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로쿠 대지진
1. 개요
1703년 12월 31일(음력 11월 23일) 오후 2시경에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 진앙지는 보소 반도 남단의 지바현 노지마키와로, 현대식 지진 규모로는 8.1 정도이리라 추정한다. 1923년에 일어난 관동 대지진과 비교하면 피해지역이나 유형이 흡사하여 관동 대지진 이전의 관동지진(도쿄 수도직하지진)으로 분류한다.[1]
2. 피해
기록에 따르면 수도 에도에는 그리 큰 피해는 없었으나, 에도성의 각 성문과 영주들의 에도 내 저택들, 나가야와 마치야 등에서 건물피해가 일부 있었다. 히라쓰카와 시나가와에서는 지면이 액상화하여 아침이 되면 오수가 길거리에 널려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앙지 보소 반도를 중심으로 사가미만과 보소 반도 남단으로 피해가 심각했으며 지진으로 인한 화재가 사가미국(오늘날의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성에서 일어나 오다와라성 천수각이 소실되었다. 이외에도 관동 각지역에서 화재가 일어나 가옥 약 8천 호가 파괴되고 사망자 약 2300여 명, 이재민 약 3만 7천여 명이 생겼다고 추정한다.
또한 보소 반도에는 지진 해일(쓰나미)도 발생해 아타미에는 파도 높이가 7 m로 추정되는 해일이 밀려들었다. 가옥 500여 호 중 10여 호만 남기고 모조리 파괴되었을 만큼 피해가 막심했으며, 가마쿠라에서는 쓰루가오카하치만 신궁에까지 해일이 밀려들어왔다고 한다. 이토에서는 해일이 강을 거슬러와 피해가 있었으며 구주쿠리에서 약 5 m, 요코하마에 약 3 m, 에도에도 1 m 높이 해일이 일었다고 한다. 또한 소나무로 유명한 리쿠기엔은 지진해일로 발생한 염해로 거의 모든 소나무가 말라죽었고,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때에야 겨우 원상복구되었다.
3. 기타
이 지진이 일어난 그해 3월에 추신구라 사건을 일으킨 아코호번 무사 46인을 할복시킨 일이 있어서 세간에는 '''추신구라 사건의 무사들의 원혼이 이 대지진을 불렀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여론이 심각해지자 막부는 유언비어 유포를 엄금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 당시 도쿠가와 막부의 신료였던 아라이 하쿠세키는 지진을 체험한 일화를 회고록에 기록하였다. 그리고 4년뒤 '''엄청난 지진'''과 후지산이 대폭발하는데..
지진이 일어나기 1년전에 백두산이 분화하였다.
4. 이전, 이후의 타임라인
※1668년 4월과 1702년에는 백두산이 분화하였고, 1707년 호에이 대지진 이후에는 후지산이 폭발하였다.
5. 같이 보기
[1] 당시 사가미 트로프가 파열되었는지는 일본 학계의 주요한 떡밥이다.[A] 김소구, 1982년, '한반도와 그 인접지역의 지진'[B] 2002년, '1681년 6월 12일, 17일, 그리고 26일 양양-삼척 근해에서 발생한 지진기록의 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