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MS 모리타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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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S Mauret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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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항에 정박한 모리타니아호(엽서그림) 출저 다른 사진(Alamy) 이상하게도 이 그림이나 사진에선 배가 왼쪽으로 기우뚱해보인다.
1907년부터 1934년까지 큐나드 라인에서 운영한 대서양 횡단 정기 여객선이다. 자매선으로는 RMS 루시타니아가 있다. 당대 건조 기술로써는 상당히 거대한 크기여서 메머드선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여객선으로써는 가장 오랜 기간 블루리본 기록을 보유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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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S 카이저 빌헬름 데 그로세.
1897년 5월 독일에서 대서양 정기 여객선 SS 카이저 빌헬름 데 그로세(SS Kaiser Wilhelm der Grosse)가 건조되었는데, 이 배는 전장 200 m에 총 톤수 14,349 GRT로 그 당시 19세기 세계에서 가장 큰 배면서 22.5노트의 속도로 대서양을 횡단하여 이전에 큐나드 라인의 캄파니아 호와 루카니아호가 가지고 있던 블루리본을 빼앗아 갔다.
이 배를 필두로 약 10여년 간 독일의 대형 여객선들이 대서양을 지배했는데, 독일은 소위 카이저급이라 불리는 굴뚝 네개 짜리 대형 정기 여객선을 3척이나 더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독일 해운사의 성장과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거부 J. P. 모건이 보유한 국제 상선사(International Mercantile Marine Co.)가 큐나드 라인의 국내 라이벌이던 화이트 스타 라인을 인수하면서 큐나드 라인은 해운 경쟁에서 점차 밀릴 위기에 처해 있었다. 또한 세계 최대의 해운국이던 영국이 각종 기록에서 라이벌 국가 독일에게 밀린다는 건 국가 자존심에도 큰 상처를 입히는 문제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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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타니아의 진수식. 1906년 9월 20일.
큐나드 라인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전의 선박들보다 훨씬 크고 빠른 여객선의 건조를 기획했고 이 회사가 영국의 국책 해운사였던 만큼 영국 정부가 여객선의 건조를 적극 지원했다. 이에 따라 1902년 큐나드 라인과 영국 정부는 '모리타니아', '루시타니아'로 이름 붙힐 대형 여객선 두척을 건조하는데 합의했다.
정부는 두 배가 세계에서 가장 큰 배가 될 것, 그리고 무엇보다 최소한 24노트의 속력을 낼 것을 조건으로 달았고, 큐나드 라인에 연리 2.75%로 260만파운드(2015년 현재 2억 5200만 파운드)를 대출해 주었다. 배의 설계는 레오나드 페스켓(Leonard Peskett)이 맡았고 1904년부터 위검 리차드슨 사(Wigham Richardson)와 스완 헌터 사(Swan Hunter)에 의해 건조가 시작되었다.
↑ 1907년 11월 23일 처녀항해 후 뉴욕항에 입항한 모리타니아 호. 선수의 페인트가 엄청나게 벗겨진 것이 보인다.
처녀항해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항해 내내 거친 파도에 시달렸고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빠르고 강한 배라도 속도를 낼 수 없어 처녀항해 때 기록을 경신한다는 시도는 실패했다.[3] 하지만 영국으로 복귀할 때는 바다가 잔잔했고 모리타니아는 자신의 성능을 최대로 발휘한 끝에 동향 4일 22시간 33분, 평균속도 23.69노트를 기록하며 종전에 자매선 루시타니아가 보유하던 기록을 깨고 블루리본을 획득했다. 2년 뒤인 1909년엔 서향 4일 10시간 51분[4] , 평균속도 26.06노트를 기록해 역시 종전에 루시타니아가 보유하던 기록을 경신했다. 1929년 독일의 SS 브레멘의 처녀항해 전까지 이 기록들은 모두 모리타니아에 의해 경신되었기 때문에 모리타니아는 20년 이상 블루리본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70년 가까이 블루리본을 가지고 있는 SS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를 제외하면[5] 가장 오래 블루리본을 보유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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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타니아의 추진부, 동시대의 다른 여객선들이 증기 터빈과 전통적인 왕복 기관을 혼합해 기관부를 구성했던 반면, 모리타니아와 루시타니아는 4개의 스크류 모두가 증기 터빈과 연결되어 있었다. 때문에 두 선박 모두 운영기간 내내 진동 문제에 시달렸다.
모리타니아는 자매선 루시타니아보다 1.5 m 정도 더 길었기에 건조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선박이었다. 그리고 터빈 날개도 루시타니아보다 더 많아서 약간 더 빨랐다고 한다. 두 배는 당시엔 최신 기술이었던 증기 터빈을 채용했는데 시험항해 때 최대 출력을 내면 배 전체에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진동이 울려퍼졌지만 선미를 강화하고 추진부를 교체하여 진동을 줄였다고 한다. 하지만 진동이 줄긴 했어도 이 문제는 두 배의 운영기간 내내 만성적으로 이어졌는데, 기관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1등실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기관실과 가깝던 3등실 일부는 사람이 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이 증기 터빈을 4개나 장착하여 최대 6만 8천 마력의 출력을 낼 수 있었고 오랜기간 대서양에서 가장 빠른 여객선으로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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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등실 레스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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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등실 라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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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3년 3등실 티켓. 확대 가능
인테리어는 당시에 유행하던 에드워드풍으로 장식되어 있었다.[6] 공공 시설은 28가지의 다양한 고급 목재와 대리석 등으로 꾸며졌고 당시 정기 여객선엔 거의 설치되지 않았던 엘리베이터도 다수 설치되었다.
그러면서도 티켓 값은 나름 적당해서 1913년 3등실 티켓 가격이 17달러였는데 이를 2019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436달러, 우리 돈 48만원 정도이다.
3등실 티켓값이 현재가치로 100만원을 호가하던 화이트 스타 라인의 경쟁선박 RMS 올림픽에 비교하면 확실히 합리적인 가격이었다.[7] 그러면서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는 배였기에 많은 인기를 누렸다. 1913년에는 국왕 조지 5세와 메리 왕비가 이 배를 타고 여행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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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세계대전 말, 기하학적 위장 무늬를 도색한 모리타니아 호.
1914년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모리타니아를 무장상선으로 개조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무장상선이 되기엔 너무 크고 연료도 많이 소모된다는 이유로 철회되고 모리타니아는 다시 민간 운영을 개시했다.
그러다가 1915년 5월 자매선 RMS 루시타니아가 U보트에 의해 격침되고 모리타니아는 이 사건의 영향으로 운항을 중단하고 리버풀에 계류된다. 그러다가 다시 군으로부터 징발 명령을 받았고 갈리폴리 전투에서 병력 수송선으로 운항하였으며, 잠시 병원선으로 쓰이다가 1917년에 본래의 임무로 복귀한다.
전쟁 이후, 폭주하던 대서양 횡단 수요 때문에 언제나 바쁘게 운행되었던 나머지 모리타니아는 개장의 기회를 자꾸 놓치게 되었다. 그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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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S 브레멘
1929년 독일 최대의 해운사 노르도이처 로이트 사(Norddeutscher Lloyd)[8] 에서 전장 286 m, 총 톤수 51,656 GRT의 새로운 대형 여객선 SS 브레멘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당시 신기술이 집합되어 제작된 이 배는 처녀항해에서 22년동안 모리타니아가 보유했었던 블루리본 타이틀을 뺏어간다.
그러자 큐나드 라인는 기관실과 추진부 등을 다시 한번 손보고 모리타니아로 하여금 마지막으로 기록경신에 도전해보도록 했지만, 1929년에 건조된 브레멘은 1906년에 건조된 배와는 여러가지 면에서 차원이 다른 배였고 모리타니아는 결국 마지막 기록 경신에 실패하며 새로운 세대의 여객선들에게 블루리본을 내어주게 된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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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년 퇴역 직전 흰색으로 도색한 모리타니아 호.
대공황 이후 주 고객층이던 중산층의 대서양 횡단 수요가 급감하자 모리타니아는 뉴욕을 출발해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헬리팩스를 목적지로 6일간 항해하는 크루즈선으로 개량되었고 1933년에는 크루즈선이란 걸 표시할 목적으로 선체를 모두 흰색으로 도색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큰 인기는 없었고 낡아가던 배가 조금씩 유지비를 잡아먹기 시작하자 큐나드-화이트 스타 라인[10] 은 1934년 모리타니아 호를 이 배의 라이벌이던 올림픽 호, 마제스틱 호와 함께 예비선으로 돌려 사실상 퇴역시킨다. 이후 1934년 9월 뉴욕에서 사우스햄튼으로의 항해를 끝으로 모리타니아 호는 퇴역한다.
1등실에 있던 고급 가구는 경매로 넘어가 각지로 팔렸고 배는 로시스(Rosyth)라는 스코틀랜드의 작은 도시에 있는 해체업자들에게 매각되었다. 이때 모리타니아에 애착이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배의 스크랩을 반대해 큐나드 라인에 항의문을 보냈으나[11] 큐나드 라인도 결국 기업인지라 이익을 남겨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모리타니아는 1935년 7월 1일 로시스로의 마지막 항해를 했다.
그럼에도 지금도 몇몇 유튜버들은 관련 영상에서 스크랩되지 말았어야 했던 배라고 댓글을 단다.
모리타니아 호의 선장 중 한명이었고, 타이타닉 참사 당시 생존자들을 구출했던 RMS 카르파티아의 선장으로 유명한 아서 로스트론 경(Sir Arthur Rostron)이 사우스햄튼을 찾아와 이 마지막 출항를 지켜봤다. 항해 도중 이 배가 건조되었던 타인 강 하구의 조선소 앞바다에서 잠시 쉬었고 뉴캐슬 시의 많은 시민들이 강변에 몰려와 이 배에 작별인사를 하였으며 모리타니아 호에선 이에 대한 화답으로 탑재하고 있던 비상 신호용 로켓을 전량 쏘아 터뜨려 불꽃놀이를 연출하였다.
배가 운항을 재개하여 앰블(Amble)이라는 작은 항구도시를 지나고 있을 땐 시 의회에서 모리타니아 호에 '여전히 바다에서 가장 멋진 배[12] ' 라는 전보를 보냈고 모리타니아 호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친절하고 가장 북단에 위치한 항구도시에 감사를 드립니다'[13] 라고 화답했다. 배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남긴 뒤 1935년 7월 4일 로시스에 도착했고 곧바로 한때 경쟁자였던 RMS 올림픽과 같이 스크랩 처리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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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S Mauretania II'''
1939 ~ 1965년 까지 런던항[14] [15] 에서 뉴욕항을 오가던 정기 여객선이다 RMS 퀸 엘리자베스와 매우 비슷하다
'''제원'''
'''RMS Mauretania'''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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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항에 정박한 모리타니아호(엽서그림) 출저 다른 사진(Alamy) 이상하게도 이 그림이나 사진에선 배가 왼쪽으로 기우뚱해보인다.
1907년부터 1934년까지 큐나드 라인에서 운영한 대서양 횡단 정기 여객선이다. 자매선으로는 RMS 루시타니아가 있다. 당대 건조 기술로써는 상당히 거대한 크기여서 메머드선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여객선으로써는 가장 오랜 기간 블루리본 기록을 보유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2. 함생과 특징
2.1. 건조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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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S 카이저 빌헬름 데 그로세.
1897년 5월 독일에서 대서양 정기 여객선 SS 카이저 빌헬름 데 그로세(SS Kaiser Wilhelm der Grosse)가 건조되었는데, 이 배는 전장 200 m에 총 톤수 14,349 GRT로 그 당시 19세기 세계에서 가장 큰 배면서 22.5노트의 속도로 대서양을 횡단하여 이전에 큐나드 라인의 캄파니아 호와 루카니아호가 가지고 있던 블루리본을 빼앗아 갔다.
이 배를 필두로 약 10여년 간 독일의 대형 여객선들이 대서양을 지배했는데, 독일은 소위 카이저급이라 불리는 굴뚝 네개 짜리 대형 정기 여객선을 3척이나 더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독일 해운사의 성장과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거부 J. P. 모건이 보유한 국제 상선사(International Mercantile Marine Co.)가 큐나드 라인의 국내 라이벌이던 화이트 스타 라인을 인수하면서 큐나드 라인은 해운 경쟁에서 점차 밀릴 위기에 처해 있었다. 또한 세계 최대의 해운국이던 영국이 각종 기록에서 라이벌 국가 독일에게 밀린다는 건 국가 자존심에도 큰 상처를 입히는 문제였다.[1]
2.2. 건조와 처녀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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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타니아의 진수식. 1906년 9월 20일.
큐나드 라인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전의 선박들보다 훨씬 크고 빠른 여객선의 건조를 기획했고 이 회사가 영국의 국책 해운사였던 만큼 영국 정부가 여객선의 건조를 적극 지원했다. 이에 따라 1902년 큐나드 라인과 영국 정부는 '모리타니아', '루시타니아'로 이름 붙힐 대형 여객선 두척을 건조하는데 합의했다.
정부는 두 배가 세계에서 가장 큰 배가 될 것, 그리고 무엇보다 최소한 24노트의 속력을 낼 것을 조건으로 달았고, 큐나드 라인에 연리 2.75%로 260만파운드(2015년 현재 2억 5200만 파운드)를 대출해 주었다. 배의 설계는 레오나드 페스켓(Leonard Peskett)이 맡았고 1904년부터 위검 리차드슨 사(Wigham Richardson)와 스완 헌터 사(Swan Hunter)에 의해 건조가 시작되었다.
모리타니아 호는 1906년 9월 진수되었고[2] 1907년 11월 16일 리버풀을 출항하여 뉴욕으로 향하는 처녀 항해를 했다.
[image]↑ 1907년 11월 23일 처녀항해 후 뉴욕항에 입항한 모리타니아 호. 선수의 페인트가 엄청나게 벗겨진 것이 보인다.
처녀항해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항해 내내 거친 파도에 시달렸고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빠르고 강한 배라도 속도를 낼 수 없어 처녀항해 때 기록을 경신한다는 시도는 실패했다.[3] 하지만 영국으로 복귀할 때는 바다가 잔잔했고 모리타니아는 자신의 성능을 최대로 발휘한 끝에 동향 4일 22시간 33분, 평균속도 23.69노트를 기록하며 종전에 자매선 루시타니아가 보유하던 기록을 깨고 블루리본을 획득했다. 2년 뒤인 1909년엔 서향 4일 10시간 51분[4] , 평균속도 26.06노트를 기록해 역시 종전에 루시타니아가 보유하던 기록을 경신했다. 1929년 독일의 SS 브레멘의 처녀항해 전까지 이 기록들은 모두 모리타니아에 의해 경신되었기 때문에 모리타니아는 20년 이상 블루리본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70년 가까이 블루리본을 가지고 있는 SS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를 제외하면[5] 가장 오래 블루리본을 보유한 기록이다.
2.3. 특징과 운영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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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타니아의 추진부, 동시대의 다른 여객선들이 증기 터빈과 전통적인 왕복 기관을 혼합해 기관부를 구성했던 반면, 모리타니아와 루시타니아는 4개의 스크류 모두가 증기 터빈과 연결되어 있었다. 때문에 두 선박 모두 운영기간 내내 진동 문제에 시달렸다.
모리타니아는 자매선 루시타니아보다 1.5 m 정도 더 길었기에 건조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선박이었다. 그리고 터빈 날개도 루시타니아보다 더 많아서 약간 더 빨랐다고 한다. 두 배는 당시엔 최신 기술이었던 증기 터빈을 채용했는데 시험항해 때 최대 출력을 내면 배 전체에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진동이 울려퍼졌지만 선미를 강화하고 추진부를 교체하여 진동을 줄였다고 한다. 하지만 진동이 줄긴 했어도 이 문제는 두 배의 운영기간 내내 만성적으로 이어졌는데, 기관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1등실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기관실과 가깝던 3등실 일부는 사람이 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이 증기 터빈을 4개나 장착하여 최대 6만 8천 마력의 출력을 낼 수 있었고 오랜기간 대서양에서 가장 빠른 여객선으로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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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등실 레스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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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등실 라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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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3년 3등실 티켓. 확대 가능
인테리어는 당시에 유행하던 에드워드풍으로 장식되어 있었다.[6] 공공 시설은 28가지의 다양한 고급 목재와 대리석 등으로 꾸며졌고 당시 정기 여객선엔 거의 설치되지 않았던 엘리베이터도 다수 설치되었다.
그러면서도 티켓 값은 나름 적당해서 1913년 3등실 티켓 가격이 17달러였는데 이를 2019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436달러, 우리 돈 48만원 정도이다.
3등실 티켓값이 현재가치로 100만원을 호가하던 화이트 스타 라인의 경쟁선박 RMS 올림픽에 비교하면 확실히 합리적인 가격이었다.[7] 그러면서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는 배였기에 많은 인기를 누렸다. 1913년에는 국왕 조지 5세와 메리 왕비가 이 배를 타고 여행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2.4. 1차 세계대전과 전후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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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세계대전 말, 기하학적 위장 무늬를 도색한 모리타니아 호.
1914년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모리타니아를 무장상선으로 개조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무장상선이 되기엔 너무 크고 연료도 많이 소모된다는 이유로 철회되고 모리타니아는 다시 민간 운영을 개시했다.
그러다가 1915년 5월 자매선 RMS 루시타니아가 U보트에 의해 격침되고 모리타니아는 이 사건의 영향으로 운항을 중단하고 리버풀에 계류된다. 그러다가 다시 군으로부터 징발 명령을 받았고 갈리폴리 전투에서 병력 수송선으로 운항하였으며, 잠시 병원선으로 쓰이다가 1917년에 본래의 임무로 복귀한다.
전쟁 이후, 폭주하던 대서양 횡단 수요 때문에 언제나 바쁘게 운행되었던 나머지 모리타니아는 개장의 기회를 자꾸 놓치게 되었다. 그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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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S 브레멘
1929년 독일 최대의 해운사 노르도이처 로이트 사(Norddeutscher Lloyd)[8] 에서 전장 286 m, 총 톤수 51,656 GRT의 새로운 대형 여객선 SS 브레멘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당시 신기술이 집합되어 제작된 이 배는 처녀항해에서 22년동안 모리타니아가 보유했었던 블루리본 타이틀을 뺏어간다.
그러자 큐나드 라인는 기관실과 추진부 등을 다시 한번 손보고 모리타니아로 하여금 마지막으로 기록경신에 도전해보도록 했지만, 1929년에 건조된 브레멘은 1906년에 건조된 배와는 여러가지 면에서 차원이 다른 배였고 모리타니아는 결국 마지막 기록 경신에 실패하며 새로운 세대의 여객선들에게 블루리본을 내어주게 된다. [9]
2.5. 퇴역과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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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년 퇴역 직전 흰색으로 도색한 모리타니아 호.
대공황 이후 주 고객층이던 중산층의 대서양 횡단 수요가 급감하자 모리타니아는 뉴욕을 출발해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헬리팩스를 목적지로 6일간 항해하는 크루즈선으로 개량되었고 1933년에는 크루즈선이란 걸 표시할 목적으로 선체를 모두 흰색으로 도색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큰 인기는 없었고 낡아가던 배가 조금씩 유지비를 잡아먹기 시작하자 큐나드-화이트 스타 라인[10] 은 1934년 모리타니아 호를 이 배의 라이벌이던 올림픽 호, 마제스틱 호와 함께 예비선으로 돌려 사실상 퇴역시킨다. 이후 1934년 9월 뉴욕에서 사우스햄튼으로의 항해를 끝으로 모리타니아 호는 퇴역한다.
1등실에 있던 고급 가구는 경매로 넘어가 각지로 팔렸고 배는 로시스(Rosyth)라는 스코틀랜드의 작은 도시에 있는 해체업자들에게 매각되었다. 이때 모리타니아에 애착이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배의 스크랩을 반대해 큐나드 라인에 항의문을 보냈으나[11] 큐나드 라인도 결국 기업인지라 이익을 남겨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모리타니아는 1935년 7월 1일 로시스로의 마지막 항해를 했다.
그럼에도 지금도 몇몇 유튜버들은 관련 영상에서 스크랩되지 말았어야 했던 배라고 댓글을 단다.
모리타니아 호의 선장 중 한명이었고, 타이타닉 참사 당시 생존자들을 구출했던 RMS 카르파티아의 선장으로 유명한 아서 로스트론 경(Sir Arthur Rostron)이 사우스햄튼을 찾아와 이 마지막 출항를 지켜봤다. 항해 도중 이 배가 건조되었던 타인 강 하구의 조선소 앞바다에서 잠시 쉬었고 뉴캐슬 시의 많은 시민들이 강변에 몰려와 이 배에 작별인사를 하였으며 모리타니아 호에선 이에 대한 화답으로 탑재하고 있던 비상 신호용 로켓을 전량 쏘아 터뜨려 불꽃놀이를 연출하였다.
배가 운항을 재개하여 앰블(Amble)이라는 작은 항구도시를 지나고 있을 땐 시 의회에서 모리타니아 호에 '여전히 바다에서 가장 멋진 배[12] ' 라는 전보를 보냈고 모리타니아 호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친절하고 가장 북단에 위치한 항구도시에 감사를 드립니다'[13] 라고 화답했다. 배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남긴 뒤 1935년 7월 4일 로시스에 도착했고 곧바로 한때 경쟁자였던 RMS 올림픽과 같이 스크랩 처리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3. 제원
- 진수: 1906년 9월 20일
- 취역: 1907년 11월 23일
- 퇴역: 1934년 9월
- 전장: 790피트 (240.8M)
- 만재 배수량: 31, 398톤
- 갑판: 8층
- 승객: 1,138명
- 승무원: 802명
4. RMS Mauretania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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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S Mauretania II'''
1939 ~ 1965년 까지 런던항[14] [15] 에서 뉴욕항을 오가던 정기 여객선이다 RMS 퀸 엘리자베스와 매우 비슷하다
'''제원'''
- 진수: 1937년 5월 24일
- 처녀 향해: 1939년 6월 17일
- 퇴역: 1965년 Tsoh W Ward 조선소에서 해체
- 전장: 235m[16]
5. 관련 문서
[1] 여기서 이해가 잘 안된다면 훗날 1960년대 영국/프랑스 합작으로 만든 콩코드에 자극을 받아 소련이 Tu-144를 만들고, 미국도 보잉 2707 프로젝트에 지원하여 초음속 여객기 경쟁이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된다. 해당 나라의 최첨단 기술인 항공 우주 기술이 집약된 현재의 여객기처럼, 당시는 거대 여객선을 해당 나라의 기술력이 집약되어 그 위상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진 것이다.[2] 록스버러 공작부인 앤(Anne Innes-Ker, Duchess of Roxburghe)이 명명식을 거행했다.[3] 어찌나 파도에 시달렸는지 배가 뉴욕에 입항했을 땐 선수 우현의 새로 칠한 페인트가 엄청나게 벗겨져 있었다.[4] 기록 측정 종착지는 뉴욕 앞바다에 떠 있는 앰브로스 등대(Ambrose Light)[5] 대서양 정기여객선 시장이 완전히 몰락하면서 더 이상 기록을 깰 경쟁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최후의 블루리본 타이틀의 선박으로 기록되고 있다.[6] 1906년 당시 국왕이 빅토리아 여왕의 뒤를 이어 9년간 재위한 에드워드 7세였다.[7] 이는 화이트 스타 라인이 속도를 중시한 큐나드와 달리 안락하고 편안한 여행을 추구했던 것도 있다. 물론 1, 2등실보다는 열악했지만, 다른 배들에 비해서 비교적 상당히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다른 배들은 아예 식당이 없거나 다 같이 방을 써야 되는 경우도 많았다. 올림픽호의 자매선인 타이타닉의 생존자 중에는 타이타닉 호의 거주 환경이 자신들이 살던 집보다 훨씬 나았다는 증언을 한 3등실 승객도 있었다.[8] 현재의 하파크로이트 사의 전신, 큐나드로 하여금 모리타니아와 루시타니아를 건조하게 만든 4척의 카이저급 여객선도 이 해운사에서 운영했었다.[9] 블루리본은 잠시 독일의 두 대형선 SS 브레멘과 SS 오이로파가 나누어 가졌고 이 상황을 좌시할 수 없던 큐나드 라인은 새로운 초대형 여객선을 기획하게 되는데, 그 배가 RMS 퀸 엘리자베스와 RMS 퀸 메리였다.[10] 두 회사는 오랜 기간 숙명의 라이벌이었으나 화이트스타 라인은 대공황을 견디지 못했고 영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1934년 큐나드 라인은 화이트스타 라인을 인수해 회사명을 저렇게 바꾼다. 이때 큐나드 라인은 화이트스타 라인이 보유 중이던 선박들도 인수한다.[11] 그들 중엔 무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있었다고 한다.즉,미국의 대통령도 반대한 것이다![12] Still the finest ship on the seas.[13] to the last and kindliest port in England, greetings and thanks.[14] 모항은 리버풀 [15] 런던에 있는 항구이다 [16] RMS 모리타니아 I 보다 더 작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