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산

 


'''후지산'''
'''富士山(ふじさん''' | '''Mountain Fuji'''
[image]
후지산 북부 야마나시현 근처 5개 호수('후지 5호')에서 촬영한 후지산.
후지산의 가장 유명한 촬영 구도다.

''' 지도'''

'''위치'''
[image] 일본 혼슈 주부 지방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 ・ 고텐바시 ・ 오야마정
야마나시현 미나미츠루군 ・ 후지요시다시
'''높이'''
3,776 m
'''분류'''
'''활화산'''
'''형태'''
성층화산(독립 산체)
'''지질학적 형성'''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
~약 1만년 전
'''쾨펜의 기후 구분'''
툰드라기후(ET, 정상 부근)
냉대습윤기후(Df)
''' 외국어 표기'''
'''한국어'''
부사산(한국어 한자 독음)
후지산
'''영어'''
Mt. Fuji(Fuji-san)
'''중국어'''
富士山Fùshìshān
1. 개요
2. 어원
3. 지질
4. 인문 역사
4.1. 세계유산으로 등재
5. 상징
6. 관광
7. 경치
8. 대분화 가능성
9. 기타
10.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후지산은 일본에서 가장 높은[1] 산으로, 해발고도 '''3776 m'''인 성층화산이자 활화산이다. 일본의 상징이자 일본인영산(靈山)으로 꼽히고 후지 하코네 이즈 국립공원의 일부인데,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이다.

2. 어원


후지(富士)라는 이름의 어원을 두고 여러 설이 있다. 첫 번째는 타케토리모노가타리(竹取物語) 또는 카구야히메 이야기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카구야 공주 이야기를 보면 알겠지만 카구야 공주가 달로 떠난 뒤에 카구야 공주에게 받은 불사약을 지금의 후지산에서 태워 없애게 하여 '후시산(不死山, 불사산)'으로 불리는 것도 있고, 2번째로는 같은 이야기로부터 후지산에서 태워 없앴다고 하여 'ふしの山(불의 산)'로 불리는 것도 있다. 세번째로는 무지개의 발음인 '후시(フシ)'로부터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늘날 일본인에게서 후지산은 한국인들에게 백두산급으로 성지 취급[2] 받으므로 '후지사마(후지님)'로도 불린다.
한국에서 후지산의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어서 '부사산'이라고도 한다. 사과의 품종 중 후지를 '부사'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후지산과 부사는 서로 무관하며, 한자도 다르다. 부사의 본래 이름은 후지로, 저 멀리 아키타현 후지사키정에서 개발된 품종이다. 후지 사과는 부유할 부(富)가 아닌 등나무 등(藤)을 쓰는데, 둘의 발음이 동일해 일어난 오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후지산 산'이라고 써야 한다는 착각도 있지만, 외래어 표기법은 한자어 지명에서 '산', '강' 등의 의미를 지닌 원어를 제외한 부분이 '''한 글자'''인 경우에만 우리말의 '산, 강' 등에 해당하는 말을 덧붙이도록 한다.[3] 富士는 두 글자라 덧붙여 읽지 않으므로 '후지산 산'이 아니라 '''후지산'''이 외래어 표기법으로도 옳다.
불(火)을 의미하는 고대 일본어 단어가 한국어와 관계 있는 '푸디pudi' 혹은 '푸지pudge'였는데 여기서 '후지'란 이름이 나왔다는 학설도 존재한다. 화산임을 감안할 때 일리 있는 설명. 이남덕 - 한국어 어원연구 4권 참조.
중국의 고전 산해경(山海經)에서 백두산을 '불함산'(不咸山)이라 지칭했는데, 불함이라는 말이 후지산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불함의 불은 현대 한국의 물이 고구려어로는 '買', '믓'이라고 불렸듯이 븟이라 불렸을 가능성이 있고, 함은 고구려어로 산(山)을 뜻하는 '개마(蓋馬)'[4]라는 단어가 축약된 형태로 추정되며[5] 이 '븟'이라는 말이 일본으로 건너가 '후지'[6]라는 말로 불렸고, 이것을 한자로 음차해서 富士라고 표기한다는 것이다. [7]

3. 지질


후지산은 '''4층 구조'''다.
1천만 년 전까지 후지산이 있던 자리는 해저였다. 현재 혼슈야마나시현 북부(고후시 부근)가 당시에는 해안이었다. 필리핀해판이 점점 북상하자, 먼저 현 후지산의 북쪽과 동쪽에 있는 미사카 산지와 단사와 산지가 혼슈에 충돌하며 융기하였다. 그 후 100만 년 전까지 화산 군도들이 줄줄이 혼슈에 충돌해 현 후지산의 모체가 되는 선(先) 고미타케 화산과 하코네 화산[8], 아시타카 화산이 만들어졌다. 당시 이즈 반도는 혼슈와 부딪히기 직전인 섬이었다.

수십만 년 전 이즈 반도가 혼슈와 충돌했다. 그 결과 후지산은 압력을 받아 거대한 폭발을 반복해 선 고미타케 화산은 고미타케 화산이 덮었고, 5만 년 전에는 고(古) 후지 화산이 새롭게 고미타케 화산 측면에서 분화해 고미타케 화산마저 덮어버렸다. 이 무렵 하코네 화산은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칼데라를 생성하였고(이시노 호수), 아시타카산은 분화를 종료하였다. 하코네산도 분화를 멈춘 수천 년 전에는 신 후지 화산이 새로이 분화하여 현 후지산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2900년 전에는 고텐바 암설(지반붕괴) 사태로 고 후지 화산의 산체가 현 고텐바시까지 무너져 내렸다. 이후 3000~2000년 전까지 정상부에서 10차례 정도 분화한 이후로는 측면으로만 분화했다. 이후 헤이안 시대에 조간 대분화(864)를 비롯하여 여러 번 분화했지만 에도 시대의 호에이 대분화(1707)를 끝으로 현재까지는 분화가 없다.
한라산(1947 m), 백두산(2750 m)보다 훨씬 높고, 뉴질랜드 아오랑기 쿡 산(3754 m)보다는 조금 더 높다.

4. 인문 역사


고전시대에도 물론 영산으로 취급받긴 했지만, 그 격은 지금보다는 낮았던 듯하다. 721년에 완성된 히타치국풍토기(常陸国風土記)에 이런 내용이 있다.

옛날 조상신께서 신들이 많은 곳을 다니시다가 스루가의 후지산에 도착하셨다. 해가 저물자 하룻밤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후지산신은 "추수제(新嘗祭)를 지내느라 금기를 지키는 중입니다. 오늘만은 양해해주십시오. 머물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조상신은 원망하며 욕하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너의 조상인데 어찌 머물지 못하게 하느냐. 네가 사는 산은 살아있는 한 겨울에도 여름에도 눈이 내리고 서리가 끼며 추위가 덮쳐서, 사람들이 산에 오르지 않아 음식을 바치지도 않으리라."

이번에는 쓰쿠바산(筑波山)에 가셔서 부탁하시자, 쓰쿠바산신은 "오늘밤에 추수제를 하는 중입니다만, 조상님을 기분 상하게 해드릴 수는 없군요." 하면서 대접하여 모셨다. 그러자 조상신은 기뻐하며 축복의 노래를 부르셨다.

"사랑스럽구나, 후손아. 높게 섰는가, 신령의 궁전이여. 하늘과 땅, 해와 달이 무궁하듯이 사람들이 이 신성한 산에 올라 축하하리라. 음식은 풍부하고 우리 일족은 언제까지나 번성하여 즐거움이 무궁하리라."

이런 이유로 후지산은 눈이 와서 올라갈 수 없다. 그러나 쓰쿠바산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노래하고 춤추며 먹고 마시는 것이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쓰쿠바산은 오늘날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 있는 해발 877 m짜리 산이다. 히타치국풍토기에서는 후지산의 위엄이나 위용으로 묘사하는 '높은 산 정상에 눈이 쌓인 모습'을 과거에는 오히려 오르기 어렵게 한다는 이유로 저주로 보고, 후지산보다 한참 낮은 쓰쿠바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축복이라고 여겼다. 물론 이것은 8세기 히타치 지방의 인식을 반영한 기록이겠지만, 고대에는 지금보다는 후지산을 신성하게 여기는 정도가 낮았다는 한 가지 증거라 하겠다.
수험도에서 유래한 후지강(富士講)이라는 종교단체가 에도 시대에 후지산 숭배인식을 퍼트렸다. 물론 그 이전에도 후지산은 신성한 산으로 숭배받기는 했지만, 후지강이 이를 더욱 강화하고 대중화했다. 후지강은 후지산을 여신으로 간주했다. 과거 일본에서는 '후지산에 여자가 오르면 재앙이 닥친다.'고 오르지 못하게 했는데, 후지강은 '여신이 계신 산에 왜 여자가 못 오르냐?'면서 지속적으로 금기에 도전하여, 이는 점차 금기가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9]

4.1. 세계유산으로 등재




''' 유네스코 세계유산'''
[image]
이름
한국어
후지 산(富士山), 성스러운 장소 그리고 예술적 영감의 원천
영어
Fujisan, sacred place and source of artistic inspiration
일본어
富士山ー信仰の対象と芸術の源泉
프랑스어
Fujisan, lieu sacré et source d'inspiration artistique
국가·위치
일본 시즈오카현, 야마나시현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3년
등재기준
(iii)[10], (vi)[11]
지정번호
1418
[clearfix]
2013년 6월 22일에 후지 산, 성스러운 장소 그리고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는 이름으로 후지산 주변의 신사와 화산 지역 및 명승구들을 묶어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원래는 자연유산으로 등재를 하려고 했으나, 등산객들이 버린 쓰레기에 더해 등산로 화장실에 분뇨가 넘쳐 흐르는 관계로 무산되었다. 등산로는 자연훼손이 심하며, 지질학적으로 세계의 유명 산들에 비해 딱히 특별하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일본 정부는 자연유산 등재를 위해 친환경 화장실을 등산로 주변에 세우는 등 법석을 떨었으나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자연유산 등재는 퇴짜 맞았지만 일본은 환경 평가에 관대한 문화유산 등재에 재도전하여 결국 등재에 성공하였다. 후지산이 일본 문화의 중요한 상징이며 수많은 그림과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는 등 문화적인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안 그래도 이전부터 후지산 환경 문제가 극성이었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등산객이 더욱 몰려 환경 문제가 더 나빠졌고, 결국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유네스코가 문화유산 등록을 취소할 수도 있다는 발표까지 나왔다. #
[image]
구글 두들에 등장한 후지산.
야마나시현이 후지산 등산철도를 검토하는데, 세계유산과 관련해서 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이 꾸준히 나온다.

5. 상징


[image]
일본을 상징하는 이미지 중 하나로, 신칸센이 앞쪽을 내달리고 있는 눈 덮인 후지산의 모습은 현대의 일본을 상징한다. 다만 위 사진과 같은 구도는 후지산의 남쪽 부분, 즉 시즈오카현 쪽에서만 볼 수 있다. 북쪽인 야마나시현에서 보면 산 정상에 큰 균열이 나있다. 일본 민족의 영산이자 일본의 상징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매체에서는 수도 없이 다루어 일일이 그 예를 들 수 없을 정도이다. 새해 첫 꿈에서 후지산을 보면 매우 재수가 좋다고 한다.

6. 관광


위치는 일본 혼슈섬으로, 날씨가 좋은 날에는 도쿄도가나가와현[12]에서도 보인다. 시즈오카현야마나시현에 걸쳐져 있어, 두 현에서 서로 후지산이 자기네 산이라 우긴다. 시즈오카현에서는 경치 문단에 나온 사진처럼 남쪽에서 본 후지산을 앞쪽, 북쪽에서 본 후지산을 뒷쪽이라 하고, 야마나시 현에서는 그 반대로 북쪽에서 본 후지고코(富士五湖)와 함께 보이는 후지산을 앞쪽이라고 한다고.
일본에서는 신성한 산에 종교적 의미로 오를 경우 등산 대신 '등배(登拜)'라는 말을 쓰는데, 후지산도 등배의 대상이었다. 한국어에서도 사찰에 '참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비슷한 경우라고 하겠다.
세계 각지의 명산들에 비해 경사가 심하지 않고 등산로 관리가 잘 된 편이라서 국민 대다수가 오를 수 있어 이른바 '국민 산'으로 통한다. 유료도로인 스바루 라인을 이용하면 5고메(5合目, 5부 능선) 주차장까지 사륜차, 이륜차, 또는 자전거 등으로 오를 수 있고, 5고메에서부터 출발하면 당일치기 등반도 가능하다. 물론 이것은 여름철(7월~8월)의 이야기. 애당초 등산로의 정식 개방은 7월과 8월 뿐이다. 또한 등산로마다 개방 시기가 다르다. 등산하기 전 모든 등산로의 개방 날짜를 확인하고 갈 것. 또한 제설 작업이 늦어지면 개방일이 지연될 수 있으니 한 번 더 확인하는 편이 좋다.
만약 등반에 도전할 생각이라면 준비를 잘 갖추는 편이 좋다. 우선 짐을 최대한 가볍게 하되, 반드시 외투를 챙긴다. 설령 5고메가 한여름 날씨일지라도 8고메(8부 능선)부터는 겨울 날씨가 된다. 등산 스틱이 없으면 5고메에서 금강장(金鋼杖)[13]이라는 나무 지팡이를 1천 엔 내외로 파니 꼭 하나 사가자.[14] 햇볕이 무척 세기 때문에 자외선 차단제를 꼭 바르자. 눈에 무리를 주는 자외선도 상당하니 선글라스도 가져가는 걸 추천한다. 먹거리는 작으면서도 열량 높은 초콜릿이나 칼로리메이트 등이 유용하다. 일반적으로 120엔 정도 하는 이온음료(500 ml)가 5고메 자판기에서는 200엔, 7고메 산장에서는 500엔에 판매된다. 생수의 가격도 동일. 등반은 아침 일찍(오전 6시 정도) 시작해야 일몰 전에 하산하기 편하다. 8고메 이상에서는 고산병 증상이 생길 수 있으니 주의할 것. 그리고 100엔짜리 동전을 여러 개 준비하도록 하자. 이유는 화장실 이용료가 무려 200엔이다! 사람이 직접 지불하는지 감시하는 화장실도 있으나, 덩그러니 나무상자만 존재하는 화장실도 있다.[15] 우천시 몸이 젖어 추울 때 들어가서 휴식을 하기 좋다. 굳이 화장실에서 쉬는 이유는 산장은 휴식이 불가하고 숙박만 가능하기 때문이다.[16]
후지산 높이가 높이인 만큼 정상은 상당히 춥다. 1월 평균기온 -18.4℃, 8월 평균기온은 6.2℃로 1년 내내 밤엔 영하로 내려가곤 한다. 극단적으로는 1981년 2월 '''-38℃'''를 기록한 적도 있다. 히타치국풍토기에 기록된 "네가 사는 산(후지산)은 살아있는 한 겨울에도 여름에도 눈이 내리고 서리가 끼며 추위가 덮치리라." 하는 구절대로이다.
일본 전역에 있는 센겐 신사(浅間神社)는 후지산신을 주신으로 모신다. 센겐 신사들은 후지산을 센겐(浅間) 님, 혹은 센겐 대신(大神)이라고 부르며 신앙대상으로 삼는데, 센겐이란 말이 화산을 뜻한다고 한다. 메이지 시기 신불분리령 이후로는 국가신토에 발맞춰, 센겐 신을 (일본서기고사기에 등장하는) 코노하나노사쿠야히메(木花之佐久夜毘売) 여신과 동일시하였다. 센겐 신사들의 본부(?)는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富士宮市)에 있는 후지산혼구센겐 대사(富士山本宮浅間大社, 이하 센겐 대사). 후지산 꼭대기에도 센겐 대사에서 관리하는 신사들이 있다.
후지노미야 루트 등산로의 끝에는 '후지산정상 센겐 대사 오쿠미야(富士山頂上浅間大社奥宮, 이하 오쿠미야)'가 있다. 원래는 후지산 코보사(興法寺)가 있던 자리지만, 메이지 유신 시절 신불분리령으로 사찰이 사라지자 그 터에 센겐 대사가 오쿠미야를 세웠다. 센겐 대사 측도 오쿠미야를 말사가 아니라 또 다른 본사(?)로 간주하는 듯하다. 오쿠미야 경내는 후지산 내에서도 특별보호지구로 따로 보호받는다는 듯. 은명수(銀明水)라고 불리는 약수가 근처에서 나와, 사람들이 받아가려고 한다.
요시다구치 루트의 끝에는 쿠스시 신사(久須志神社)가 있는데 오쿠미야의 말사지만 현판에는 '후지산정상 오쿠미야(富士山頂上奥宮)'라고 써 있다. 원래 쿠스시 신사에는 야쿠시지(藥師寺)라 하여 약사여래를 모시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약사여래의 약사(藥師/薬師)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야쿠시. 그런데 메이지 시기에 신불분리령으로 (오쿠미야 터에 있던 코보사와 마찬가지로) 야쿠시사가 해체되자, 센겐 대사가 그 터에 또다시 신사를 세웠다. '야쿠시사'라는 본래의 이름에서 야쿠(藥/薬)를 '쿠스리'라고도 읽을 수 있으므로 여기서 쿠스(久須)를 따고, 시(師)와 발음이 같은 시(志)를 붙여 쿠스시 신사(久須志神社)라 이름을 지었다. 모시는 신은 오나무치(大穴牟遅, 오쿠니누시)와 스쿠나히코나. 두 신은 일본신화에서는 '국토를 만든 신'으로도 유명하고, 의약의 신이기도 하다. 약사여래를 모시던 절 터에 역시 의약의 신을 모신 것이다.
쿠스시 신사 북서쪽 가까이에는 금명수(金明水), 오쿠미야 가까이에는 은명수(銀明水)라는 약수가 나온다. 둘 다 각 신사에서 신찬에 올리는 데 쓰는데, 영험한 약수라 하여 등산객들이 받아가려고 한다. 신사에서 돈 받고 판다는 듯. 전설에 따르면 옛날 다이다라봇치라는 거인이 하룻밤 만에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을 만들겠다고 땅을 파서 흙을 쌓아올렸는데, 마지막 한 삽을 퍼올리려고 할 때 닭이 울어 그만 삽에서 흙을 흘렸다. 그때 쌓은 산이 후지산이고 신령이 흙을 푼 구덩이가 비와 호이며, 마지막에 흘린 흙이 비와 호 옆에 있는 미카미산(三上山), 즉 오미후지(近江富士)가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흙을 못 쌓았기 때문에 후지산 꼭대기가 평평해졌다. 다이다라봇치는 그 한 삽이 아까워서 비와 호의 물을 후지산으로 보냈는데, 그 호숫물이 금명수와 은명수라고 한다. 그리고 후지산 정상 가까이가 비와 호와 연결되어 호숫물이 금명수ㆍ은명수로 흘러나온다고. 일본 다도계에서는 오쿠미야에서 나오는 은명수가 유명하다고 한다. 과거에 약사여래를 모시는 사찰이 있던 것도 금명수ㆍ은명수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서는 후지산 만년설 녹은 물이 흘러나온다고 보기도 한다.
근처에 자살 명소 주카이 숲이 있다. 단지 마경으로만이 아니라 물도 깨끗하기로 유명해서 생수로 팔린다.
일본에는 "후지산을 한 번도 오르지 않은 사람은 바보, 두 번 오른 사람 또한 바보(富士山に一度も登らぬ馬鹿、二度登る馬鹿)."라는 속담이 있다. 일본인들이 후지산을 사랑하는 마음과, 막상 올라가 보면 참 별 거 없는, 과대평가가 심한 곳이란 이중적인 뜻이 있다. 화산은 토양이 식생에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참 휑해서 가까이서 보는 풍경은 명성에 비해 별 것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이든 외국인이든 멀리서 보는 게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평이 대다수.
에도 시대 중엽, 신성한 산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금기 때문에 등산할 수 없는 여자나 몸이 약한 노인, 아이 등이 대리참배할 수 있도록 후지즈카(富士塚)라는 조그만 언덕을 만들기도 했다. 후지강 개조의 제자 타카다 토시로(高田藤四郎)가 남녀노소 후지산을 참배할 수 있도록 1780년 (오늘날 도쿄에 있는) 미즈이나리(水稲荷) 신사에 후지즈카를 만든 데서 시작하였다.[17] 우리나라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조산(造山)이다. 후지즈카는 대부분 신사의 경내에 있는데, 특히 (후지산신령을 제신으로 모시는) 센겐신사에 소재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신겐신사가 아닌 신사에 후지즈카가 있는 경우 또한 상당하다.
현존하는 후지즈카는 오래되어 보아야 18세기 말 - 19세기 초에 조성한 것이다. 몇몇 후지즈카는 일본의 중요유형민속문화재, 또는 각 지자체의 유형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대에도 따로 후지즈카를 조성하기도 한다.
후지즈카의 크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높이가 8-9 m 정도쯤 되면 큰 편이고 15 m에 달하는 것도 있다.[18] 작은 것은 높이가 고작 성인의 허리춤 정도에 불과하다. 어떤 후지즈카는 단순히 산 모양으로 흙과 돌 무더기를 쌓았을 뿐이지만, 어떤 후지즈카는 후지산에 있는 신사들이나 유명한 지역, 현재는 출입이 불가능한 곳 따위를 후지산에서 가지고 온 돌과 흙으로 제법 상세하게 재현하는 등 각양각색이다. 이런 후지즈카는 간토 지역에만 수백 곳이 넘는다고 한다.
신사에서 관리하는 후지즈카는 평상시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통제하다가 신사 측이 정한 특별한 날에만 '산 열기(山開き)'라 하여 들어가도록 허락하기도 한다. 후지산에 오르는 것을 등배(登拜)라 부르듯, 후지즈카에 오르는 것 또한 등배라 부르기도 한다. 신사들은 후지즈카의 꼭대기에 오르면 후자산 쪽을 향해 기도하라고 당부한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가나가와현 이세하라시에 있는 오야마산(大山)[19]과 쌍둥이처럼 연결되어 '후지산에 오른 사람은 오야마산에도 올라야 하고, 오야마산에 오른 사람은 후지산에도 올라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서구인으로서 첫 등반한 이는 초대 재일 영국 공사로 재직한 러더퍼드 올코크(1809-1907)이다. 그는 1860년 9월, 영국 외교관으로서 받은 특권을 이용하여 (본래라면 금지되었을) 후지산 등산을 하였다. 러더퍼드가 후지산 밑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일행이 거의 다이묘 행렬 수준이었다고 한다. 중간에 숙박을 했는데 오유(大湯) 간헐천의 뜨거운 물 때문에 러더퍼드가 기르던 스코티쉬 테리어 한 마리가 죽는 사고가 있었다. 죽은 개를 마을 사람들이 꽤 정성껏 묻어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러더퍼드는 후지산을 거창하게 등산하고 돌아왔지만, 서양인이 함부로 후지산에 올랐다고 하여 존황양이를 따르는 무사들이 빡이 쳤다. 그래서 1861년 1월에 양이파 무사들이 습격하여 주일 미국대사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던 헨리 휴스켄(Henry Heusken)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20]

7. 경치


[image]
후지산의 일출.
[image]
도쿄에서 바라본 후지산. 사실 육안으로는 후지산이 저렇게 크게 보이지 않는다. 멀리서 망원렌즈로 줌을 당겨야 저렇게 보인다.[21]
[image]
모토하코네(元箱根)에서 쳐다본 모습. 바로 앞은 아시노호수(芦ノ湖)
[image]
천엔권 지폐 뒷면의 '호수에 비친 후지산', 배경은 야마나시현후지5호 중 모토스 호수에서 바라본 풍경이다.[22]
[image]
후지산과 신칸센 100계 전동차, 벚꽃. 서양 쪽에는 가장 잘 알려진 모습으로, 쇼와시대 중후반 일본의 경제번영 시대를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 여러 사진사가 이 구도를 오마주했다. 버전에 따라서는 벚꽃 대신에 토네강의 철교가 들어가기도 한다. 시즈오카현 후지시 시민 복지 플라자 앞에 있는 밭에서 찍은 사진이다.

8. 대분화 가능성


[image]
후지산 상공에서 바라본 도쿄 도심.

후지산은 명백한 활화산이며, 역사적으로도 수 차례의 분화기록이 남아있어, 가까운 미래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서도 대책을 마련하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대분화가 일어난 시기는 1707년. 이 때 에도 시에까지 화산재가 밀어닥쳐 '호에이 대분화'라 불렸다. 다만 이후로는 큰 화산활동이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2011년, 도호쿠 대지진으로 후지산이 다시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심증이 산케이 신문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정황상 추정에 불과하지만, 대지진이 일어난 후 시즈오카현의 강진,[23] 하코네 화산대에서의 군발 지진을 근거로 삼았다. 다만 일본 기상청에서는 진원지가 다르고 해당 지진과 후지산 폭발의 메커니즘이 다르다며 이러한 주장을 일축했다.[24]
2011년 8월 26일, 후지산 부근의 마을들에서 수돗물을 틀면 수돗물이 데워져서 나오고, 새들이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다는 풍문이 돌았다.
2020년 말, 후지산 눈이 다시 녹았다
2011년 말과 2012년 초의 겨울에 후지산 꼭대기의 만년설이 녹았다는 말이 있으나,[25] 후지산 꼭대기에 있는 건 일단 만년설이 아니라서 해와 계절마다 높이가 달라진다.[26] 물론 눈이 많이 녹긴 했지만, 반드시 화산 폭발의 징조라고 보기만도 어렵다.
2013년 3월 30일, 후지산에서 이상징후가 포착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
도카이 대지진과 묶이기도 한다. 실제로 1707년에는 동시에 일어났다.[27] 또한 1707년 후지산 분화의 기록 등에 따르면, 분화 시작 49일 전인 10월 4일에 규모 8.6~8.7인 대지진이 발생했으며, 지진 피해는 도카이도, 기이 반도, 시코쿠까지 이르러 사망자만 2만 명 이상, 가옥 6만 호 파손, 쓰나미에 의한 유실 가옥이 2만 호에 이르렀다는 기술이 있다고 한다. #
2014년에는 일본 정부 차원에서 후지산 대폭발을 가정한 재난대비 실전 훈련 또한 대규모로 진행하였다. 후지산이 3백 년 전처럼 대폭발 한다면 흘러내리는 용암을 피해 가나가와, 시즈오카, 야마나시 현 주민 75만 명이 피난길에 올라야 한다고 한다. 日, 후지산 폭발 가정한 재난대비 실전 훈련 참고로 이번 훈련은 일본 기상청이 분화를 1∼2개월 전에 미리 예측해낸다는 가정 하에 실시했고, 온타케산 분화처럼 돌발적인 '수증기 폭발' 상황은 상정하지 않았다. 일본서 후지산 분화 대비 대규모 대피훈련
일본 정부가 후지산 폭발을 상정해 피해규모를 시뮬레이션 해본 결과 3시간 만에 도쿄 도심과 주변 도시들에 화산재가 도달해 자동차 및 철도운행이 정지되고 수도기능이 마비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日 후지산 폭발 시뮬레이션 결과 발표,"3시간 만에 도쿄 마비"
이 탓인지 일본에서는 후지산 분화대비 세계 최초 화산보험 상품 또한 등장하였다고 한다. 일본서 후지산 분화대비 '보험' 등장…세계 최초 화산보험 상품
일본 정부는 과거 2004년 후지산방재검토위원회 보고서에서 화산이 분출하면 피해액 2조 5천억 엔(24조 5천억 원)어치가 발생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항공편이나 기타 운송 수단, 2차 인프라에 미치는 영향까지 계산하면 비용은 이를 훨씬 상회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어 실제 피해규모는 그 이상이리라 추정한다. # # 한편 후지산방재검토위원회는 사망자 수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피해예상지역의 주민 수를 약 13만 6천 명으로 추산했다. 후지산 대폭발 언제일까?
후지산이 폭발한다면 시나리오는 크게 두 가지라고 예상한다. 하나는 헤이안 시대이던 864~866년에 일어난 분화처럼 화산 폭발로 마그마가 흘러내리는 경우, 또 다른 하나는 1707년 '호에이 분화'처럼 화산재를 대량으로 뿜어내는 분화가 일어나는 경우이다. '후지산 대분화' 예상 시나리오

9. 기타


  • 의외로 일본인들도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후지산의 8할은 사유지라는 것. 물론 신사의 사유지이긴 하지만.
>現在では多くの人が「富士山は国が保有しているもの」と考え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しかし、実は富士山の8合目以上の山頂は国や県ではなく、全国に1300以上あり、富士山本宮浅間大社が保有している私有地です。 1871年、明治政府が一時期、富士山を国有化します。
>
>현재는 많은 일본인이 "후지산은 나라가 보유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실은 후지산 약 8할 이상의 봉우리는 나라나 현의 소유가 아닌, 전국에 약 1300 이상 있는 후지산 혼구센겐타이샤가 보유하고 있는 사유지입니다. 1871년, 메이지 정부가 일시적으로 후지산을 국유화하였습니다.
>출처: livejapan \'후지산의 비밀\'
  • 이 후지산 말고도 아키타현이나 나가노현, 군마현 등에 '후지'라고 불리는 산이 있다. 이 가운데 아키타 현의 산은 해발고도가 불과 39 m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아름다운 풍경이 있으면 으레 ○○금강이라는 이름이 붙듯이, 일본에서는 이 후지산을 따서 자기네 향토에서 좀 높거나 이름 있는 산의 별칭을 ○○후지라고 부르는 사례들(郷土富士)이 많다.
  •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꿈'에서 후지산 옆의 원전이 지진으로 터지면서 후지산이 녹아내리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결국 영화는 일본에서는 이 장면을 제외하고 개봉되었다. 후지산 기슭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근에 실제로 하마오카 원전이 있다.
  • 후지산 기슭(시즈오카 현 고텐바)에 육상자위대의 훈련장인 동후지 연습장이 위치해 있다. 매년 8월 말이 되면 여기서 자위대의 군사훈련 격인 '후지종합화력연습(富士総合火力演習)'을 시행한다.
  • 화낙의 본사와 사업장이 후지산 기슭 숲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사명도 'Fuji Automation Numerical Control'의 약칭이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끝내주게 폐쇄적인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다.
  • 상술한 것처럼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정말 별거 없는 황량한 풍경인데,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겉으로만 화려하고 실속 없는 사람을 후지산에 빗대기도 한다.[28]
  • 배드 뉴스 베어즈 3편 영화 시작 로고가 기존의 산이 아닌 후지산으로 등장한다. #
  • 도쿄도 내에는 후지미라는 지명이 붙은 곳은 예전에 후지산을 볼 수 있었던 장소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도시개발이 상당히 진행된 시점에서도 아주 일부이나마 후지산이 보이는 곳도 존재한다고 한다.
  • 2020년 12월에 후지산 일부분만 눈이 쌓이거나 눈이 다 녹는 등 이상징후가 나타나기도 했다.#

  • 일본의 등산 만화에서도 등장한다.

10. 관련 문서



[1] 일본이 대만을 식민지로 삼았던 시절에는 아니었다. 대만에 더 높은 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2] 한국인들에게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 취급을 받고 있는 것도, 일제강점기 당시의 일본에서 후지산을 영산 취급한 것의 영향을 받아 백두산을 '한민족의 영산'으로 민 것에 가깝다. 일제강점기 전까지는 단지 '크고 신령스러운 산' 정도의 취급이었다. 백두산 문서 참조.[3] '''御'''岳: 온타케산, '''珠'''江: 주장강, '''利'''島: 도시마섬, '''早'''川: 하야카와강, '''玉'''山: 위산산.[4] 개마고원(蓋馬高原)의 '개마'가 바로 이 개마이다. 일본어로 산을 뜻하는 야마(やま)의 어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5] 당시 발음은 'ㄱ'가 아니라 'ㅎ'발음에 가까웠다고 추정한다.[6] 일본어는 개음절 언어이므로 '븟'을 표기하기 위해 마지막에 모음이 추가되어야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고대 일본어는 거의 완전한 개음절 언어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러한 설은 더욱 탄력을 받는다.[7] 참고로 후지산의 어원으로 추정된다고 언급했던 '불함'은 몽골어 '부르한'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몽골에 부르한 산이 있다. 부르한-불함-부디-후지로 변화했을 인류계통학적인 이해가 필요.[8] 당시에는 화산이 여러 개 모여 있었다.[9] 일본에서는 비단 후지산만이 아니라 신성한 산이나 장소에 여자가 못 가게 하는 관습이 과거에는 많았고, 아직도 일부는 관습이 유지된다. 진언종의 성지 고야산도 19세기까지는 여자가 들어가지 못했고, 교토부 아야베(綾部)시에 있는 미센산(弥仙山)도 수험도의 성지로 19세기까지는 여자의 입산이 금지되었다. 1901년에 오모토의 개조 데구치 나오가 미센산에 짱박혔다가 인근 주민들에게 들킨 적이 있는데, 법적으로는 금기가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람들의 인식은 달라지지 않아 주민들은 나오에게 욕을 퍼붓고 경찰서에 데려갔을 정도. 후쿠오카현 무나카타시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 오키노시마(沖ノ島)는 아직도 여자는 섬에 들어갈 수 없는 관습을 유지한다.[10]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11]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12] 특히 에노시마에서 크게 보인다. 에노시마의 풍경을 담은 고미술품 등을 보면 후지산이 그려진 작품이 상당히 많다. 물론 거리가 거리다보니 날씨가 좋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13] 일본어로는 콘고즈에(こんごうづえ)라고 읽는다. 원래는 불교 수행자나 슈겐자 등이 여행하거나 순례할 때 쓰는 나무 지팡이. 시코쿠 88 사찰순례에서도 사람들이 금강장을 들고 다닌다. 원래는 금강저 중 독고저의 형상을 따서 만들었기 때문에 금강장이라고 이름한다고 한다.[14] 각 산장과 정상에서 300엔 남짓 돈을 내면 5고메에서 파는 금강장에 인두로 지져 스템프를 찍어주는데, 정상에서만이라도 스템프를 하나 찍기를 추천한다.[15] 후지산 정상 화장실은 감시 안 함.[16] 생각보다 건조하기 때문에 화장실을 잘 안 가게 될 것이다. 공기가 건조해서 목이 엄청 마르므로 물을 많이 챙겨가고, 그래도 부족할 수 있으니 돈을 넉넉히 챙겨가자. 차편과 숙박비, 그리고 기타 비용을 합쳐 15만 원 정도는 있어야 든든하게 등반할 수 있다.[17] 토야마번(富山藩: 오늘날 토야마시 일대)의 번주 마에다 마사토시(前田正甫)가 1702년 큰 정원을 만들면서 안에 후지산을 본딴 조산(造山)을 만들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원 조경의 일부였을 뿐이므로 후지신앙의 일부인 후지즈카와는 차이가 있다. 이 조산은 이소베후지(磯部富士)라고 불렸으나 마사토시가 죽은 이후 관리가 되지 않아 이리저리 훼손되다가 1957년에 완전히 철거되었다.[18] 그런데 후지즈카의 크기는 높이만이 아니라 조산의 지름까지 따지기 떄문에, 높이와 크기가 정 비례하지는 않는다.[19] 이세하라시(伊勢原市), 아츠기시(厚木市), 하다노시(秦野市) 사이에 있는 해발 1252 m짜리 산. 기원전 조몬 시대 제사용 토기가 산 정상에서 발견되는 등 유서 깊은 성산(聖山)인데, 아후리산(阿夫利, 雨降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산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오야마아후리신사(大山阿夫利神社)가 있는데, 오랫동안 일본불교와 습합되어 적어도 8세기부터는 '석존대권현石尊大権現 오야마사大山寺'라고 불리며 부동명왕을 모시는 절이 되었다. 그러다가 1868년 폐불훼석(廃仏毀釈) 때 불교와 분리되어 오야마사는 폐사되고 신토시설로 천수백여 년 만에 거듭났다.[20] 헨리 휴스켄의 묘가 도쿄 미나토구 코린사(光林寺)에 지금도 있다. 묘비 자체는 일본식인데 비면에 십자가와 영어 문장을 새겨 눈에 띈다.[21] 코쿠분지시부터 보인다고 한다. 그보다 앞인 니시도쿄시코가네이시에서는 안보인다는듯.[22] 유루캠△ 1기 1화에서 카가미하라 나데시코가 이 풍경을 본 계기로 캠핑에 관심을 갖게 된다.[23] 공교롭게도 후지산 바로 옆에서 발생했다. 아니면 후지산에서 일어났다고 해야될지도?[24] 사실 1200여 년 전 2011년 도호쿠 대지진과 진앙지가 같은 산리쿠 해역 지진(조칸 대지진) 발생 5년 전에 후지산은 대폭발을 일으켰다.(조칸 대분화)[25] 2011/01/14 사진 - 2011/12/10 사진 - 2012/01/13 사진[26] 이 때문에 정상 개방은 눈이 녹는 6-8월 사이 여름에만 한다. 그래도 밤에는 영하로 내려갈 만큼 춥다고 한다.[27]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호에이 지진은 10월 28일, 호에이 대분화는 12월 26일에 일어났다고 한다.[28] 유명한 케이스로 일본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역임한 유아사 구라헤이에게 후지산이라고 디스당한 케이스가 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