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콤그룹

 


1939년 4월 조선공산당 임원 주도로 형성된 일제강점기 말기의 항일 공산주의 비밀 결사.
정식 명칭은 경성 코뮤니스트 그룹으로, 코뮤니스트를 줄여서 ''''''이라고 불렸다. 프랑스어식으로 읽어서 경성 ''''''그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주요 임원으로는 박헌영, 김삼룡, 이관술, 이재유 등이 있었다.
경성 콤그룹은 일제 강점기 말기 중일전쟁이 발발 이후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일본제국 경찰의 가혹한 탄압으로 강제로 공산주의와 독립 운동을 포기하고 전향하던 흑역사 시기에 결성되었다. 대표적으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1]이라는 사상 전향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등 많은 사람들이 전향을 해서 반강제로 가입할 수 밖에 없던 단체.
즉, 일제 말기 건국동맹과 더불어 국내에 남은 얼마 안되는 지하 항일 독립 운동 단체인 것이다.
이 단체는 '조선 공산당 재건'이 최종 목표였다. 그래서 노동 운동 등을 지하 비밀리에 선전 및 주도하였다.
이 그룹에서는 일제의 패망이 필연적이며, 중일전쟁 이후 국내 반일독립운동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처럼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어 있다고 보고, 시급하게 당을 재건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았다. 동시에 이를 돌파할 자신들의 역량은 아직 빈약하며 노동자·농민의 계급의식도 박약하다고 진단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이 그룹에서는 반·분회 등에 기초한 노동·농민조합을 조직하고, 이를 기초로 당세포준비회지구 또는 지부준비회 열성자대회를 통한 당중앙 건설이라는 조직 건설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조직에서 김태준·이현상·정태식이 인민전선부에 배치되어 결정적 시기의 무장봉기에 대비한 경성지방의 지도 입수, 과거 활동가들의 상황 파악과 포섭 등의 구실을 수행한 점은 특히 주목된다.
또한, 태창직물주식회사·경성스프링제작소·조선계기회사·일본정공주식회사·일흥사·매일신보사·오쓰카인쇄소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경성제국대학·이화여자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경성고등공업학교에 조직원을 두었으며, 함경도의 주을광산과 청진, 경상남도의 창원군 상남면 적색농민조합분회와 대구·부산 지역에 조직원을 파견하였다
1941년 조직이 발각되면서 임원들이 대거 구속되어 사실상 해체되자 스탈린단, 자유와 독립 그룹, 임충석 그룹, 윤일 그룹, 조동호 그룹, 화요파 공산주의 그룹, 공산주의자 협의회 등으로 분파되어 각기 소규모 조직으로 움직였다. 해방을 맞이하자 경성 콤그룹의 주요 임원들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참고로 건국동맹은 1944년 8월에 결성. 8.15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한다.
일제 강점기 말기 '''국내파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최후 집결체'''로 평가받고 있다.

[1] 이후 대화숙(大和塾)으로 개편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