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에키
1. 개요
改易(개역). 사무라이가 막부에게 영지 및 재산을 몰수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로마치 막부 때는 슈고 다이묘를 해임하는 의미로 쓰였고, 에도 막부에서는 영지 몰수의 의미로 쓰였다.
주로 아래와 같은 이유로 영지가 몰수되었다.
- 자손(양자 포함)이 없어 가문이 단절되는 경우: 양자가 아닌 친자가 있어도 막부에 후계자를 등록하지 않으면 후계자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영지를 몰수했다.
- 막부에 반대하는 정적 제거: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 이후 대량으로 발생했다.
- 무가제법도 위반: 무사들이 지켜야 할 법으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반포한 규정
- 살인 등의 중죄
- 영지 내의 반란: 시마바라의 난
2. 가이에키에 처해진 주요 다이묘들
- 가토 타다히로: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 도요토미 정권에 대한 아버지의 충성심 탓에 가토 가문은 아들인 타다히로 대에 다이묘 가문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 도요토미 히데요리
- 아사노 나가노리(浅野長矩): 추신구라 참조.
- 우키다 히데이에
- 쵸소카베 모리치카
- 카스야 타케노리
- 하야시 타다타카(林忠崇): 일본 역사상 최후에 가이에키된 다이묘. 무진전쟁 때 신정부군과 싸우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번인 조자이 번을 버리고 번의 부하들과 같이 싸웠다.[1] 1941년까지 장수(92세)하면서 당대 생존한 마지막 다이묘로도 남게 되어 기자들의 취재에도 응했다.[2] 참고로 토탈 워: 쇼군2의 DLC 사무라이의 몰락에도 나온다.
- 후쿠시마 마사노리
[1] 번에 속해 있는 사무라이가 탈번(자신의 번을 버리고 떠남)하면 사형에 처해지지만 이 경우는 다이묘가 탈번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인 데다가 막부 말 혼란기라서 가이에키로 끝났다. 게다가 가이에키 처분도 막부가 내린 게 아니라 메이지 신정부가 내렸다.[2] 사망년도에서 볼 수 있듯이 말년에는 아파트 같은 현대 문물까지 경험하게 된다. 이 사람이 죽은 장소도 둘째딸의 아파트. 덕분에 아파트에 거주해본 처음이자 마지막 다이묘라는 진기록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