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건국준비위원회'''
'''朝鮮建國準備委員會
Committee for the Preparation of Korean Indepen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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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image]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명목상 영토
'''1945년 8월 15일 ~ 1945년 9월 7일'''
'''성립 이전'''
'''해체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


'''조선건국동맹'''
'''조선인민공화국'''
'''위치'''
한반도
'''수도'''
경성(서울)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정치체제'''
민주공화제
'''언어'''
한국어
'''민족'''
한민족
1. 개요
2. 건국 준비 위원회 선언
2.1. 강령
3. 의의
4. 한계
5. 역대 위원장
5.1.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역대 위원장
6. 관련 인물
7.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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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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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을 환영하는 인천 제물포 지부 건국준비위원회 회원들'''
'''YMCA에서 열린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모습 (1945년 8월 17일)[1]'''
여운형일제강점기 말에 조직한 지하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중심으로, 8.15 광복 이후에 출범시킨 정치조직. 약칭 건준 혹은 건준위. 영어 명칭은 Committee for the Preparation of Korean Independence 혹은 CPKI.[2]
1945년 8월 초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배가 유력해지자 당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일어날지 모를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의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의 민족지도자와 협력관계를 맺고자 했고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가 서울 중구 필동에서 여운형을 만나자고 하였다. 그리고는 치안권과 행정권 등 모든 권한을 여운형에게 이양하여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이에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조건을 제시하였다.

1. 전 조선의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집단 생활지인 경성의 3개월분의 식량을 확보하라.

3. 치안 유지와 건설사업에 아무런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라.

4. 조선의 추진력이 되는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화에 간섭하지 말라.

5. 전 조선에 있는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우리 건설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런 괴로움을 주지 말라.

여운형이 총독부와 교섭을 한 이유는 일본군이 철수하기 전에 조선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떠난다거나 광복 직후에 민간인중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한다는 이름으로 사적인 감정에 기인한 마구잡이식 보복성 살인으로 사회 분열이 일어나고 혼란이 일어나 힘없는 사람들이 거기에 말려 억울한 피해를 입을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총독부 정무총감은 당시 일제의 패망으로 항복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운형이 제시한 이 조건에 수락할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여운형은 자신이 이미 1년 전인 1944년 8월에 결성했던 지하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을 모체로 해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게 된다. 건준 위원장은 여운형, 부위원장은 안재홍이 맡았다. 여운형은 송진우에게도 영입을 제안했다. 동아일보 계열, 기독교 세력을 포함한 우익 진영을 포섭하려는 포석이었다. 그러나 송진우여운형의 제안을 거절했다. 8월 말까지 145개의 지부가 설립됐다.
총독부로부터 권한을 이양받은 직후 건준은 정권 접수 작업에 착수한다. 8월 16일 여운형이 내건 조건대로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의 정치범, 경제범이 석방된다. 아울러 산하조직으로 건국치안대와 식량대책위원회가 조직된다. YMCA 체육부 간사였던 장권이 중심이 된 건국치안대는 일제로부터 양도받은 무기로 무장하고 언론사 등 주요 공공기관을 대체했다. 건준의 지방 치안 조직도 일본 군경을 무력화했다. 식량대책위원회는 일제강점기 쌀의 공출과 배급을 담당하던 조선식량영단을 접수했다.
건준의 조직은 날로 확대되어 여운형, 안재홍이 이끄는 좌우파의 중도 세력뿐 아니라 조선공산당#s-3 등 거의 모든 주요 좌파 세력이 참여한다. 안재홍은 건준의 좌경화를 막기 위해 민족주의 세력을 영입하려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중 김병로, 이인 등은 안재홍을 통해 건준에 가입을 타진했으나 좌파의 저지로 실패했다.
그러나 이후 정치세력간의 이해관계와 이념적 차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표출되고 증폭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들 사이에 이합집산이 가속화되었다. 일제의 항복 직후 정세를 관망하던 우익세력들은 점차 결집하기 시작하였으며, 반면에 일사불란해 보이던 건국준비위원회는 내부적 균열을 겪게 되었다. 안재홍 등 우익세력은 “건국준비위원회가 초계급적 협조정신으로 명실상부한 과도기적 기구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좌경화되어 간다”며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탈퇴하였다. 이렇게 되자, 초기와는 달리 좌익세력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하게 되었으며, 건국준비위원회는 결국 조선공산당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면서 건준은 발전적 해체를 선언했다. 220여 개에 달하는 건준의 지부는 인민위원회로 재편됐다. 여운형은 미군정이 실시되기 전에 과도정부를 자처함으로써 협상 상대로 인정받고자 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무시와 임시정부[3]는 물론, 많은 국내의 한국인과 해외 여러나라에서 귀국하지도 못한 한국인에게도 불인정 받았다. 조선공산당으로 일방적으로 경도되어 있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인정 받게 되었으며,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면서 해체를 선언했다.

2. '''건국 준비 위원회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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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준비 위원회 서기국 9월 2일 발표 선언문'''
인류는 평화를 갈망하고 역사는 발전을 지향한다. 인류사상의 공전적참사인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우리 조선에도 해방의 날이 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로서 제국주의적 착취와 억압하에 모든 방면에 있어서 자유의 길이 막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36년간 우리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을 계속하여왔다. 이 자유 발전의 길을 열려는 모든 운동과 투쟁은 제국주의와 및 그와 결탁한 반동적 반민주주의적 세력에 의하여 완강히 거부되어왔다.
전후 문제의 국제적 해결에 따라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기반(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민족의 해방은 다난한 운동사상에 있어 겨우 새로운 일보를 내딛었음에 불과하나니 완전한 독립을 위한 허다한 투쟁은 아직 남아 있으며 새 국가의 건설을 위한 중대한 과업은 우리의 전도에 놓여 있다. 그러면 차제에 우리의 당면임무는 완전한 독립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하여 노력하는 데 있다. 일시적으로 국제세력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나, 그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도와줄지언정 방해치는 않을 것이다.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고 자유 발전의 길을 열기 위한 모든 진보적 투쟁은 전국적으고 전개되었고 국내의 진보적 민주주의적 여러 세력은 통일전선의 결성을 갈망하고 있나니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의하여 우리의 건국준비위원회는 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준비위원회는 우리 민족을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권에로 재조직하기 위한 새 국가건설의 준비기관인 동시에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적 제세력을 집결하기 위하여 각층각계에 완전히 해방된 통일전선이요, 결코 혼잡된 협동기관은 아니다. 왜 그런고 하면 여기에는 모든 반민주적 반동세력에대한 대중적 투쟁이 요청되는 까닭이다. 과거에 있어서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민족적 죄악을 범하였고 금후에도 그들은 해방 전 조선과 같이 그 건설도중에서 방해할 가능성이 있나니 이러한 반동세력, 즉 반민주주의적 세력과 싸워 이것을 극복 배제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하여 강력한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이 정권은 전국적 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된 인민위원으로서 구성될 것이며 그동안 해외에서 조선해방운동에 투신하여온 혁명전사와 그 결집체에 대하여서는 적당한 방법에 의하여 전심적으로 맞이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조선 전민족의 총의를 대표하며 이익을 보호할 만한 완전한 새 정권이 나와야 하며 이러한 새 정권이 확립되기까지의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본위원회는 조선의 치안을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의 완전한 독립국가조직을 실현하기 위하여 새 정권을 수립하는 한 개의 잠정적 임무를 다하려는 의도에서 아래와 같은 강령을 내세운다.

2.1. '''강령'''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우리는 전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요구를실현할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가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1945년 8월 28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민주주의민족전선사무국 편, 『조선해방』, 문우인서관, 1946>

3. 의의


건준은 남북과 좌우를 망라하여 '''한국 현대사 최초로 지방자치를 시행한 조직'''이였으며, 후에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정부화되면서 지부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8.15 광복 이후 공백된 행정과 치안을 안정시키고, 연합군 주둔 전까지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여운형 등 당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운영하여 민족에게 광복을 체감케 하였다.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건준의 의의를 아래와 같이 높게 평가하였다.

해방 후 건준 같은 조직이 돼 있지 않았으면 굉장한 혼란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충칭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해외에 주요 독립운동 단체들이 해외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방이 되기 전부터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파 계열들이 중심으로 건국동맹이 조직되었고, 그래서 해방이 되는 날부터 건준이 조직되어 활동하였기 때문에 안정이 어느 정도 되었다. 우선, 치안과 행정같은 주요 업무를 우리 스스로 주체적으로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4]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에드거 스노우 기자는 해방 후 조선에 와서 2개월간 머무르면서 정세를 알아보고 귀국한 뒤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미국은 아무 준비가 없이 조선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조선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다. 곧 정치적 준비가 있었다. 미국인이 만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살렸더라면 조선의 건설은 더 신속하고 유리하였을 것이다.

<에드거 스노 자서전>, 에드거 스노우 저. -제 4부 냉전- 문단 인용[5]


4. 한계


여운형의 좌우 합작 민주 독립국가라는 이상 자체가 현실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하였다. 광복 이후로 정치세력간의 이해관계와 이념적 차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표출되고 증폭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들 사이에 이합집산이 가속화되었다. 일제의 항복 직후 정세를 관망하던 우익세력들은 점차 결집하기 시작하였으며, 반면에 일사불란해 보이던 건국준비위원회는 내부적 균열을 겪게 되었다. 안재홍 등 우익세력은 “건국준비위원회가 초계급적 협조정신으로 명실상부한 과도기적 기구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좌경화되어 간다”며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탈퇴하였다. 이렇게 되자, 초기와는 달리 좌익세력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하게 되었으며, 건국준비위원회는 결국 조선공산당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
건준 위원장을 지냈던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건국준비위원회가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된 과정에 대해 '이것은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으며, 형님(여운형)에게는 박헌영 등 극렬 공산주의자와 손을 끊지 못하고 건준이 좌경화되어 이용당한 것이 정치생활 중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한계성을 지적하였다.

5. 역대 위원장


  • 초대 위원장: 여운형 (1945년 8월 15일 ~ 1945년 9월 7일)
  • 위원장 직무대리(건준위 제1부위원장): 안재홍 (1945년 9월 3일 ~ 1945년 9월 6일)
  • 위원장 직무대행 임시서리(건준위 제2부위원장): 양재하 (1945년 9월 6일 ~ 1945년 9월 7일)

건준은 각 시도마다 지부를 두었으며 각 지부는 8.15 광복 이후 공백기 동안 각 지방의 행정·치안을 담당하였다. 건준 해체 및 조선인민공화국 설립 이후로는 각 시도 인민위원회로 개편하였다.

5.1.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역대 위원장


  • 초대 위원장: 조만식 (1945년 8월 15일 ~ 1945년 8월 27일)

이후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만식을 만나 민족계열 위주의 건준에 동수의 공산주의자도 넣어 새로 조직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평남 건준은 8월 27일에 민족계열과 공산당측 각 16인으로 구성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平安南道 人民政治委員會)로 개편된다. 이후 조만식은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직을 이어서 유임하였지만, 이후 소련군정이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련합회의(10월 8~10일)를 거쳐 북조선 5도행정국(10월 28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1946년 2월 16일)로 독자 제도화하는 데에 있어 소련군정과 대립각을 견지해오다 중도 사임, 이후 김일성에 의해 연금된다.

6.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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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26일 매일신보에 게재된 건준위원 명단'''

7. 같이보기



[1] 뒤로 태극기와 건준 상징기를 볼 수 있다. 이 깃발은 이후 건준이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건국되면서도 쓰이게 된다.[2] The Preparatory Committee for National Construction 라는 번역어도 쓰이는데 CPKI에 비해 빈도가 적다.[3] 충칭에서 온 임정 측에서는 19년 3.1 운동으로 세워진 임시정부인데 또 다른 정부를 자처한 건준에 대해 불인정하였고, 한민당 계열에서는 국내조직이 전무한 임정측이 자신들에게 보다 더 이득이기에 반발하였다.[4] 출처: KBS 인물 현대사 여운형 편[5] 다만 에드거 스노우의 자서전에는 당시의 조직인 '건준'이 아닌 후행하는 조직인 '인민위원회'라고 명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