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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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태조 이성계의 7남이며 어머니는 신덕왕후 강씨이다.
2. 생애
고려에서는 어린 나이에 고공좌랑이 되었고 '''공양왕'''의 조카딸과 결혼했으며, 1388년에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기 전에 우왕이 요동 공략에 나선 장수의 가족들을 볼모로 삼으려고 하면서 포천으로 피신할 때 따라나섰다.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자 무안군에 봉해지면서 의흥친군위 절제사가 되었으며, 세자로 책봉될 예정이었지만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의 대신들이 '이방번은 거만하고 경솔해 볼품이 없으므로 공신들이 어렵게 여겨, 강씨가 낳은 아들 중에 세자를 세우려 한다면 이방석이 낫다'고 해서 이방석이 세자가 되었다.
물론 성격은 핑계고, 실제론 그의 혼인 관계가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의 부인 삼한국대부인 왕씨는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의 딸로, 다름아닌 공양왕의 조카딸이었다. 방번을 세자로 삼으면 태조 이성계가 끌어내린 공양왕의 형이 왕의 장인이 되는 사태가 벌어지니, 성품과 상관없이 그는 절대 세자가 될 수 없었다.[3]
1393년에 좌군절제사가 되었고 1395년에 병이 생겨 아버지 이성계가 2차례 동안 문병을 갔으며,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 때 살해당했다. 시호는 공순(恭順).
3. 성품
세자 결정과정에서 거론된 성품문제야 가장인 태조가 결정한 혼인관계를 대놓고 언급하기 껄끄러웠던 대신들의 핑계였지만, 실제로도 다소 경망스러운 구석이 있긴 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정황을 볼 때 동복동생 이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내준 게 이복형들(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 못지않게 불만스러웠던 모양. 이복형들도 부글부글 끓고 있었는데, 동복형이면서 밀린 본인은 오죽했을까.
조선왕조실록 "태조 14권, 7년(1398 무인 / 명나라 홍무(洪武) 31년) 8월 9일(임자)" 기사를 보면, 당시 정도전이 주도한 진법 훈련에 태만하게 대했던 절제사들의 명단 가운데 방번의 이름 역시 끼어 있어, 그가 사병 혁파에 반발하던 이복형들과 같은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방번이 세자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고 싶어서 하인들을 시켜서 궁궐을 정탐하게 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4. 왕자의 난을 방관하다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당시 방번을 찾아가서 합류하겠느냐고 물었는데, 방번은 시큰둥하게 거절했지만, 그 사실을 아바마마에게 아뢰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그냥 강 건너 불 구경한 셈이다.
이 부분이 큰 관심을 받지는 못하지만, 1차 왕자의 난에서 무안대군 방번은 어느 쪽으로 움직이건 '중대한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방번이 거느린 군사력이 막강했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는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군사력을 재편성했다. 이때 방번은 매형 이제, 이복형 이방과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었다. 방과는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아예 모른 척 할 순 없으니 방과를 대표로 맡긴 것이고, 방번과 이제는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다.
게다가 태조 3년 군제개편으로 이방원이 받아서 거느리고 있던 동북면 가별초까지 인계받는다. 방번의 하인들 중에는 말을 타거나 활을 쏘는 걸 즐기는 불량한 무리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개인적으로 거느린 사병 규모도 만만찮았다는 뜻이다. 심지어 왕자의 난 이후에도 방번의 하인들 잔당이 복수를 하려다가 이숙번에게 걸려서 진압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방원이 일부러 난을 일으키는 가운데 굳이 방번에게 '회유'를 했다는 것도, 이 시점에서 동원할 수 있는 방번의 군사력이 결코 적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방번 자신이 움직이고자 하면 왕자의 난에 대항을 하든 오히려 합류를 하든, 움직일 수 있었겠지만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 실록에서는 "방번이 세자 자리에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방석이 죽으면 자신이 자리를 이어 받을 것이라고 하인들이 말하자 그 말을 믿고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했으며, 사람들이 이를 '''비웃었다'''고 언급한다.
5. 방번의 처분에 대해서
아무튼 난에서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 자신의 목숨까지 앗아가게 될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 때 이복형 이방원을 따라 난에 합류했으면, 비참하게 죽은 남동생 이방석과는 달리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다만 실록의 기록으로는 이방원이 "남은 등이 이미 우리 무리를 제거하게 된다면 너도 또한 마침내 면할 수가 없는 까닭으로, 내가 너를 부른 것인데, 너는 어찌 따르지 않았는가? 지금 비록 외방에 나가더라도 얼마 안 되어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약속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실록에서는 이성계가 "방번은 세자 방석과는 달리 죽지는 않고 귀양만 갈 것"이라 생각해서 내보내주었으나, 방간 등이 도당에서 논의해 방번, 방석 등을 죽이니 이방원이 이숙번에게만 "이거이 부자들이 나에게는 알리지도 않고서 도당에게만 의논하여 나의 동기를 살해했는데, 지금 인심이 안정되지 않은 까닭으로 '내가 속으로 견디어 참으면서' 감히 성낸 기색을 보이지 못하니, 그대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5] 라고 했다고 한다.
이 당시 실록의 기록을 무작정 신뢰하긴 어렵겠지만 이방원 입장에서도 세자의 위치에 어린 방석을 올렸고 세자 외 다른 왕자들과 종친들을 모해했다는 명분만으로 난을 일으켰다는데 방번 역시 같이 정도전, 남은 등에게 같이 정치적 견제를 받는 처지였다는 점이나 난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는 부분, 세자위와는 별 상관없는 방번까지 살해했다면 정치적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다는 점, 자신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마음대로 일을 처리했다는 점에 화가 났을 수도 있다. 물론 방석에 대한 처분도 같이 화를 냈다는 것이니 곧이 곧대로 믿긴 어렵겠지만.
6. 후일담
사후에 태종 대에 공순군의 시호를 받고, 어린 나이에 죽었기에 후사가 없어 세종 대에 세종의 다섯 번째 아들 광평대군을 그의 양손자로 입적하여 후사를 잇도록 했다. 다만 광평대군 역시 20세의 나이로 요절(...).[6]
그러나 이 정도면 동생 이방석보다는 나은데 이방번의 양손자 광평대군의 후손들은 광평대군이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만 빼면 이후 무난한 삶을 살아서 이방번의 후사는 문제 없이 잘 이어졌으나 이방석의 양손자로 입적된 금성대군은 요절하지는 않았으나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에게 반대하다가 폐서인당하고 유배되어 이방석의 봉사손 지명이 철회되었고 단종을 복위하려다가 세조에게 사형당했다...
태종에 의해 숙청되어서 왕실에서 제명되어 있다가 훗날 숙종에 의해 동생과 함께 복권된다.
7. 미디어
용의 눈물에선 실록의 기록을 충실히 참조했다. 배우는 정태우.[7][8][9] 경망스런 성품으로 이방석이 주색에 빠져 엇나가는데 한 몫 단단히 했다. 이숙번이 무장들을 이끌고 쳐들어와 이성계의 처소에 피난 와 있던 방번과 이제를 내어 달라 청하고, 이성계는 '''"방석이야 가만 안 놔두겠지만 방번과 이제야 죽이긴 하겠냐. 귀양이나 보내겠지."''' 하면서 내준다. 이후 방원은 방석을 죽였지만, "방번은 죄가 없으니 그냥 보내라"고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이방간이 "인정을 베풀 때가 아니다"라고 쫓아가서 이제와 함께 죽인다. 살려주겠다던 이방원은 "형님!"하고 한번 크게 외쳐 말리는 시늉만 하고 그냥 구경만 한다. 다만 본작의 방번은 방석과 상당히 사이가 좋은 것으로 나온다.
정도전에서는 용의 눈물과 달리, 친동생 이방석과 척을 지고 이복형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나온다. 이방과, 이방원도 방석에게는 까탈스럽게 굴어도 방번은 동생으로 대접해주는 면모를 보여준다. 그외에는 딱히 비중이 없다가 1차 왕자의 난 와중에 피살당했다는 사실과 시신만 나온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이방석과는 달리 거의 공기 신세. 전원에게 군호를 내려줄 때와, 이성계가 왕자들을 불러 전쟁 나가자고 부탁할 때 잠깐 나온다. 무인정사 때도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48화에서 이방간이 "여기도 아기 그 아새끼 모가지 하나 따니까 전부 항복하드라." 라는 말하는 것이나 초반에 이방번의 호위병으로 보이는 자들이 이방간의 사병들에게 포위되어 칼을 내려놓는 장면 등으로 보아 이방간이 죽인 것 같다. 다음으로 이방원이 세자에 대해 묻고, 이방원에 의해 이방석도 살해당한다.
[1] 후술하겠지만 공양왕의 동생인 귀의군 왕우의 딸이다.[2] 양자이다.[3] 비슷한 사례로 중종이 있는데 이쪽은 성종에게 왕비 소생 아들이 폐비 윤씨 소생 연산군과 정현왕후 소생 진성대군 둘 뿐 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중종의 즉위 직후 아내 신씨를 폐출하는 조치를 취했다.[4] 고향에 유배라 명목은 유배라고 해도 근처에 본거지가 있기에 정치활동 자체는 두 번 다시 할 수 없게 되지만 그간 있던 재산으로 호사를 누리는게 가능한 가장 온건한 형태의 숙청이라 보는게 맞을것이다.[5] 하지만 이 발언이 태종의 진심일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이거이가 나중에 숙청될 때 이거이에게 정황이 모호한 발언을 문제삼고서 그는 고향 근처에 유배[4] 되었는데 태종이 진짜 당시 화가 났고 나중에 그 때의 화를 문제삼기 시작하면 여기서 끝날 수가 없다.[6] 그러나 광평대군에게는 갓난 아이였던 아들 영순군이 있었고, 그를 통해 대를 이어 지금까지 후손이 있다. 그래서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광평대군파 묘역에 무안대군 묘도 같이 있는 것. 여담으로 1900년에 편찬된 선원속보(璿源續譜)를 보면 표제에는 무안대군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파로 입계(入系)하는 경우에는 광평대군으로 언급하고 있다.[7] 정태우는 사극에서 거의 다 요절 전문 배역을 맡았기에, 사실상 배역에서부터 무안대군의 사망 플래그는 확정. 그럴 것이 정태우는 아역 배우 출신이고, 아역이나 청년 배우들은 보통 사극에서 누군가의 어리거나 젊은 시절 아니면 일찍 죽는 인물을 자주 맡기 때문이다.[8] 참고로 방석 역의 양희석보다 두 살 어리다(...).[9] 무안대군 부인 역을 박루시아가 맡았는데, 박루시아하고는 한명회에서도 부부역할을 한 적이 있다. 거기서는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