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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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나라의 제6대 황제. 거란식 이름은 야율문수노(耶律文殊奴)로서 문수보살의 종이라는 뜻이다. 한식(漢式) 이름은 야율융서(耶律隆緖). 12세에 즉위하여 어머니 승천태후 소씨의 섭정을 받았으며, 친정 이후 집권기 동안 국력 신장과 내란 수습에 힘을 기울여 요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이다.
2. 군사
행정 조직을 정비하고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동서로 원정하여 서쪽으로는 티베트와 위구르 지역(알타이 산맥 등 신강 북부), 동쪽으로는 고려에 맞닿을 정도로 영토를 크게 넓혔다. 또한 북송과도 자주 전쟁을 벌여 그들을 연전 연파한 끝에 황하 이북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으나 송군의 저항도 거세서 이에 전연의 맹을 맺게 되었다.[1]
이렇듯 요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힌 인물이지만 특이하게도 고려와의 대결에서는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1차 침입 때 소손녕이 서희에게 낚여 강동6주를 고려에게 넘겨주었고, 그 강동6주때문에 이후 전쟁에서도 고전했다.[2] 이후 2차 침입 때는 성종이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강조의 군사를 격파하고 개경을 함락시키는 등 승승장구하였으나, 정작 함락시키지 못한 강동6주의 요새 중 하나였던 흥화진의 장수 양규와 귀주의 장수 김숙흥의 후방 게릴라 전술에 큰 피해를 입는 바람에 실익은 못거두고 다시 돌아가야 했다.[3] 그리고 마지막 3차 침입 땐 소배압이 강감찬에게 패하면서 고려와도 결국 화약을 맺게 된다.
장수로서는 꽤 명장이라 불릴 만한 인물로, 그가 친정을 나가 고전한 상대라고는 고려가 유일했다. 반대로 말하면 고려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과의 싸움에선 대부분 연전연파하며 꽤 잘 나갔다.
3. 내정
국내에서는 여요전쟁의 주동자라서인지 군사적 업적 및 고려와의 전쟁 부분으로 많이 설명되는 편이지만, 실제로는 내치도 꽤 준수하게 이끌었다. 우선 성종은 법 집행을 공평무사히 하였다. 귀천에 따라 법 집행이 다르면 백성의 원망을 받는다는 것을 밝히고는 "황족이나 친척들의 죄는 백성과 똑같이 처벌한다"고 공포했으며, 노비가 죽을 죄를 지어도 '''"주인이 노비를 함부로 죽일 수 없으며, 관청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내려 질서 체제를 정비했다.
왕정 시대의 군주들은 이런 건 말로만 공포하고 실천하지 않는 군주들이 많았는데, 성종은 이를 직접 실천에 옮겼다. 한 번은 서북 군로사 총령으로 있던 부마 소도옥의 아내인 13녀 금향 공주 새가가 노비 한 명을 함부로 죽이자 즉시 금향 공주를 공주가 아닌 '군주'로 강봉시켰고, 사위 소도옥은 집안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고 파직시키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노예들에 대해서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는데, 새로 '초와부'와 '갈술부'라는 마을을 만들어 요하 동쪽에서 수렵이나 철을 제련하던 노예들을 새로 만든 마을의 평민으로 환천시켜 주었다. 또한 여진족의 노예들도 각 마을로 편입시켜 평민의 신분으로 살게 했다. 심지어는 비리 문제에도 엄격해서 황족이나 친척들을 모아두고 이런 말을 했다.
또한 적발된 탐관오리는 한 번 파직하면 죽을 때까지 임용하지 않았으며, 청렴한 관리들은 낮은 지위에 있어도 파격적으로 승진시켰다."황족이 뇌물을 받았는데도 이를 사면해 준다면 '''이는 법이 폐지된 것과 같다'''."
"황족이 뇌물을 받는 일이 적발되면 '''평민으로 강등시켜''' 죄과를 치르게 할 것이다." -《요사》 61권
성종은 거란족의 조세 제도도 전면 개혁했다. 백성을 동원하여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독려하고 이들에게는 10년간 세금을 면제시키는 혜택을 주었고, 대대로 농업에 종사해 온 평민들에게는 토지 주인에게 소작료를 내도록 하는 등 나라에도 일정 액수의 세금을 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변방 지역의 농민들에게는 둔전과 개간 경작을 유도하면서 힘써 이런 황무지를 개간하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일절 부여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유목국 체제 티를 제대로 벗지 못한 거란에 조세 제도를 확립시킨 것과 엄정한 법치를 실현한 것이 성종이 이룬 최대 업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4. 말년
50년 남짓한 재위 기간 동안 나라의 정치, 군사,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요나라를 동아시아 최강국의 위치로 올려놓은 명군이지만 재위 후반에는 성종도 긴장이 풀어졌는지 방탕해져서 사냥에만 몰두했다고 하며, <거란국지>에 의하면 모여서 할 일 없이 술을 즐기고 향락을 누리는 것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1031년 사망했는데 소갈증(당뇨병)을 오래 앓던 중이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우연의 일치인지 피터지게 싸운 고려의 현종, 강감찬과 같은 해에 사망했다는 것. 고려의 현종이 1031년 5월(음력 기준)에 붕어했고 성종은 그 다음 달인 6월에 죽었다. 강감찬은 그 해 8월에 세상을 떠났다. 유언으로는 그의 아들 흥종 야율지골(종진)에게 "전연의 맹을 잘 지켜서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재위 기간이 49년에 달하는데 중국의 전 황제를 통틀어 재위 기간이 4번째로 긴 황제다.[4]
5. 사후의 막장 황실사
사후 황실사가 좀 막장틱하다. 성종의 정실인 인덕황후의 이름은 소보살가(蕭菩薩哥)로, 성종의 어머니 승천태후의 조카다. 기록에는 얼굴도 아름답고 성품도 훌륭해서 성종과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을 둘 낳았으나 이 아들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뒷날 성종은 소누근(蕭耨斤, 사후 흠애황후)이라는 후궁을 가까이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바로 흥종이 되는 야율지골이다. 이 아이는 소보살가가 직접 양육했는데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들은 아니지만 친아들처럼 매우 아꼈다. 소누근 역시 소보살가를 옆에서 모셨지만 속으로는 그런 상황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종이 병에 걸려 위중해지자 소누근이 성종의 병수발을 들었는데, 소누근은 대놓고 소보살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성종이 죽고 야율지골이 흥종으로 즉위하자 소누근은 스스로 황태후가 되었으며, 소보살가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서 유배시켜 버렸고[5] 결국 사람을 보내 그녀를 죽여버렸다. 소보살가는 자신을 죽이러 온 사자에게 "내가 죄가 없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 죽기 전에 몸을 깨끗이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말을 했고 결국 목욕을 한 후 죽음을 당했다.
이 무렵은 고려도 현종이 죽고 덕종이 즉위했을 무렵인데, 덕종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고려사를 보면 거란족 고위 관료들이 대거 고려로 망명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정치 혼란 속에서 고려뿐만 아니라 여진이나 송나라 등의 주변국으로 도망친 거란인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소누근은 황태후로 섭정을 맡아 권력을 행사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1034년에 동생들을 모아 자신의 차남이자 흥종의 동생인 야율중원을 황제로 세울 음모를 꾸몄다. 그런데 야율중원은 이 음모를 형 흥종에게 알렸고 흥종은 어머니의 태후 옥새를 빼앗은 다음 유폐시켰다. 그러다가 5년 후에 흥종은 어머니를 유폐한 것을 후회하며 다시 마차를 몰아 어머니를 맞아들여 효도를 다했다고 한다. 결국 소누근은 아들의 효도를 받으며 잘 살다가 1055년에 흥종이 먼저 죽었고, 흥종 사후 2년 뒤에 병사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소누근이 죽고 난 후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소보살가와 함께 성종의 능인 경릉에 묻혔다는 것이다.
6. 평가
말년의 사치와 고려와의 전쟁에서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인 측면은 있지만, 그래도 《요사》에서는 "거란의 황제들 중 재위가 길고 훌륭한 이름을 남긴 황제는 오직 성종뿐이다"라며 성종에 대해 호평을 내렸다. 사실상 요나라의 리즈 시절을 이끈 명군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한반도 왕조와 연결시켜 비교하자면, 여러 면에서 청태종과도 유사한 면모를 보이는 황제라고 할 수 있다. 이민족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한반도를 여러 차례에 걸쳐 침범하였으며 송나라, 명나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는 것까지... 차이점이 있다면 청태종의 상대는 조선 최악의 암군인 인조여서 빠르게 제압하였지만 요성종의 상대는 고려 최고의 성군 현종이어서 정복에 실패하고 도리어 큰 피해만 입었다는 점. 이런 식으로 보자면 원의 쿠빌라이 칸도 비슷한 측면은 있다만.
묘호로서도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은 成宗 대신 성스러운 성 자를 쓰는 聖宗이라는 뜻이 매우 좋은 묘호를 받았듯 후대에서나 당대에서나 요성종의 평가가 높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7. 대중매체에서
천추태후에서 청년기는 배우 오건우,[6] 중년기는 배우 장동직이 역을 맡아 등장했는데,[7] 여기서는 요나라 리즈 시절을 이끈 나름 명군을 무슨 폭군마냥 다혈질 군주로 각색해놨다. 소배압이 강감찬에게 발렸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 가죽을 벗겨버려라!"라고 버럭했다는 실화에서[8] 인물상을 차용한 것 같다. 일부에선 영화 300에 나오는 관대한 대왕님(...)과 비슷하다는 감상도 있었다.
그래도 해당 드라마에서 야율융서를 단순한 찌질이로만 묘사한건 아니다. 수렴청정에 불륜까지 저지르는 본인의 어머니를 평생 깎듯이 모셨고, 전쟁에서도 무작정 설치기보다는 장수들과 함께 상당히 신중하고 철저히 준비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고려 최고의 장수 중 하나라던 강조를 죽이게 되었을 때 무턱대고 사형에 처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엄선한 갑사 100명을 불러와서 다 쓰러뜨리면 석방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에 강조는 70여 명까지 쓰러뜨리고 최후를 맞이했는데, 이러한 강조를 야율융서는 융숭히 장례 치러주었다.
JTBC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서는 몽골인 배우 우간바야르엔크 바야르가 맡았다. 배우가 얼굴과 체격이 넙대대한 마동석 비슷한 외모였으며, 그냥 잔인한 침략자로만 묘사되었다.
중국의 사극이나 무협 드라마에서는 주로 송나라 때의 무인인 양업과 그 아들들의 이야기이자 무용담으로 인기가 높은 <양가장> 시리즈에서 등장하지만 주인공이 송나라 무인들이다보니 적 포지션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어쩐지 성종 본인보다는 모후인 승천태후가 실질적인 최종보스로 등장하다 보니 어머니의 막강한 포스에 많이 가려진 분위기.
8. 둘러보기
[1] 이때 소태후가 직접 친정하기도 했다.[2] 사실 1차 침략은 직접적 침략이라기보단 후방 정리 차원에서의 예방 전쟁 성격이 짙었고 강동 6주는 사실상 무주공산이었기에 고려가 점령해도 묵인해주겠다는 것에 가까워서 당시로선 서로 윈윈하는 상황이었지만, 이후 고려는 강동 6주를 완전 요새화해서 요나라를 엿먹인다.[3] 이때 양규와 김숙흥은 견고한 성채에 웅거해 있으면서도 틈틈히 기병을 보내서 요나라의 후방을 마구 교란했다. 그러나 요나라 군대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히던 양규와 김숙흥은 전쟁 막바지에 전사하고 만다. 애초에 양규와 김숙흥은 포로가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살 생각을 거의 안하다시피 하며 전투를 벌였기에 어찌보면 예견된 결과였다.[4] 1위는 청나라의 강희제(61년), 2위는 청의 건륭제(60년), 3위는 전한의 한무제(53년).[5] 이 와중에 소손녕의 아들인 소필적이 소보살가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그 역시 이 역모사건에 걸려 죽었다. 이때 소필적의 부인이 여진으로 도망가자고 했지만 소필적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6] 사족으로 오건우는 2011년 1월 13일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7] 장동직은 소태후를 연기한 심혜진과 연배가 비슷하다. 오건우의 사망 이후 배우를 교체한 것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일기도 했다.[8] 물론 진짜 얼굴 가죽을 벗기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