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공주
慶順公主
? ~ 1407년 9월 8일
1. 개요
조선 초기의 공주.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적녀로, 의안대군 이방석과 무안대군의 동복 누이이다.
태조의 딸들은 생몰년이 알려지지 않아 정확한 출생순서를 알 수 없어, 적녀들 중에서는 신의왕후 소생인 경신공주와 경선공주에 이은 셋째딸이자 막내딸로 추정되어 왔었다. 그러나 1387년에 지어진 이자춘 신도비문에 경순공주는 이제와 결혼했다고 쓰여 있는데 신의왕후의 두 딸은 아직 어리다고 쓰여 있으며, 태조실록에도 위화도 회군 당시 경신공주와 경선공주가 어렸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1] 등으로 보아 태조의 세 딸 중 장녀인 것으로 추정된다.
2. 생애
2.1. 조선의 공주가 되다
아버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흥안군 이제와 혼인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이 경순공주의 동복 동생인 이방번과 이방석을 살해하고 이방석을 세자로 옹립하거나 이방원을 견제하려 했던 공신들도 처형하면서 남편 이제도 처형되었다. 경순공주는 남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방원의 밑으로 들어가라고 설득하였으나, 강직한 성품이었던 이제는 듣지 않고 처남들과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2.2. 조선 최초로 출가하다
하루 아침에 동복 동생들과 남편을 잃은 경순공주는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며, '''조선 최초로 출가한 왕족'''이 되었다. 신덕왕후의 살아남은 유일한 자식이자 방번, 방석의 누나라는 신분 때문에 경순공주마저 이방원에게 화를 입을까 염려한 태조가 직접 딸의 머리를 깎아 출가시켰다. 이후로도 태조는 딸을 염려하고 그리워하여 자주 찾았다고 한다.
출가한 뒤 정업원인 청룡사에 몸을 의탁하였는데 이곳은 당시 갈 곳을 잃은 고려 왕족들의 처 등 왕실 여성들이 많이 지내고 있던 곳이었다. 공민왕의 2비인 혜비 등 왕실 여성들은 경순공주를 따뜻하게 맞아 위로해주었으며, 경순공주의 올케이자 의안대군의 부인인 현빈 심씨도 출가하여 청룡사에서 함께 지냈다고 한다.
2.3. 쓸쓸한 말년
이후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적극적인 숭유억불 정책을 펼쳐 사찰들을 폐쇄할 때도 정업원은 예외로 하고 신하들이 정업원의 예산이 사치스러운 것을 일컬어 폐쇄를 주장해도 유지시킨 것은, 정업원에 머물고 있는 누이 경순공주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2] . 다만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연로한 아버지 태조나 이복 오빠인 정종, 태종보다도 앞선 1407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입적하자 태종도 조문을 갔고, 정종과 태종은 애도하는 의미로 며칠 동안 고기 반찬을 피했다고 한다. 훗날 세종이 즉위하고 남편 이제가 신원되었으며, 부부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에 조카인 이윤으로 대를 이었다.
3. 대중매체
사극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김나우가 연기했다. 총명하고 다부진 여성으로 신덕왕후의 3자녀 중 가장 왕족답다. 방번은 지극히 평범한 10대 청소년에 불과하고 방석도 세자빈이 내시와 간통하다가 자결한 사건을 겪은 뒤 일탈을 일삼아 가뜩이나 몸이 좋지 않은 신덕왕후의 속을 까맣게 태우는데, 그럴 때마다 나서서 세자를 꾸짖고 바른 길을 가도록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지극한 효심으로 모시고, 완전히 벌어져 버린 이복 오라버니들과의 관계를 걱정하기도 하며 공주로서 역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동생들과 남편을 하루 아침에 잃는 비극을 목도하고 불가에 귀의하게 되며, 뒷날 궐을 나와 순행 중이던 이성계가 그녀가 수행 중인 절에 들러 만나게 되지만 묵언 수행 중이라 그리운 아버지에게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장면은 용의 눈물의 명장면 중 하나다. 그 뒤로는 무학과 같이 다니는 모습이 두어 차례 그려지다가, 이성계가 세상을 떠날 무렵 신덕왕후나 방석 등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환영을 볼 때 같이 등장하는 것을 끝으로 완전히 퇴장한다.
불교에 입문할 때 이성계가 손수 머리를 잘라주며 삭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진짜로 삭발했다. 장소도 실제 사찰인 순천 선암사이고 선암사 스님들이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이는 해당 에피소드가 방영된 56화 끝부분에 자막으로 선암사 스님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나온다. 김나우 본인도 불교 신자였고 친부모까지 촬영 장면을 참관하러 와 감회가 남달랐다고 한다.
[1] 태조실록 총서에 “경신공주(慶愼公主)·경선공주(慶善公主)·무안군(撫安君)·소도군(昭悼君)이 모두 나이 어렸으나 또한 따라왔으므로 … ”라는 기록이 있는데, 만약 경순공주가 막내딸이었다면 저 중에 굳이 경순공주만 쏙 빠져 있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2] 태종은 적극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펴기는 했지만 왕실과 관련된 사찰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유순한 정책을 취했다. 경순공주와 청룡사 말고도 아버지인 태조가 자주 찾았던 회암사의 경우에는 신하들이 뭐라 해도 아버지가 거기서 벌이는 불사에 대해 뭐라 하지 않았다. 사실 불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태종은 본인의 정치적 이상에 걸림돌이 되지 않거나 권력에 위협이 되지 않는 상대에게는 관대한 태도를 보인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