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구라
忠臣藏(충신장).
1. 개요
일본 에도 시대에 벌어진 무사들의 복수 학살극을 모티브로 한 닌교죠루리(인형극)와 가부키 작품의 제목. 1748년 출간된 인형극 각본 仮名手本'''忠臣蔵'''(가나데혼추신구라)의 통칭이다.
모티브가 된 사건은 한국에서는 그냥 추신구라라고 불리지만 정식 명칭은 아코 사건(赤穂事件)으로, 이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인 추신구라와는 구분된다. 이 아코 사건은 에도 시대 사상가들 역시 여러 차례 사건의 본질을 논했을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다. 현대 일본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사건으로 여러 차례 영화나 드라마 등으로 만들어졌다.
눈 오는 날 복수의 신호로 오이시가 작은 북을 두드리는 장면이 유명하고, 이게 추신구라 하면 떠오르는 아이콘처럼 자리잡았다. 실제로는 인형극, 가부키상에서 각색된 것이며 실제 모티브가 된 사건에는 북을 두드렸다느니 하는 기록이 없다.
2. 사건
2.1. 아코 사건
추신구라의 배경이 된 아코 사건은 1701년 4월 21일(겐로쿠 14년 3월 14일)에 일어난 일이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고베시(神戸) 지역인 아코번(赤穂藩)[1] 의 영주인 아사노 나가노리(淺野長矩)[2] 는 도쿠가와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 성에서 천황의 조정이 보내오는 칙사를 맞이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당시 교토에 있었던 천황과 조정은 실권은 전혀 없다시피한 존재였지만 형식상으로는 일본의 최고위 통치기관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신의 자손에게서 인정받은 일본의 통치자'라는 정통성을 막부가 계속해서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 천황과의 의전관계가 매우 중요했다[3] . 이 임무는 최대 10만 석 이하, 평균 3~5만 석의 영지를 가진 소다이묘들에게 맡겨진 임무였는데, 접대비용을 모두 자기가 부담해야 하는 등 제반비용이 워낙 많이 들어서 다들 기피하고 있던 직무였다. 아사노 나가노리가 이 직무를 맡게 된 것은 소금 판매로 인한 재정개혁이 성공해서 어느 정도 살림이 편 상태였던 데다 이전에도 칙사 접대역을 맡았기 때문에 칙사를 접대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점도 참작되었다.
그런데 막부에서 의전을 담당하는 집안인 고케(高家)의 키라 요시히사(吉良義央)[4] 는 아사노에게 사신을 대하는 격식에 대해서 나무랐고 이에 격분한 아사노는 '''칙사가 근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칼을 빼들고 휘둘러 키라 요시히사를 다치게 하는''' 엄청난 사고를 쳤다. 쇼군이 거주하는 에도 성 혼마루에서 칼을 뽑은 것만 해도 이미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는데 그에 더해 천황의 칙사를 영접하는 중요한 자리를 망친데다 상관을 다치게까지 했으니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5]
2.2. 아사노의 할복
아사노는 즉각 체포되어 에도성 바깥으로 압송되었고, 이와누마 번 영주인 타무라 타츠아키의 저택으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은 후, 당일중에 할복명령이 떨어졌다. 아사노는 타무라 가 저택의 마당[6] 에서 할복, 아코 번은 개역(영지 몰수)되었고 그 휘하의 무사들은 로닌(낭인)[7] 으로 떨어져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개역된 아코 번은 임시로 인접 번주 타츠노 번의 와키자카 야스테루[8] 와 빗추 아시모리 번의 키노시타 킨사다가 임시로 관리하다가 다음 해 시모츠케 카라스야마 번주였던 나가이 나오히로가 전봉해 번주를 맡게 되었다.
막부의 명령을 받은 와키자카 야스테루는 아사노 가의 가신들이 거세게 반항할 줄 알고 중무장을 하고 접수하러 왔으나 가신필두였던 오이시 요시오(大石良雄, 요시타카라는 설도 있다)[9] 는 막부에 저항하는 것은 주군의 원수를 갚기는커녕 무의미하게 죽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순순히 와키자카에게 성을 명도했다.
2.3. 와신상담
낭인으로 전락한 무사들은 막부의 조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막부가 이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키라와 같은 다이묘는 자택의 호위병력도 상당하다. 그래서 가신들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오이시 요시오는 아예 기생집에서 주색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감시의 눈을 피했고,[10] 다른 가신들은 에도에 올라와서 쌀집이나 혹은 다른 잡일들을 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이러는 동안 그들은 키라의 자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주군 아사노의 미망인으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각종 무기를 사들이면서 복수를 계획했다.
2.4. 복수
1년 뒤인 1703년 1월 30일(겐로쿠 15년 12월 14일) 밤, 오이시 요시오(쿠라노스케)를 중심으로 아코 번 출신의 낭인 46명, 혹은 47명[11] 이 키라 요시히사의 저택을 습격, 주군의 복수를 명분으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저택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버렸다.[12] 키라도 저항 끝에 이들에게 사로잡혔고 할복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 이들은 키라를 죽인 뒤 목을 아사노의 묘지에 가져갔다.[13]
연행된 사무라이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는데, 쇼군이 용서해준다면 자기 휘하로 받아들이겠다고 나선 다이묘들이 자기 돈으로 먹이고 재웠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나가와(品川)의 센카쿠지(泉岳寺)에서 처분을 기다렸다. 막부는 사건 처리를 놓고 여러 모로 고민했으나 결국 할복을 명령했고, 46명 모두 여러 다이묘의 저택에서 할복, 정확히는 할복 형식의 참수형을 당해 센카쿠지에 묻히게 된다. 모리 가에서 10명이 할복할 당시의 기록이 남았는데, 한 명은 카이샤쿠에게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며 차분하게 죽음을 맞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또 한 명은 진짜로 할복을 했다고. 나머지 8명은 막부측에서 배를 가르라고 칼도 줬지만 못 한 걸 보면 그냥 참수한 뒤 할복으로 보고했을 것이다.
이들은 뭇 백성들의 동정을 샀고, 이에 막부는 아사노의 동생[14] 에게 500석의 하타모토 직위를 하사했다.[15] 낭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무사 지위를 박탈했다거나 가족이 굶어죽었다는 등의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당사자가 할복하는 대신 가족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3. 역사적인 해석과 의의
이 유명한 이야기는 파고들면 그리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에도 시대 내내 이 사건을 둘러싼 철학적 논의가 벌어졌다. 이 사건은 에도 막부의 정체성과 그 시대의 사무라이들이 갖고 있는 본질성, 양자에 내재된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무사도' vs '법치'의 양대 문제의 충돌이 발생한 사건. 당시 일본은 200년에 이르는 전국시대가 끝나고 도쿠가와 막부가 자리잡은 후, 전국시대의 유산인 광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무사도를 폐기하고 막부가 주도하는 관료제 사회로 이행하는 시기였다. 알다시피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 역사상 가장 긴 평화시대를 열었던 정부다.[16] 따라서 막부 입장에서는 사소한 충돌로 칼부림하고 사적인 복수를 미덕으로 찬양하는 전시대의 무사도를 용납할 수 없었고,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전국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각 번들의 사적인 무력을 축소하고 막부를 절대 권력기관으로 군림시키려고 했다. 당연히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이러니 이 사건은 막부가 어떤 방식으로 처리했어도 커다란 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복수를 결행한 46명의 낭인 본인들조차 복수 여부를 둘러싸고 2년여에 걸쳐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을 정도이다.
- 발단이 된 아사노의 칼부림 사건이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는 설이 있다. 세간에 알려지기로는 아사노가 키라에게 칼부림을 하게 된 것이 아사노가 키라에게 격식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키라에게 모욕을 들어서라고 하지만 이미 두 사람은 이전부터 원한 관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사노 가문이 독자적으로 개량한 아코 소금을 팔면서부터 키라 가문과 갈등이 생겨났다. 아사노 가문은 아코 소금을 팔기 위해 가장 큰 시장인 에도를 개척하려 했고 선전을 위해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에게 소금을 상납했다. 이게 소문이 퍼지면서 에도에서 아코 소금의 판매가 늘어났다. 문제는 그간 에도는 키라 가문의 소금이 독점하던 상황이었던 터라 두 가문이 소금 판매를 두고 서로 앙금이 깊어졌다는 것이다.[19]
- 사건 발생에 원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역시 저 위의 사건 전개 과정에 설명된 내용, 즉, 칙사 접대 과정 중에 일어난 다툼이라는 것. 그런데 웃긴 건 칙사 접대역을 교육하는 코케들에게 적당한 사례금[20] 을 주는 것이 관습적으로 인정되고 있었고, 덤으로 에도 주재 수석가로의 의견도 사례금을 두둑히 주어 가뜩이나 사이가 안 좋은 판에 예식 교육역이라는 직책까지 받은 키라의 심기를 달래자는 것이었는데 정작 주군이라는 사람은 사례금을 주자는 의견을 깔아뭉개고 간단한 과자만 선물로 보낸 것.
이런 사례[21] 를 보면 소금이니 사례금이니 하는 이유는 쓸데없이 복잡한 것. 그 당시 사무라이의 사고방식이란 '자신이 느끼기에 모욕이면 각오하고 칼을 뽑아야 한다'는 것으로, 그 세세한 이유가 타당한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사람들 역시 아사노가 칼을 뽑은 이유에 대해 그렇게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문제의 원인을 파악해 해결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았다.마에다 토시이에의 손자 마에다 히고가 친구들과 다리를 건너던 도중 반대쪽에서 무라세와 사카베라는 두 사무라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히고와 사카베의 칼집이 서로 부딪치자 마에다 히고는 즉시 부채로 사카베의 어깨를 쳤고 사카베는 즉시 칼을 뽑았다. 무라세와 사카베는 현장에서 살해당하고, 사건을 전해들은 무라세의 부친 무라세 규우에몬이 현장으로 돌진, 히고의 가신 두 명을 죽이고 자신도 살해당했다. 사카베의 부친 사카베 지로베이도 현장에 난입했으나 '구경꾼이 너무 많아' 싸움에 끼어들지 못했는데, 이를 부끄러워하여 머리를 깎고 출가해버렸다.
영주였던 마에다 가문은 보고를 받고 양쪽 모두 처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냥 시비 붙어 싸운 거라 처형하자면 자기 가문 사람도 할복을 시켜야 하는 판이니… 마에다 히고는 죽는 날까지 복수를 두려워했다고 전한다.
오히려 대부분은 ''성 안임을 감수하고 칼까지 뽑았는데 키라를 죽이지 못 한 아사노가 무능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아사노가 칼을 뽑은 것은 이유야 어찌 됐든 사무라이로서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공법에 저촉되니 결과는 할복 외에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칼을 뽑았으면 상대를 죽였어야 했는데 죽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끝났으니 무사로서 민망하다'는 논리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아사노의 할복 자체는 그렇게 동정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만 다이묘로서의 품위를 지켜 실내에서 자결시켜 주지 않고 땅바닥에 거적 깔고 자결하게 한 막부의 처벌 방식에 대해서는 반대가 많았다.
- 진짜 문제는 할복 자체가 아니라 할복을 둘러싸고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사건 처리가 잘못되면서 사건의 규모가 확대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츠나요시보다도 소바요닌이던 야나기사와의 책임이 더 크다는 의견이 주류다. 전국시대의 사무라이 풍격을 가졌다는 아사노 나가노리가 살림이 좀 폈다면서 설치는 꼴을 문치주의 일변도의 츠나요시가 못마땅히 여겼고, 그 기분을 살핀 야나기사와가 접대역의 교육을 맡은 키라 요시히사를 충동질해 아사노를 필요 이상으로 갈군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때의 야나기사와의 행동으로 가부키나 기타 창작물에서 야나기사와가 추신구라의 흑막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반대로 단순하게 생각해서 츠나요시가 너무 열이 받아 앞뒤 생각 없이 행동했다는 견해도 있다.
다음으로 지적된 논란 중에 키라는 왜 벌을 받지 않았냐는 것이 있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키라가 원인 제공자일 가능성이 있는데 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당대인들의 사고방식이 아니었다. 당대인들의 방식에 따르면 아사노가 할복을 했다면 상대방인 키라도 할복을 해야 한다. 왜냐면 전국시대 무렵 형성된 사무라이의 관습법은 ''싸움을 한 사무라이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당사자들 모두에게 동일한 처분을 내린다''였기 때문. 이것을 겐카료세바이(喧嘩両成敗)라고 하는데,[22] 전국시대에 군령을 통일하고 같은 세력내의 다툼을 억제하기 위해 각국 다이묘들이 도입한 뒤 '천하의 법도'라고 불릴 정도로 확고히 정착된 원칙이었다. 이 원칙 덕에 당대 사무라이들에게 '이유는 중요치 않다, 참을 수 있는 정도인가 없는 정도인가의 문제', '명예를 위해선 자신의 죽음도 각오하고 벤다'는 사고방식이 굳어지게 된 것.
따라서 이유를 불문하고 싸움의 쌍방 당사자인 아사노와 키라의 처분이 다르다는 것은 당대 모든 사무라이 계급의 반발을 불러왔다. 키라는 현대 시점에서 볼 때야 칼침 맞은 피해자이지만, 이 당시 논리에 따르면 범인인 아사노와 똑같이 할복해야 한다는 것. 그런 관점에서 보면 도쿠가와 츠나요시는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인 셈이다.
실제로 막부가 키라는 무죄, 아사노는 할복이라는 처결을 내린 가장 큰 이유는 키라가 칼자루에 손조차 대지 않은 채 아사노가 휘두른 칼에 일방적으로 베였다는 것이었다. 키라는 아사노가 휘두른 칼에 이마를 베인 뒤 돌아서서 도망쳤고 아사노는 이를 쫓아가며 칼을 휘둘렀는데, 무사도의 관점에서 보자면 '적(아사노)'을 앞에 두고 등을 보인 키라는 할복조차 아까운 비겁자, 무사라는 직함이 아까운 겁쟁이였지만 막부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막부가 내린 에도성 내의 사적인 칼부림 금지령을 끝까지 지킨 충신이었던 셈이다. 처벌할 이유가 없었다.
다음으로 문제가 된 것은 영지 몰수. 사실 에도 시대에는 이 문제는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논의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내재된 명예, 공법, 도리 등의 추상적이고 철학적이며 거시적인 문제와는 달리 영지 문제는 지나치게 형이하학적인 생계 문제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여러 사람의 생계'가 걸린 문제로서 실제로는 사건에 큰 영향을 끼쳤다.[23] 심지어 영지 몰수와 가문 단절이라는 엄벌이 없었다면 추신구라 사건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남겨진 편지 기록에 따르면 추신구라 이야기의 주인공 쿠라노스케, 즉, 가로(家老) 오이시 요시오는 '영지를 돌려받고 죽은 아사노의 동생이 가문을 잇게만 해준다면 가문의 명예를 지킬 수 있게 되니 만사가 해결된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일단 아코의 가신들이 영지를 잃어 낭인이 되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아코 번의 가신들은 둘로 견해가 나뉘었다. 오이시 요시오 등의 온건파는 위에 언급한 대로 영지만 돌려받으면 된다는 입장이었고, 이에 반대하는 측은 "그런 건 필요 없고 무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다.[24] 과격파들이 최초로 주장한 것은 키라 암살이 아니었다. 이들이 처음에 주장한 것은 막부의 몰수에 대항해 아코에서 농성하자는 것. 그러나 2년씩이나 지났음에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다. 이는 오이시 방식의 해결이 불가능함을 의미했다. 과격파는 농성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나자 도쿄로 올라가 키라 암살을 목표로 잡았고, 오이시는 과격파들의 견해를 꺾을 수 없었다. 심지어 오이시 요시오는 키라 습격이 기정사실로 정해지자 습격에서 빠지기는 커녕 가로(家老)로서 선두에 나서 지휘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미 이 당시에도 집단의 방침이 정해지면 자기 뜻과는 달라도 무조건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 일본인의 사고방식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아사노의 가신들만의 특수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무라이 계급이라면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도출해낼 수 있는 결론이었다. 실제로 에도의 과격파들이 보낸 서신에 따르면 다이묘부터 하급 사무라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에도 사무라들이 ''아사노 가(家)는 명예를 알기에 주인의 적을 살려두지 않을 가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거나 ''막부가 차후 백만 석(고쿠)을 아사노 가문에 내린다 해도 체면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평판이 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막부조차 아사노 가문의 가신들이 키라에 대한 복수극을 펼칠 것이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이를 어쩔 수 없다 여겨 못본체 방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일을 예상할 수 있었어도 막부로서는 한 번 내린 결정을 되돌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랬다간 자신들의 실수를 자인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권위가 실추되니까. 결국 막부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키라는 아사노와 달리 아무 처분도 받지 않았다: 키라가 뭔가 비슷한 대가를 치뤄야 죽은 아사노 및 아사노 가문의 체면이 선다.
- 막부가 결국 아사노의 동생에게 대를 잇게 해주면 그나마 체면이 설 가능성이 있었다: 막부로서는 한 번 내린 결정을 뒤집으면 오히려 자신들의 체면이 서지 않으므로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 결론: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 가신들이 직접 키라를 죽여 주군과 가문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니까 사무라이의 가치관에 따르면 가신들의 복수는 당연하고 옳은 것. 그러나 어찌 됐든 막부에 반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무라이 계급의 통치자로서 막부는 '키라를 죽여 주군의 원한을 갚은 가신들의 처우를 어떤 식으로 결정해야 현명한 것일까?' 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으로 인해 추신구라가 에도 시대 내내 논란이 되었고, 민간의 전설이 되기까지 한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사건 이후 막부는 아사노 가신들의 사후 처리에 대해서도 골치를 썩일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아사노 사건과 달리 가신들에게 할복을 명한 것은 사건 이후 무려 50여 일이 지난 뒤. 그나마도 그냥 복수만 한 게 아니라 저택의 무고한 남녀노소까지 함께 살해한 죄까지 고려한 결과였다. 막부가 최초에 아사노의 칼부림 사건을 반나절도 안 걸려 처리했던 패기와 비교해보면 쇼군 츠나요시의 병크가 이 사건을 얼마나 큰 규모로 키웠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사건 당시부터 숱한 사상가들의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최종적으로 막부가 받아들인 결론은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의 측근이자 막부의 정치고문이었던 오규 소라이의 견해.
그러니까 이 사건을 '사무라이 계급의 사적 원리'와 '막부의 공법 원리'의 충돌로 보고 공적 권위의 우월성을 주장한 것이다. 사적 보복을 금지하고 초월적인 공적 권위의 존재를 인정한 오규의 관점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진적인 것으로 현대 정치학자들은 오규의 견해를 마키아벨리즘과 상통하는 수준의 정치사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어쨌든 오규의 주장대로 47명이 할복했고, 이러한 오규의 사상은 에도 막부의 논리가 되어 이후의 시대를 지배한다.만약 사론(私論)으로써 공론(公論)을 해치면 차후 천하의 법은 설 수 없다.
하지만 오규의 결론 이후에도 이러한 논리와 해석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사상적 논쟁이 종종 발생했고, 이런 논쟁은 에도 시대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동시대 가장 극단적인 무사도 원리주의자였던 하가쿠레의 저자 야마모토 츠네토모는
…라는 견해를 밝혔다. 한 마디로 이럴 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칼질하고 할복하는 것이 사무라이의 도리라는 것.아사노 공의 사무라이들이 행한 야습은 물론 잘못이다. (왜냐하면 사건 발생 즉시) 즉각적으로 (키라를) 공격한 후에 센가쿠지(泉岳寺)에서 바로 할복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주군의 사후 너무 오래 시간을 끌었다. 키라 공이 그러다 만일 병들어 죽었다면 어쩔 것이었나? 교토 인간[25]
들은 칭찬받을 일을 궁리하는 데는 똑똑하고 재빠르다.
한편 막부 말기~메이지 초기의 계몽사상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다음과 같이 논했다.
상소를 내서 이치와 도리를 따지지 않고 제멋대로 칼부림을 벌여 수십 명이나 죽은 참극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법에 따라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권한인데 일개 낭인 무리들이 그걸 침해한 사건에 대해 칭송하는 사회 분위기를 비판한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손에 죽은 게 키라 한 명이 아니라는 점까지 생각해보면.아코의 의사(義士)라 하여 세상에서 칭송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막부의 판결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면 어째서 상소를 올리지 않았던 것인가? 물론 상소를 올린 자가 되려 처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26]
하지만 그 뒤를 이어 다시 상소를 올리는 식으로 마지막 한 명까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법에 호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막부 또한 사건을 다시 조사했을 테고 무례를 범한 키라에게도 처벌을 내렸을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당한 도리와 이치를 따져서 세상을 바로잡아야 참된 의사(義士)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규 소라이가 이 사건을 '공적 권위와 사적 권위의 문제'라고 해석한 반면, 후쿠자와 유키치는 '법치'라는 관점으로 이 사건을 본 것. 그게 그거 같아보이지만 양자에는 미묘하면서도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오규의 견해는 '권위=공법=막부'로 각각을 동일시했다는 한계가 있지만, 후쿠자와는 권위가 아닌 법률 그 자체를 논하는 동시에 막부 역시 법률에 근거해 판결을 내린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27]
4. 여담
이 사건의 피해자로 볼 수 있는 키라 가문도 결국 가문이 끝장나고 말았다. 키라의 양자[28] 가 키라를 구하지 않고 도망쳤다는 이유로 막부가 유배를 보내버린 것. 양부모를 저버린 죄에 더해 무사의 본분을 다하지 않았다는 명분이 있다 해도 배신도 아니고 도망자일 뿐인데 피해자인 키라 가문을 단절시킨 걸 볼 때 츠나요시가 여론을 의식했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당사자였던 미카와 키라 가문 자체는 이 사건으로 끝장났지만 키라 가문이라는 간판은 방계였던 무사시 키라 가 계열의 분가 마키타 씨가 본가인 키라의 성을 회복하는 것을 허락받아 고케로서 막부 말까지 존속되었다.
일부에서는 추신구라 사건의 흑막을 츠나요시의 미다이도코로(정실부인) 노부코로 보기도 한다. 노부코는 108대 천황 고미즈오의 손녀로 정3품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츠나요시의 생모 케이쇼인은 교토의 하급무사 가문 출신 혹은 야채가게 딸로[29] 품계로만 따지면 노부코가 훨씬 위였다. 그러나 시어머니인 탓에 노부코는 케이쇼인 앞에서 숙여야만 했고 둘 사이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츠나요시가 위에 언급된 대로 무리한 궁정공작으로 생모 케이쇼인에게 정1품의 지위를 내리는 조서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자 노부코는 천황의 손녀인 자신보다 낮은 가문의 케이쇼인이 자신보다도 더 높은 정1품의 지위를 받는 것에 분개해 이를 파토내기 위해 뒤에서 음모를 꾸몄다는 설이다. 노부코는 평소 키라와 사이가 좋지 않던 아사노를 조종해 칼부림 사태를 일으켰고 결국 이 사태로 인해 케이쇼인이 정1품의 지위를 받는 것은 연기되었다.
노부코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과 친밀한 사이였던 고노에 히로코를 통해 아사노의 가신 오이시를 움직여 키라 가문에 복수하도록 부추겼다고 한다. 히로코는 오이시와 인척지간이어서 접촉하는 데 무리가 없다. 히로코가 오이시에게 주군의 원수를 왜 갚지 않느냐고 하자 오이시는 에도에서 무사들이 대규모로 움직이는 게 힘들다고 말했고 이에 히로코는 '''높은 분이 도와주면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는것. 결국 노부코가 배후에서 힘을 쓴 덕에 오이시는 로닌들을 이끌고 키라 가문으로 쳐들어가 사단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노부코가 추신구라를 배후조종한 이유는 이런 사건을 통해 츠나요시의 권위를 실추시켜 츠나요시를 쇼군에서 끌어내려 케이쇼인을 뒷방 늙은이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츠나요시 사후 쇼군을 승계한 이에노부의 정실부인이 바로 고노에 히로코였다.[30] 게다가 이에노부는 아사노 가문을 사면하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결국 노부코가 흑막이지 않겠느냐는 것. 물론 이는 추측성이 강한 주장이다.
이 사건으로 엉뚱하게 우에스기 가도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 요네자와 번주 우에스기 츠나노리는 키라 요시히사의 아들로 우에스기 가에 양자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습격을 받았는데도 구하러 가지 않은 우에스기 츠나노리는 주군의 원한을 갚고 죽음을 당한 번사들과 대비되어 서민 사이에서 우에스기 가의 평판이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사건 당시 츠나노리도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나서려 했지만 막부측의 제지와 가신들의 만류로 실패했던 것을 생각하면 억울한 셈.
콘도 이사미가 상당히 이 이야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훗날 그가 이끌게 되는 신선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5. 창작물에서
워낙 유명한 이야기여서 서양에도 잘 알려졌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도 길게 인용되어 있으며,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제26대 미국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이 이야기를 애독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남미의 대문호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에도 이 사건이 들어가고 있다.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에서도 4번 다루어졌다.
기묘한 이야기 극장판에서는 휴대폰 추신구라(한국 개봉 제목 <사무라이 휴대폰>)라는 제목으로 각색되었다. 현대 일본인이 1700년대로 휴대폰[31] 을 보내 오이시 요시오와 통화한다는 이야기. 오이시 요시오는 자신들의 손으로 복수하기를 꺼리고 막부에 대한 교섭을 통해 주군의 명예와 영지를 되찾으려 했다. 이에 낭인이 된 가신들은 그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가신들의 재촉에 시달리던 어느 날 우연히 주운 휴대폰 너머의 미래인과 대화하게 되고 자신을 위인이라 띄워주며 주군의 복수니 뭐니 하는 대화 상대에게 폼을 잡기 위해 할 생각도 없는 거사 계획을 읊는다. 그걸 하필이면 가신들이 단체로 듣고 감동, 결국 그는 분위기에 휘말려 반강제로 거사 준비를 하게 된다. 감당하기 힘든 기대와 살아남고 싶은 마음이 갈등하고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같이 도망치자고도 해보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현대인에게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남겼는지 물어보려다가 그만두고 휴대폰을 내려놓은뒤 자신의 의지로 결행을 선포한다. 이 통화는 역사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니까 미래에서 역사를 확인하려고 과거로 보낸 전화기가 결과적으로 현재 기록된 역사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기묘한 타임 패러독스. 작업이 끝난 그의 주변에도 수많은 현대인들이 나폴레옹 같은 과거의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을 배경으로 에피소드는 마무리된다.
기동전사 건담 0083 스타더스트 메모리는 데라즈 플리트가 SF급으로 미화된 추신구라다. 지온 공국의 정규군이 한창 전투 중에 자신이 충성하는 지도자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를 등지고''' 후퇴, 후일 적국이었던 연방을 상대로 자살 봉기를 일으키는 플롯이다.
키테레츠 대백과에서도 코로스케가 키테 에이이치가 없을 때마다 심심해하자 추신구라를 모티브로 한 로봇을 만들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여기서는 '충신 창고'로 번역되었다.
하도 유명한 소재라 오리엔탈리즘 좋아하는 서구인들이 대단히 신비로운 떡밥으로 관심을 가진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추신구라를 최고의 이야기라고 극찬했으며 오륜서와 더불어 그의 애독서였다고.
2006년 만들어진 일본 영화 하나(원제:花よりもなほ)에서 메인 사건으로 다뤄지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의 스토리가 이 사건과 교차된다. 추신구라를 미화한 다른 일본 영화와 달리 이 영화에서는 추신구라를 복수자에게도 아무 이득을 주지 못 하고 모두가 공멸하는 어리석은 행위로 묘사한다. 이 영화는 그 동안 사무라이 영화의 클리셰를 뒤집었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고 한국에서도 꽤 호평을 받았다.
에로게로도 제작되었다. 2011년 동인작품으로 나온걸 서클이 기업화하면서 정식으로 발매하는 것이다. 타이틀은 ChuSingura 46+1 -忠臣藏46+1- 기존에 동인작으로 냈던 작품에 오리지널 시나리오에 엔딩까지 집어넣은 완성작. 전투 연출이 너무 격렬한 나머지 저사양에서 안 돌아가는 무서운 미연시가 되었다. 그래서 발매 직후 저사양용 연출 간략화 패치가 나올 정도. 스토리는 기본적으로 추신구라에 타임 슬립 요소,[32] TS[33] 를 섞고 여기에 대체역사[34] 를 끼얹은 물건이다.
악대관 1편에서도 적으로 나오는데, 참고로 여기서 주인공인 대관을 노리는 이유는 '''저택 내놓으라고 냅다 죽여서'''. 사실은 늘 있는 패턴처럼 상인이 대관의 이름을 사칭한 거지만. 참고로 인원수는 대폭 줄어서 '''6명'''.
유명한 이야기이니만큼 당연히(?) 마스다 쿄스케의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의 에피소드로도 각색되었다. 아사노 나가노리가 정체불명의 생물이고 47명의 낭인들 중 두 명이 키라의 집주소를 잘못 알아서 엉뚱한 집에 쳐들어간다는 것만 빼면 의외로 비교적 원전에 충실한 내용이다.
암살교실의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의 이름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성이지만 한자가 미묘하게 다르다. 링크 참조(영어다)
클라이브 오웬, 모건 프리먼 주연의 영화 제7기사단[35] 도 추신구라 설화를 바탕으로 각색해 만들어졌다.
오오쿠(만화)에도 등장한다. 적면포창[36] 이 창궐하는 세계관에 따라 설정이 바뀌었다. 키라 요시히사가 여자(…)라거나 로닌 47명 중 42명만 남자라거나(…). 남자의 수가 부족해 그들의 지위가 점차 낮아지는 상황에서 남자와 여자의 사고관 차이와 미묘한 알력 다툼이 사건의 원인이 된다. 키라가 아사노를 모욕하는 것도 키라가 아사노를 뒷담화하다가 마주치자 살짝 "아코우 촌것"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으로 깨알같이 나타냈다. 역사에 따라 낭인들은 모두 처형(할복)되지만, 그 처벌이 그렇게 큰 논란의 된 이유는 남자만 걸리는 적면포창으로 남성 인구가 여성 대비 1:5, 안정기에도 1:4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귀한 상황에 40명씩이나 되는[37] 남자들을 사형시키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 것으로 재해석된다.
'후츄신구라'[38] 라는 도서가 출판되기도 했다. 여기서는 거사에 참가하지 않았던 나머지 낭인들의 변론이 서술되어있다.
타임보칸 시리즈와 J9 시리즈의 작사 작곡 노래로 유명한 야마모토 마사유키의 오오우소 추신구라. 말 그대로 거짓말이 많으니 재밌게 듣기만 하자(…).
게임으로는 겐키의 액션게임 검호3에 등장한다. '아코낭인편' 또는 '아코의 주군 잃은 무사'라는 이벤트로 나오는데, 중개인으로부터 키라의 저택을 경호하는 의뢰를 받게 된다. 플레이어의 분기에 따라 아사노의 낭인인 호리베 야스베와 진검승부를 벌이게 되는데, 의뢰를 승낙하든 거절하는 키라는 죽는다. 이후 전개는 역사 그대로를 따라가며, 중개인으로부터 아사노의 낭인들과 키라가 어떻게 되었는지, 백성들의 여론은 어떠한지 들을 수 있다.
크레용신짱 스페셜 중 《크레용 대 충신장》이 있다. 여기서는 부리부리자에몽 때문에 '''코끼리(...)'''를 노출해서 풍기문란죄로 할복 당한 카자마가 유령(?)이 되어 나타나 신노스케, 마사오, 보오, 네네를 설득하고 복수를 한다는 이야기.[39]
원피스 와노쿠니편에도 이 이야기가 거의 그대로 차용되었다. 와노쿠니편의 전체적인 모티브는 모모타로 설화지만 와노쿠니의 주요 등장인물인 아카자야 9남자의 이야기는 추신구라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원래 와노쿠니의 주인이었던 코즈키 오뎅이 쇼군 오로치와 카이도에게 살해당하고 오뎅의 억울한 죽음 이후 낭인으로 떠돌던 아카자야 9남자가 다시 뭉쳐 오뎅의 복수를 위해 카이도를 습격하는 스토리로 살짝 각색되어 사용되었다.
국내에는 일본인 작가 모리무라 세이치의 추신구라를 소재로 한 일본 소설이 두 번 출간되었는데, 첫 번째는 1994년 2월 행림출판에서 상하 두권짜리 소설 <가신>으로 두 번째는 1998년 9월 자유문학사에서 4권짜리 소설 <충신장>으로 나왔다. 지금은 둘 다 절판된 상태.
5.1. 영화
영화 47로닌 문서로
6. 가부키
1748년 조루리(꼭두각시 인형극)으로 가나데혼추신구라(假名手本忠臣藏)가 만들어졌고 같은 이름의 가부키가 공연되었다. 이때는 막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건 관련자들의 본명을 숨기고 중세 후기인 남북조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등장인물도 남북조시대의 인물로 가탁했다.[40]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추신구라지만 에도 시대에 키라 요시히사가 다스렸던 기라초에서는 공연하지 않았다고. 이유인즉, '''백성들을 잘 챙겨주시던 자비로운 영주님[41] 을 죽인 놈들에게 가뜩이나 화가 나있는 상태인데 그놈들이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연극인 줄도 모르고 관람했다가 화가 난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배우들을 두들겨패는 일이 몇 번 일어나면서''' 그 이후로는 절대 기라초에서 추신구라를 공연하지 않았으며, 키라의 자손인 우에스기씨가 다스리던 요네자와 지역에서도 2차대전 이후까지 공연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 전해지는 추신구라의 내용은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속칭 '본전', 복수에 참가한 아코 로시 개개인의 이야기인 '명명전', 그 이외의 '외전', 그리고 부정적, 또는 다른 시각에서의 작품 등으로 나뉜다.
6.1. 본전
- 키라의 아사노 괴롭힘
- 참상의 소나무 복도
- 타무라 저택에서의 이별
- 아코 성의 대회정
- 아코 성 넘겨주기
- 祇園一力 찻집
- 야마시나 은거
- 난부 저택 눈속의 이별
- 복수
- 센가쿠지로의 행진
- 47 무사의 최후
여자1: 결혼해줄께(..!)
여자2: 나도!
여자3: 나도!
남자: '''야한데 데려다줄께~~!!!(...)'''
신짱: 정말?
사람들: 정말!
신짱: 그럼 저 에게 맡기세요![40] 키라 코즈케노스케는 고노 모로나오, 야나기와라 스케카도가 아시카가 타다요시 등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들은 누가 누구인지 다 알고 있었다. 당시 가부키의 상인 이야기가 유명한 호상들이 모델인 것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것과 같다.[41] 키라 요시나가는 권선징악적인 연극의 구조상 악인이 되어야 하니 간신 같은 나쁜 이미지도 덮어썼지만 연구에 의하면 자기 영지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상당히 괜찮은 영주였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