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6주
1. 개요
거란의 1차 침입시에 서희의 담판으로 고려가 청천강 이북, 압록강 남쪽에 확보한 영토.
거란은 뒤늦게 영토의 군사적 중요성[1] 을 깨닫고 돌려주길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거절하였고 이후 11세기 내내 이어진 거란과 고려 간의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고려의 북진정책을 대표하는 결과물이며 세치의 혀를 통해 평화적[2] 으로 영토를 얻은 사례로 국내외에 유명하다. 국사책에서도 중요하게 다룬다.
2. 상세
고려 성종 12년인 993년,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80만 대군이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에 성종은 상중하 3군을 편성하고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로,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로,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대비하게 하였다. 또한 성종은 친히 서경을 거쳐 안북부까지 나아가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봉산 전투에서 고려군이 패배하자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 이북의 영토를 떼어주자는 의견이 득세하였다. 그럼에도 안융진 전투에서 대도수의 활약으로 전선이 고착화되자 성종은 서희 및 이지백의 건의를 받아들여 협상 노선을 채택하였다.
고려 측 협상자로서 거란 진영으로 간 서희가 뻔뻔한 태도로 침대에 누워버리며 소손녕의 기선을 제압하고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므로 오히려 거란이 땅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희는 조공 문제를 따지는 소손녕에게 여진이 길을 막고 있으니 그들을 쫓아내고 압록강 하구 일대의 통제권을 주면 거란과 친하게 지내겠다는 말로 압록강 동쪽의 영토를 얻어내었다.
이렇게 고려는 거란에게 조공하는 대가로 안북부부터 압록강에 이르는 280리의 땅을 얻고 '''흥화진, 용주#s-3, 철주#s-1.2, 통주, 곽주, 귀주'''를[3] 설치하니 이것이 실리 외교의 대명사인 강동6주인 것이다.
3. 관련 문서
[1] 고구려의 요동방어선에 비견할 만한 고려의 북방방어선이다. 2/3차 침입에서 이곳을 함락하지 못하고 그냥 통과해서 개경으로 진격한 요나라군의 발목을 잡다못해 본국으로 퇴각하는 요나라군을 공격해 엄청난 피해를 입힌다.[2] 엄밀하게는 평화적이 아니다. 애당초 이 지역은 거란의 영토도 아니었다. 거란의 개입을 막고 무력으로 살고 있던 여진족들을 토벌해 이 지역을 점령한 것이다.[3] 현재의 지명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흥화-의주군, 용-용천군, 철-철산군, 통-선천군, 곽-곽산군, 귀-구성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