게 된다.
8. La-5의 등장
6개월 후, 라보츠킨의 전투기는 같은 쉬베초프 ASh-82 엔진을 더 개량한 모델을 얹어서 다시 등장했는데, 언뜻 보면 Gu-82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있었다. LaGG-3와 마찬가지로 이 극초기형 La-5의 날개에는 슬랫이 없었으며 저속에서 쉽게 실속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따라 1942년 8월까지 모든 La-5에는 슬랫이 추가되었고 전선에 투입할 준비를 마쳤다.
Gu-82의 테스트 과정을 지켜 본 심사관들도 구드코프의 설계를 지지하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들은 층층시하 관료 체계를 거쳐 여러 차례나 항공병참국장과 스탈린에게 이 전투기를 전선에 보내줄 것을 호소했지만, 매번 이 과정을 늦추고 결국에는 무위로 돌아간 배경에는 당의 여러 관리들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1941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그로모프 시험비행 센터(Лётно-исследовательский институт имени М. М. Громова / ЛИИ)에서 조사된 Gu-82의 비행 특성은 이듬해 3월부터 시험을 시작한 La-5보다 눈에 띄게 낮았다. 앞서 밝힌 대로 최대 속도는 27 km/h 느렸고 상승률에서 특히 부진을 보였다. 하지만 비교 평가에 사용된 Gu-82에는 카뷰레터가 달려서 추운 날씨와 고공에서는 말썽이 잦으며 출력도 1,500마력에 그치고 있던 ASh-82-112 엔진이 장비된 반면 La-5에는 나치 전투기들과 마찬가지로 연료 직분사 장치와 최소한 1,850마력을 내는 ASh-82FN 엔진이 얹어져 있어 같은 출발선에서 비교한 공정한 평가가 아니었다. 구드코프의 전투기는 단지 La-5가 얼마나 훌륭한 신형 전투기인가를 두각시키기 위한 들러리로 소비된 것이다.
그 시간, 전투기 개발 사업에서 밀려난 미하일 구드코프는 동쪽 우랄 산맥 너머로 공업 지대를 옮기는 소개령에 필요한 수송차량을 시간에 맞춰 완성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제도판과 부품 시방서에 파묻혀있었다. 그 작업을 하면서도 구드코프는 자신의 작품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곧 언젠가는 당이 크게 개선된 자신의 전투기를 선택해 줄 것이라고 믿으며 묵묵히 과업을 완수해냈다.
9. 에필로그
1943년 7월 22일, 그로모프 비행센터의 소장인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체살로프(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Чесалов : 1898~1968)는 항공인민병참국장인 알렉세이 샤쿠린에게 Gu-82의 평가 결과에 관한 실험인증서를 보냈는데, 이 문건에는 Gu-82에 비해 더 나은 비행 데이터를 제공한 La-5의 주된 차이점은 Gu-82의 기관포 탑재로 인한 부풀어오른 카울링에 비해 공기역학적으로 더 세련된 노즈 형상을 가졌으며, 거기에 더해 신형 엔진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지적하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이 문제점은 장갑 돌격기 후보에서 보조적 역할에 그친 수호이 설계국의 Su-2가 겪었던 것과 완전히 같았다고 덧붙이고 있었다. 물론 처세술이 좋았던 샤쿠린은 이 보고서를 자신만 읽고 지도자 스탈린에게는 보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