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나디 주가노프

 


<colbgcolor=#d50000><colcolor=white> '''본명'''
Генна́дий Андре́евич Зюга́нов
겐나디 안드레예비치 주가노프
'''국적'''

'''출생'''
1944년 6월 26일 (80세)
소련 오룔 주 Mymrino[1]
'''직업'''
정치인
'''정당'''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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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정치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의 당수이다.

2. 생애


모스크바 남쪽의 오룔 출신이다. 정치인이 되기 전에는 중학교에서 물리, 수학 교사 일을 했다.
1966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후 1970년 오룔주 대의원을 시작으로 활발히 정치활동을 했고 많은 파벌 중에서는 니콜라이 리즈코프 파벌에 있었다. 소련이 붕괴한 뒤 당시 러시아 내 소련 공산당 지지세력 중 가장 위에 있었던 1991년 RSFSR 대선 후보 니콜라이 리즈코프의 신임을 얻어 러시아 연방 공산당의 당수가 되었고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당시에는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보리스 옐친과 타협을 시도했으며 그 사건을 계기로 경쟁자들이 사법 처리를 받게 되자 당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게 된다. 처음 선거를 지휘했던 1995년 총선에서 공산당이 원내 1당에 등극하여 약진했고, 친 옐친파 정당들이 1993년 두마 선거와 마찬가지로 참패하면서 주가노프는 유력 차기대권주자로 떠올랐다.
이러한 기세로 1996년 대선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이 될것이라는것이 주 전망이었으나 엘친의 '공산주의는 러시아를 망칠 것이다' 등으로 네가티브 선거 전략을 펼쳤고 올리가르히 언론사들의 의도적 옐친 밀어주기로 선거막판에 판세가 뒤집히며 낙선해버리고 말았고, 이 때문에 입지에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이후로 러시아의 경제사정에 커다란 전화점이 온것도 아닌데다가 또한 1998년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소련에 대한 향수가 절정에 달하며 와신상담에 성공할듯 했지만 공을 들였던 옐친 탄핵이 실패한데다가 총리로 임명된 푸틴이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반군 강경진압으로 갑자기 인기를 얻게 되면서 1999년 총선에서 예상 외의 부진을 보였고, 또한 2000년 대선에서 푸틴이 1차 당선되며 낙선하고야 말았다. 이후로 2004년과 2008년, 2012년 대선에 출마했지만 푸틴에게 완전히 밀려버렸다.
러시아 공산당을 수정주의라 비난하는 빅토르 튤킨, 김정일을 칭찬했으며 구소련 국가들의 공산당연합을 이끌며 세를 과시했던 올렉 셰닌, 대놓고 스탈린을 지지하며 페레트스로이카를 부정한 니나 안드레예바, 소련정계의 후신을 자처하며 마찬가지로 김정일을 칭송한 사지 우말라토바, 쿠데타를 이끈 소련의 마지막 원수 드미트리 야조프나 고르바쵸프를 비판했던 리가쵸프, 심지어는 마오주의자인 그리고리 이사예프 등에 비하면 훨씬 온건파로 '공산주의 세력 내에서는' 온건한 성향이었다.[2] 물론 현재는 더 온건한 그루지닌이 강세를 보이는 상태.
주요 지지층은 반 푸틴 세력이다만... 주가노프의 비판점이 여기 있다. 반푸틴 야당이라는 위치와는 달리, 주가노프는 강력한 러시아 중앙정부를 지지하고 반동성애법을 지지했으며 크림반도 합병과 동부 우크라이나 위기에서도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는 주가노프가 민족주의자들과 연대하기 때문. 사회주의적인 정책은 모든 주요 산업의 국영화 정도. 그러다보니 푸틴에게 지지율을 많이 빼앗겼다. 황당한 것은 이런 주가노프도 공산당 내에선 사민주의자에 비견될 정도로 미하일 고르바초프니콜라이 리즈코프와 동격의 개혁파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2018년 대선에서는 고령을 이유로 출마하지 않았다. 공산당 대선 후보는 파벨 그루지닌이 선출되었다.
2020년 벨라루스 시위에서 알략산드르 루카셴카를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각국 공산당 대표로서 냈다.링크(러시아어)

[1] 현 러시아 오룔 주 Mymrino[2] 2012년에는 공산당 내에서 신트로츠키주의자로 불리는 니키틴을 필두로 한 반 주가노프 세력이 큰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흥미롭게도 이들의 집회에 참석한 사람이 바로 블라디미르 티호노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