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3년 울산 대지진

 

1643년 울산 근해 지진
발생일시
(UTC+9)

1643년 7월 24일-7월 25일. 신시(15~17시경)
진앙
지금의 울산광역시 인근 해안
규모
(추정)

'''M 6.5''' (NOAA)
'''M 6.7''' (KMA, 이기화; Lee&Yang(2006))
'''M 7.0~7.4''' (손문 부산대학교 교수)#
'''M 6.3~7.0'''(가사하라 준조 도쿄대 명예교수)
감진반경
'''301.9km'''#
최대 진도
(메르칼리, 추정)

'''VIII''' (NOAA)
'''VIII~IX''' (이기화; Lee&Yang(2006))
'''IX'''~'''X''' (KMA)#[1]
최대 진도
(일본 기준으로 환산, 추정치)

'''진도 7'''(메르칼리 진도 최대 추정치 값 환산)
피해상황
(추정)

재산피해
가옥 최소 140채 붕괴
건답 최소 6곳 붕괴
지진해일 여부
'''있음'''
1. 개요
2. 지진 이전
2.1. 1643년 5월 30일 동래 지진
2.2. 1643년 6월 9일 진주 지진
3. 1643년 7월 24일 울산 대지진
4. 조선 조정의 대응
5. 이후의 타임라인
6. 참고문헌
7. 같이보기


1. 개요


1643년(인조 21년) 7월 24일(음력 6월 9일) 울산 앞바다서 일어난 지진이다.

2. 지진 이전


17세기에는 유달리 역사에 지진이 많이 기록되었는데, 1643년은 총 4번의 지진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 서울에서 진도를 느끼는 수준의 기록이 있는 지진은 5월 30일 동래 지진과 7월 24일 울산 대지진이다.

2.1. 1643년 5월 30일 동래 지진


울산 지진이 일어나기 전인 5월 말, 동래에서 추정규모 M 6.4, 추정 최대진도 VIII 정도의 지진이 발생했다. 발생 당일 실록에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지만 이후의 내용을 보면 큰 피해를 가져 온 매우 강한 지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진이 있었다.

4월 13일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때 부산뿐만 아니라 경기, 충청, 경상도 등 여러 지방에서 장계가 올라왔는데 그 중 몇 개를 보자면 아래와 같다.

경상감사 장계의 내용이다. 이번 달 13일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대구부에 지진이 크게 있었다.

4월 16일


경상감사 서목의 내용이다. 이번 달 13일에 지진이 일어나는 변괴가 있었다. 산곡과 해변이 모두 그러하였다. 처음 동래로부터 큰 지진이 있었으며, 연변(해안가) 지방이 더욱 심하였는데, 마른우물에 물이 다시 솟아나고 오래된 담장이 무너졌다. 청도와 밀양 사이에서는 암석이 무너져 내렸다. 초계 지역에서는 진동하던 때에 건천(마른 하천)에서 역시 탁한 물이 나왔다. 변괴하고 비상한 일이다.

4월 20일 근황


2.2. 1643년 6월 9일 진주 지진


앞서 추정 최대진도 VIII의 동래 지진이 발생한 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았을 때 이번에는 진주에서 '''규모 6.4~6.7, 최대진도 VIII~IX'''[2]로 추정되는 지진이 일어났다. 경상감사 서목의 내용을 보면 합천군서 바위가 무너져 2명이 사망했고 마른 샘에 흙탕물이 넘쳤으며 관문의 앞길 땅이 10장이나 갈라졌으며 소나무 5~60그루가 쓰러졌다고 한다. 즉, 확정할 수 있는 인명피해는 사망자 2명인 셈.
구분/주체
Lee&Yang(2006)
김소구(1982)
규모
M 6.4
M 6.7
최대진도
VIII
VIII~IX

3. 1643년 7월 24일 울산 대지진


남해안과 경상도, 전라도에서 지진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던 중 마침내 1643년 7월 24일(음력 6월 9일) 울산 근해에서 진도 VIII~'''X'''[3]로 추산되는 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은 울산,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진동이 기록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이기화 교수와 기상청은 이 지진의 규모를 M6.7로 추정한다. 한편, 부산대학교 지질환경과학과 손문 교수는 M7.0~'''M7.4(!)'''로 추정한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KIGAM) 지헌철 박사의 경우 이 지진에서 일어났던 여러 현상들은 적어도 '''진도 VIII''' 정도는 되어야 일어나는 것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경상감사 장계의 내용이다. 좌도가 안동에서부터 동해 · 영덕 이하를 경유해 돌아서 김천 각 읍에 이르기까지, '''이번 달 초 9일(辛未) 신시(오후 3시-5시), 초 10일 진시(오전 7시-9시)에 두 번 지진이 있었다. 성벽이 무너짐이 많았다. 울산 역시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마찬가지로 지진이 있었다.''' 울산부의 동쪽 13리 밀물과 썰물이 출입하는 곳에서 물이 끓어올랐는데, 마치 바다 가운데 큰 파도가 육지로 1,2보 나왔다가 되돌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건답 6곳이 무너졌고, 물이 샘처럼 솟았으며, 물이 넘자 구멍이 다시 합쳐졌다. 물이 솟아난 곳에 각각 흰 모래 1,2두가 나와 쌓였다.

《승정원일기》 6월 21일

한양에 지진이 있었다. 경상도의 대구·안동·김해·영덕 등 지역의 고을에도 지진이 있어 '''연대(烟臺)와 성첩(城堞)이 많이 무너졌다. 울산부에서는 땅이 갈라지고 물이 솟구쳐 나왔다.''' 전라도에도 지진이 있었다. 화순현에서는 부자(父子)가 벼락을 맞아 죽었고, 영광군에서는 형제가 말을 타고 들에 나갔다가 말과 함께 일시에 벼락맞아 죽었다.

《조선왕조실록》 1643년 6월 9일 1번째 기사

신시(申時)에 '''땅이 흔들리더니 울산도호부(蔚山都護府)의 관아가 무너졌다.'''땅이 흔들리며 도호부 '''남쪽 황룡연의 물이 갑작스레 줄었다.'''[4]

병영에서는 초기에는 흔들거림이 있다가 갑작스레 우물이 넘쳐나고 개울이 요동치니 천지가 흔들리는듯 하였다고 하였다.. 이후 흔들림이 멈추었다가 갑자기 더욱 땅이 요동치며 황룡연의 용이 승천하는듯 마른하늘에 천둥이 쳤다. 이후 병영의 외성과 문루가 무너저 내리고 병영내외의 가옥들이 돌에 깔리거나 주저 않았으며 멀리 병영의 남문[5]과 관아가 쓰러지며 커다란 구름이 생기었다. '''병영에서는 백성들의가옥 140여호가 무너져 내렸다.''' 읍내에는 먼지가 자욱하여 백성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염포포구에는 물이 들어찼다..

《울산군관읍지》 1650년도 6월 관련사건 '2권 30장 5구절' '''울산도호부에 지진이 일어나다.'''

쓰나미, 토양 액상화, 건물 붕괴, 모래 화산 등등의 지진으로 인한 각종 재난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유례가 없는 엄청난 지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본진 이후에도 서울서 느낄 정도의 강한 여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만 보아도 울산 지역은 초토화인데 당시 민간에서 출판한 '''울산 군관읍지'''에 기록에는 울산 경상좌도병영에 있던 관아건물들이 모조리 무너지고 2층 문루로 된 울산병영성 남문이 주저 앉고 성벽 인근 집들 140여호가 무너진 성벽에 깔리거나 붕괴되어 성 안과 밖에 멀쩡한 가옥이 단 한 채도 없었다고 한다. -
내륙에 있던 울산관아가 이 정도였는데 지금의 울산 동구 지역과 울산 남구 해안 지역은 답도없는 상황이었다. 인명피해는 알 수 없으나, 기록으로 보아 심각한 인명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조선 조정의 대응


6월 9일(음력 4월 23일) 조당에서 지진을 두고 해괴제를 해야 한다는 간언이 있었지만, 인조는 현안이 더 시급하다고 하며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8일(음력 5월 14일) 대사헌의 상소에서도 대규모 지진이 언급된다.

대사헌 이식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전략) 지금과 같은 지진과 물이 솟구쳐 나온 재변은 과거의 기록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바이고 보면 앞으로 그 대응으로 일어날 재난이 어느 정도로 심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진정 성명께서 가슴을 조이며 몸을 닦으실 때로서 신들이 끝내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하략)"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 차자의 주된 뜻은 성상으로 하여금 근본을 바르게 하고 발원지를 맑게 하며 억울한 사정을 펴주고 민생을 보전하기를 바라는 것이니, 다시 더 유념하여 깊이 성찰하소서."하니, 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5. 이후의 타임라인


발생일자
추정최대진도
추정규모
발생지
사상자
비고
출처
1643. 7. 24.
'''VIII~X'''
'''M6.5~7.4'''
울산광역시 인근 해안
불명
쓰나미 발생
조선왕조실록
한국기상기록집
NOAA
1668. 7. 25.
'''XII'''
'''M8.5'''
중국 산둥성
사망자 42,758명
'''진도 XII'''
NOAA
1668. 7. 31.
'''VI'''
'''M6.4'''
황해
불명

김소구 교수 논문[A]
1681. 6. 12.
'''VIII'''
'''M6.5'''
강원도 양양군 인근 해안
불명

한국기상기록집
KMA 지진연구소 논문[B]
1681. 6. 26.
'''VIII~IX'''
'''M7.5'''
강원도 양양군 인근 해안
불명
쓰나미 발생
KMA, NGDC
1703. 12. 31.
'''7'''
'''M8.2'''
일본 보소 반도 남서쪽 바다
사망자 5,233명
쓰나미 발생
최대높이 10.50m
NOAA
1707. 10. 28.
'''7'''
'''M8.6~9.3'''
일본 난카이 해역[6]
사망자 5,000여 명
쓰나미 발생
최대높이 '''25.70m'''
NOAA
※ 여기서 1668년 4월과 1702년에는 백두산이 분화하였고, 호에이 대지진으로부터 2개월 후였던 1707년 12월 26일에는 후지산이 호에이 대분화를 일으켰다.

6. 참고문헌



7. 같이보기




[1] 기상청 2016 지진포커스 통권7호 28쪽.[2] 이기화 ; Lee&Yang(2006), 김소구(1982)[3] 이전에는 기상청에서도 이 지진의 최대진도를 VIII~IX로 예상했지만, 지난 2016년 발간된 2016 지진포커스 통권7호 28쪽에서 최대진도를 '''IX~X'''로 함에 따라 사실상 추정진도가 증가하였다. 진도 X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안 간다면,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진도 항목의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파트를 참조하라. 진도 X는 일본 기상청의 최대진도 '''7'''에 대응된다.[4] 이점으로 미루어보아 쓰나미의 전조현상인 물빠짐 현상이 일어난것으로 유추된다.[5] 1층:진남루(鎭南樓) 2층:물거루(勿去樓)[A] 김소구, 1982년, '한반도와 그 인접지역의 지진'[B] 2002년, '1681년 6월 12일, 17일, 그리고 26일 양양-삼척 근해에서 발생한 지진기록의 분석'[6] 도카이, 도난카이, 난카이 '''셋 다 연동하여 발생'''한, 무서운 지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