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안대군(이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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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태조의 8남.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다. '''조선 최초의 세자'''이자, 첫번째 폐세자이기도 하다.
2. 형제
'''동복''' 형제로 누나인 경순공주와 형인 무안대군(이방번)이 있으며, '''이복''' 형제로 진안대군(이방우), 영안군(이방과, 후의 정종), 익안대군(이방의), 회안대군(이방간)[2] , 정안군(이방원, 후의 태종) 이렇게 5명의 형이 있다. 이 외에도 여섯째 덕안대군(이방연)이 있었으나 이쪽은 너무 일찍 죽어 별다른 기록이 없다.[3]
3. 일생
3.1. 세자 책봉, 하지만…
1392년 8월, 조선 개국 '''1달여만'''에 불과 10살의 나이로 신덕왕후의 욕심과 태조의 뜻에 따라, 장성하고 쟁쟁한 형들을 죄다 밀쳐내고 세자가 되는데 이는 훗날 1차 왕자의 난의 계기가 된다.
본디 개국공신들은 유학자들답게 적장자 계승과 공이 있는 사람을 세자로 올리길 원했으나 태조가 이방번을 밀었고, 결국 그의 형인 방번이 세자로 내정되었으나 공신들인 배극렴, 조준, 정도전 세 사람이 '방번은 성격이 더러워서 안 된다고' 간하여 방석으로 교체되었다. 물론 성격문제는 핑계였고 실제론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 껄끄러운 이유가 있었다. 무안대군 이방번은 공양왕의 조카 사위이기에 방번이 세자가 됐다가는 태조가 죽인 공양왕의 형이 조선의 국구(임금의 장인)가 되는 사태가 발생하기에 그는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도 세자가 될 수 없었다.
세자 책봉 이후 현빈 유씨를 세자빈으로 맞아들였으나, 어린 세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세자빈은 '''내시'''(!) 이만이란 자와 간통을 했다.[4] 이게 밝혀지자 이만은 참수되고 유씨는 폐출되었다.[5][6] 이후 1397년 심효생의 딸을 다시 세자빈으로 맞아들여서 15세에 아들을 낳았다. 다만 이 아들은 후에 일찍 죽었는지 그의 대는 끊겼고,[7] 세종대왕의 6남 금성대군이 그의 양자로 입적된다. 다만 금성대군 역시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처형된다(...). 그래서 이방석의 제사는 세조의 이복 동생인 밀성군 집안에서 맡고 있다.
3.1.1. 이방석이 세자가 된 이유
이방석이 세자가 된 이유에는 여말선초의 복잡한 정치 상황을 살펴봐야 알 수 있는 뒷사정이 존재한다.
이성계는 전 왕조의 왕족 몰살이라는 전례가 드문 일을 벌일 만큼 구 왕조와의 확실한 결별을 원했는데, 문제는 이성계가 고려에 귀순해 중앙 정계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들들을 고려 지배층의 딸들과 혼인시켰고, 이후 조선을 건국할 때는 11살이었던 방석을 제외한 모든 아들들이 어떤 식으로든 고려 구 세력, 심하면 고려 왕족과 혼맥으로 깊게 이어져 있었다. 이런 혼맥은 변방 무장 출신인 태조가 중앙 정계에 순조롭게 편입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새 왕조를 세운 뒤에는 오히려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성계의 아들들의 혼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신의왕후 한씨 소생 다섯 아들을 보면
- 이방우 - 판숭경부사 지윤의 딸과 결혼했고[8] 방우의 딸은 이색[9] 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들였다. 게다가 방우는 명나라에 창왕 즉위 사신으로 갈 정도로 이색과 함께 창왕 옹립에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10][11]
- 이방과 - 증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과 혼인했고 지윤의 두 딸을 첩으로 들였다.[12]
- 이방의 -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과 혼인했는데 최인두는 동주 최씨로 바로 그 최영과 친인척관계에 있다.
- 이방간 -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과 혼인했는데 후술할 권문세족 일가다.
- 이방원 -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과 혼인했다. 민선과 민제는 모두 여흥 민씨(황려 민씨)로 고려에서 재상지종으로 불린 유력 권문세가다.
- 이방연 -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과 혼인했다. 이방원의 부인인 원경왕후의 여동생이라서 겹사돈이다.
- 경순공주 - 이제와 혼인했는데 이제는 고려말 권신인 이인임의 조카다.
- 이방번 -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의 딸과 결혼했는데 왕우는 공양왕의 친동생이며 결국 이방번은 공양왕과 조카사위관계다.
이 고려 구세력과 엮이지 않았다는 점은 굉장히 중요한 이유인데 현재 학계에선 태조 때는 신권이 강했고, 태종 때에 강력한 왕권을 형성했다는 통설을 부정하거나 최소한 태조 대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태종의 즉위가 왕권에 대한 신권의 승리이며 신하들의 눈치를 더 많이 봐야 했고, 특권층을 대량 양산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태종이 집권을 위해 고려 구세력과 결탁, 그 대가로 태조 시대의 개혁이 크게 후퇴하고 특권층이 늘어나 '비특권적 관료들을 지속적으로 육성하고, 간관과 대신의 상호 견제로 인사권을 쥐고 군림하는 왕을 받친다'는 정도전의 개혁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태종이 높이 평가받는 건 그런 상황에서 대신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최대한 중도적인 정치를 하고, 대신들을 어느 정도 쳐내, 자신의 능력으로 균형을 잡고 안전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이지 그의 즉위 자체는 엄밀히 말해 혁신의 좌절이였다.
14세기 할 수 있는 모든 개혁을 전면적으로 추진해 특권층이 재추를 독점해 도당에서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고려식 정치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이가 정도전이고 그의 비전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태조에게 고려 구세력과의 접점이 없는 후계자는 굉장히 중요했다. 재상지종으로 대표되는 기존 특권층들이 누리던 권리를 거둬들이고 비특권층 출신 관료들을 키워내는 장기적으론 지배층의 범위를 전국의 사족에게 확대하는, 쉽게 말해 개천에서 용 나오기 쉽게 만드는 대대적인 정치 개혁을 하는데 그 특권층을 처가로 둔 사람을 후계자로 삼을 수 있겟는가?
게다가 방석은 '''현 왕비''' 강씨의 아들이었다.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건국 이전에 사망했다. 건국 후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내려 어느정도 예우를 갖추긴 하였으나 죽은 그녀의 권위가 살아있는 왕비인 신덕왕후를 뛰어넘을 순 없었다. 태조 2년 한씨의 3년 상이 끝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태조의 예우는 끝난다. 반면 개국 직후 공신들이 태조를 위해 잔치를 열 때 동시에 공신부인들이 강씨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에서[14] 알 수 있듯 강씨의 권위는 공인되어 있었다.[15] 태조 입장에선 방석의 세자 책봉은 장자 계승을 무시했다는 큰 흠을 제외하고는 고려해 볼만한 선택지였다.
다만 이렇게 방석의 세자 책봉에 혁신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해석의 기준을 취사선택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 세자의 권위를 확고히 해주는 신덕왕후 자체가 고려 건국시기부터 유력 가문이였던 신천 강씨에서 분파된 곡산 강씨, 즉 고려 체제의 최고 명문가 출신이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된 다른 아들들과 얽힌 어지간한 유력 가문들[16] 보다도 더 고려 왕조와 오랫동안 밀착된 가문이다. 물론 방석의 장인 심효생이야 아버지 대에서야 정계에 진출한 신흥 가문 출신이긴 하지만, 이성계와 정도전이 구체제와의 결별을 위해서 방번이나 방석을 세자로 미는 '혁신'을 추구했다고 보기에는 주장이 빈약하다.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들은 고려의 명문가 여자들이랑 결혼을 했기 때문에 구체제와 연루되었으므로 거기서 자유로운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들을 세자로 삼는게 구체제와 결별하는 정치적 혁신이라고 주장하는데, 실상은 그 강씨의 아들들은 바로 고려의 최고 명문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주장의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보는가?
그런 거창한 이유가 없더라도 왕조 개국 초기에 장성한 아들들이 왕의 기대에 못 미친다거나, 다른 신하들이 왕이 아닌 아들들에게 붙는 탓에 정치적 경쟁자로 느껴지는 등의 이유로, 장성한 아들들을 제치고 아직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삼았다가 장성한 아들들에게 쿠데타를 당하는 실책은 동북아 역사에 자주 있어왔다. 특히 이방원의 경우, 정몽주 살해에 대한 묵은 죄가 있었다는 점도 상기하자.[17][18]
일각에는 장남부터 순서대로 큰 재산을 물려주어 독립시키고 막내아들에게 승계시키는 말자 상속 풍습이 있는 유목민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생각해보면 이것은 신빙성이 없다. 이성계는 아버지와 함께 공민왕에게 귀부할 때부터 고려인을 자부했고 고려인 대우를 받기 원했으며 여진족 티를 내지 않고 철저히 개경의 중앙귀족으로 정착하려 하였기 때문에 유목민 풍습을 따르고 싶어도 따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성계 다음 대에는 고려 귀족으로서 형제간의 서열과 가문의 후계 구도가 정착되어서 장남 이방우가 개경의 대귀족인 전주이씨 가문의 차기 당주로서의 특권으로 음서로 벼슬에 나아갈 수 있었고, 차남 방과 또한 이미 동북면 영지와 가별초를 물려받을 군사방면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에게 군인 수업을 받고있었다. 더구나 조선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사대부 중에서도 공민왕 이래의 급진반몽주의자들이었던 것만 봐도 이에 관련하여 유목민족의 풍습인 말자상속제는 재고할 가치가 없다.
게다가 사실 유목민의 말자상속제에 대해서도 완전히 잘못 알려져 있다. 말자상속제란 막내아들에게 모든 재산을 몰아주는 방식이 아니다. 새로운 목초지의 확보가 생존의 척도인 유목민족[19] 의 경우, 장성한 자식부터 재산을 나눠받아 독립을 하고, 마지막에 부모가 타계하면 막내가 부모의 남은 재산을 상속받는 것에 가깝다. 통합된 유목 제국의 칸 작위를 말자가 상속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예외가 있다면 영토가 워낙 급속히 팽창하여 어짜피 생전에 분할상속이 필요했던 칭기즈 칸같은 경우이다. 이런 예외가 아닌 이상에야 행정 체계가 미약해 실력주의적인 유목민 체제하에선 어린 아이가 칸으로 인정받기가 힘들어 다른 계승권자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기 쉽기 때문에 장자상속제를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청나라의 강희제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데 유교를 받아들인 황제였던 강희제는 장자상속제를 실시하려 했으나 아직 장자상속제에 익숙하지 못했던 황자들끼리의 난쟁이 벌어졌고 결국 황태자는 황위를 상속받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런 유목민 부족들도 제대로 된 정착 왕조(북위, 요, 서하, 금, 원, 청 등)를 세웠을 시엔 대개 정치적 혼란이 최소화 되는 중국의 장자우선 계승법을 들여왔다[20] . 따라서 이성계가 애초에 와전된 말자상속제에 의해 방석을 세자로 삼으려 했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정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막내 아들을 책봉한 것이라 보기에는, 이후 벌어진 두차례 왕자의 난이나, 이 와중에 태조가 보인 행동에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많다. 상식적으로 혼인관계보다는 장자계승의 원칙이나, 성년, 능력, 군공의 여부가 왕권에 훨씬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당연하다. 하물며 배다른 막내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준다는 건,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고개를 내저을 최악의 선택이다.[21] 결국 태조의 선택은 골육상쟁의 난을 가져왔고, 이 와중에 그의 선택은 왕권을 차지한 아들에 대한 반란이었으니, 이에 대해서 '왕권'이라는 변명이 통하기 어렵다.
3.2. 세자 시절의 모습, 그리고 1차 왕자의 난
태조실록을 편찬한 이들이 그를 죽인 형과 그 측근이었던 만큼, '''어느 정도 과장 혹은 왜곡이 되어있을 가능성'''을 감안해야 하지만, 태조실록을 보면 세자로서의 방석의 모습이 어느 정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세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태조 2년에 요좌, 즉 자신의 직속 관원에게 "나의 거처가 낮고 좁으니 어찌 더위를 견딜 수 있겠느냐?"는 말을 하였고, 당시 최고 정무 기관이었던 도평의사사에서 이를 듣고, 건축을 담당한 선공감에 지시하여 양청, 즉 바람이 잘 통하는 방식으로 지은 하계절용 건물을 짓게 하였다가 태조가 최근 공사를 어쩔 수 없어서 벌이고는 있으나 이미 적지않게 진행되고 있는 만큼, 세자에게 굳이 필요없는 양청을 지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며 이를 중지시켰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뭐, 세자가 막 되었을 당시에는 어린 나이였으니 지금처럼 투정을 부렸다는 식으로 넘길 수는 있다.
그리고 부인 현빈 류씨가 내시 이만과 간통한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해 현빈 류씨는 폐출되고 이만은 참수되었다. 이후 계실로 현빈 심씨를 들였다.
2번 문제의 연장선 상에서, 방번, 방석은 1381년, 1382년 생이라 조선이 세워질 때 겨우 10살쯤밖에 안 되었다. 반면 이복형들은 달랐다. 관직에 오래 머무른 방우,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 방과, 그리고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아버지의 가장 큰 정적인 정몽주까지 살해하며 조선을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방원 등은 개국 공헌에 힘쓴 형들이었다. 업적을 생각한다면 이런 이복 형들을 세자로 안 세우는 게 이상할 정도였고, 비록 정몽주를 독단적으로 암살한 일로 이방원이 태조에게 찍혔다손 쳐도[22] 실질적인 적장자이자 경험도 풍부한 방과가 있었다. 하지만 태조는 이를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삼은 데다가 그 명분을 제공하지도 못했다. 방석이 형들 다 제치고 황제가 된 강희제처럼 '''5살때부터 책을 읽으면 바로 암송하고 어쩌고 하는 무서운 재질'''을 보여주기라도 했으면 모를까[23] 딱히 그런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고생한 자식들을 홀대하고 새엄마의 자식만 편애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아무리 태조가 무섭더라도, 섭섭함과 실망감은 감추기 어려웠다.
방석의 어린 나이가 그나마 강점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라면 그나마 '''어린 나이부터 유교적 제왕학을 학습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태조는 본인이 무장 출신이라 제대로 된 제왕학 교육을 받지 못했고, 안그래도 신왕조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후계자는 보다 체계적인 준비를 거쳐 즉위하기를 바랬을테니 어린 방석에게 여기에 대해 나름대로 기대가 컸을 것이다.[24] 더하여 든든한 빽들도 있으니 조금씩 정치적 경력을 쌓아주면 되리라고 생각했겠지만 일단 태조 본인이 세자책봉 당시 이미 환갑으로 인생의 말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게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25] 게다가 태조실록이 아무리 태종 시대에 간행됐다는 점을 고려해도 이방석은 세자로서 딱히 정무 경험을 착착 쌓아올린 흔적도 보이지 않고,[26] 오히려 장군들과 궁밖에 나가 남의 집 가축을 쏴죽이거나, 궁 안에 창기를 들이거나, 공부를 싫어하고 놀아제끼려 해서 태조가 친히 '''"재 놀려고 해도 못하게 해"'''라고 이르는 등 여러모로 말썽을 일으켰다. [27][28] 이방석이 죽을 때는 16세로 오늘날에 대면 고1 정도의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당대 사회 수준을 생각하면 태조와 정도전 일파가 집중관리해준 세자로서는 여러모로 부족해보인다.[29] 그게 아니라면 세종조에 했던 것처럼 세자와 대군들 사이의 예법을 확실하게 정한다거나 하는 사전작업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이조차도 없었다.[30] 상당히 노는 것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1차 왕자의 난 이후 공신에 해당하는 이들이 그와 방번의 첩들을 자신들의 소유로 하여 데려갔는데, 그 중 2명이 방석의 첩, 그것도 기생 출신들이었다고 하니....[31]
거기에다 대장군 남지와 신덕왕후의 친척이자 장군인 강유신이란 이들을 따라 말을 타고 궐 밖을 나가기도 했는데, 이 때 누가 했는지는 모르나 민가의 염소와 오리 등을 쏴 죽이는 사고를 쳐서 두 장군이 간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당시 그의 나이 상 사춘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는 해도 좀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것.
뭐, 본인의 문제도 있었겠으나, 위의 두 장군이나 도평의사사도 그렇고 세자가 막 되었을 시점부터 그를 가르치는 임무를 맡은 공신의 자제들이 공부를 가르치기보다는 그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다가 비난을 받았다고 하니, 주변 환경도 그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신덕왕후가 일찍 세상을 뜨긴 했어도, 아버지인 태조가 정정했고 후견인인 정도전과 남은 역시 적은 쓸어넘칠 정도로 많았어도 조정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었으며, 요동정벌의 기치를 앞세워 국론을 규합하고 사병 또한 해체하여, 이방원을 위시로 한 반대 세력이 가장 약화되던 무렵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그에게 행운인 듯 했으나....
정도전도 태조도 방심했는지 이방원에 대한 경계를 늦추게 되는데... 자세한 내용은 1차 왕자의 난 참조.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은 방석은 궁궐의 수비대를 지휘하여 반란군을 진압해 보려 했으나 태종이 실록을 통해 수십명의 막대기를 든 오합지졸이라 너스레 떤 것과는 달리 광화문에서 남산까지 꽉 들어찰 정도의 군대가 동원된 것을 보고 전의를 상실했다. [32]
3.3. 폐세자가 되다
이후 정도전, 장지화, 심효생, 남은, 박위 등의 신하들이 살해되고 정국이 이방원에 의해 장악되자 17세 나이로 폐세자된다. 태조는 폐세자된 방석을 살려준다는 약속을 믿고 그를 사저로 내보냈는데, 그래도 가시면 아니된다고 매달리는 세자빈에게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고 안심시키고 궐문을 나섰다가 이거이 등이 논의하여 보낸 자객에게 그의 형인 방번과 함께 살해당했다.
실록에 이방석이 세자빈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무인정사 이후 이방석의 아들에 대한 기록이 사라져서 이방석의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4. 사후
왕자의 난 이후 권력을 잡은 정종, 그리고 태종의 정당화 작업에 의해 '''서자'''로 격하당했다.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정실이므로 엄연한 적자가 맞지만, 태종은 자신이 난을 일으킨 명분을 이어나가기 위해 이렇게 했다. 참고로 태종은 나중에 신덕왕후에 대한 예우도 왕비격에서 후궁격으로 완전히 격하시켜 버렸다.
1406년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모셔온 이후 이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를 소도군(昭悼君)[33] 으로 추봉시켰고, 이후 1680년 숙종에 의해 의안대군으로 추봉되었다.[34]
똑같은 나이에 죽은 단종에 비해서는 관심과 동정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아마도 이미지 탓이 아닐까 싶은데 단종의 경우 압도적으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해 이방석은 형들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모후덕에 차지한 막내아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종에서 세종으로 이어지는 가계의 위상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게다가 이때는 아직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왕씨 몰살의 충격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때라 백성들이 오히려 이성계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것으로 인해 인과응보를 당했다며 고소해했다.
세종은 자기 아버지에게 죽임당한 숙부 이방석에게 자기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을 양손자로 입적하여 후사를 잇도록 했다. 그러나 이방석의 수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는데 세종 사후 계유정난이 일어나 수양대군의 편에 서지 않은 금성대군의 이방석 봉사손 지명이 철회되고 유배된 금성대군은 이후 단종을 복위하려다가 세조에게 발각되어 사형당한다. 이방석은 생전에 자기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 형이 일으킨 반란으로 목숨을 빼앗겼는데 이방석의 양손자 금성대군도 양조부가 당한 것처럼 야심가 형이 일으킨 반란으로 폐서인이 되고 끝내 목숨까지 빼앗겼으니 참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금성대군의 자식들은 겨우 살아남아서 금성대군의 핏줄이 끊어지지는 않았으나 금성대군의 이방석 봉사손 지명 철회는 되돌려지지 않아서 이방석의 후사는 세종의 서자 밀성군의 아들 춘성군이 잇게 된다.
5. 이야깃거리
주원장 시절 명나라의 황녀와 혼인할 뻔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잘 안 알려져있지만 실제로 있었던 혼담으로 1396년 6월-1397년 4월까지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논의되었던 사안이라고 한다. 만약 성사되었다면 이방석의 세자빈이 명나라 황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주원장이 먼저 사돈관계를 맺자고 주장했던것으로 보이는데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6월 13일 기해 1번째기사 황제가 혼사 맺자고 했다는 것을 종묘에 고유하였다. 그 이후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혼담이 오가면서 서로 잘 풀리는 듯 싶더니 1397년 4월에 주원장이 갑자기 이성계에게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사돈 맺으려고 했는데 니가 뭣같이 굴어서 파토났다!"라는 식의 공문을 보내면서 결국 파토가 났다고 한다. # 아마도 정황상 주원장은 결혼까지 하면 이성계가 참견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고 이성계는 결혼까지 할 정도면 요동정도는 지참금으로 챙겨먹을 수 있겠지하고 서로 정반대로 오해하는 바람에 파토가 난것으로 추정된다. #[35]
6. 매체에서
양희석이 연기한 걸작 용의 눈물에선 처음에는 학문에 열심이나 세자빈이 내관 이만과 정을 통한 사건 이후 방황하다[36][37] 정신을 차리지만 방원에 의해 죽고 만다. 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극중 이방원(유동근 분)은 살려달라 애원하는 방석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수하들에게 빨리 처리하라는 손짓을 보내고 결국 궁궐 밖으로 끌려가 참살당한다.[38]
드라마 정도전에선 박준목이 연기했다. 이방석(정도전) 문서 참고. 세자 이후부턴 발연기라고 까였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아역배우 정윤석이 연기했다.
죽을 당시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 정도 되는 청소년이었고 자식까지 봤지만 드라마에서는 늘 아동 배우들이 맡고 어린 아이 이미지가 강하다. 드라마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게 10세 때인데 16세에 죽은 인물이라 중간에 배우를 교체하기도 애매하고 장성한 형들을 밀어낸 어린 동생 이미지가 강해 처음부터 청소년 배우를 넣기도 애매하기 때문. 다만 용의 눈물에서 연기한 양희석의 경우 출연 기간 동안 만 16세 ~ 17세였기 때문에 얼추 나이가 들어맞는다.[39] 재미있는 건 용의 눈물에서 자기 동복형으로 나오는 이방번을 연기한 정태우가 양희석보다 2살 어리다.
나의 나라에서는 위 같은 문제를 의식했는지 1398년을 다룬 10화부터는 실제 역사에 맞는 나이대의 배우로 교체되었다.
[1] 사후에 봉사손(奉祀孫)이 있다.[2] 뒷날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망했어요.[3] 현대의 시각으로는 대군과 군 칭호로 어머니의 신분을 알수 있지만, 조선초기에는 대군이라는 칭호 자체가 없었다. 세자 외의 왕비의 아들을 칭하는 대군 칭호는 태종대에 제정된 것으로, 이 문단에서 영안군과 정안군만 군으로 쓰는것은 옳기도 하면서 옳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결국 왕이 되었고, 태종이 대군 등의 작호를 다듬었기에 대군시절이 없었던 것은 맞지만, 태종 이후의 문서에서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시절을 쓸 때는 정안대군이라 쓰기도 했기 때문이다.[4] 고려의 내시는 거세한 남성 신료를 의미하는 환관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 이 당시가 여말선초로 대부분의 고려의 관습이나 제도가 유지되던 시절이란 것을 감안하면, 저 이만이란 내시는 거세한 환관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5] 실록에는 갑자기 '내시 이만을 죽이고 현빈 유씨를 내쳤다.'고만 써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자세한 사정을 밝혀달라고 한 대간들을 감옥에 가두고, 이 일에 대해서 논의한 관리들도 가둬버리고 이 일에 관련된 사람을 모조리 귀양 보내버린다. 실록에 기록조차 남기지 않게 할 정도로 꺼림직한 사건이었다는 것인데… 따라서 대개 이렇게 추측된다.[6] 일각에서는 폐세자빈 유씨가 실은 간통죄 누명을 뒤집어쓰고 축출됐다는 의견이 있다.[7] 명나라 정난의 변 때 영락제가 건문제의 1살짜리 아들은 차마 죽일 수는 없어서 평생 유폐시킨 적이 있다. 이 아들도 살아 있었다면 똑같이 되었을 수도 있다.[8] 참고로 이방우의 부인은 이방과의 부인 2명의 언니였다.[9] 이색은 고려말 정계와 학계의 구심점으로 창왕을 옹립하고 이성계에 맞섰던 인물이다[10] 고려에 충절을 지켜 은거했다는 것은 야사에 불과하며 실록에선 병권도 일부 쥐고 있었고 맏이로서 조상들에게 제를 지내는 등 후계자가 되지 못했을 뿐 맏이로서 역할을 했다. 그가 폭음을 일삼은 것은 고려에 대한 충절 때문이 아니라 맏이 대우는 하면서 후계자는 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울분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11] 다만 그가 사신으로 간 직후, 이방원이 이색의 요청에 따라 이성계의 선택으로 서장관 자격으로 이색, 이숭인을 따라 간 적이 있는 만큼, 이방우의 사신 행도 이와 같이 강제성이 있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이방우에 대한 바로 앞의 주석에 기록된 내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반론이 가능한데, 진안대군 항목을 참조할 것을 추천한다.[12] 숙의 지씨, 성빈 지씨. 위에서 말한대로 형 이방우 부인의 동생들이다.[13]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 기사.[14] 태조실록 권1 태조 원년 8월 19일[15] 후대에 정식 왕비인 인목왕후 소생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가볍게 제친 서자 광해군의 케이스가 있지만, 광해군은 이미 10년 넘게 세자 경력을 쌓고 전란 당시 공적이 많아, 당파를 막론하고 고른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영창대군의 경우 적자이긴 하지만 나이가 겨우 2살 밖에 안된데다 모후인 인목왕후가 오히려 광해군을 지지하여 보호를 호소한 케이스라 상황이 전혀 다르다. 게다가 국초와 조선 중기의 종법해석도 다르니 직접 비교하기도 애매하다. 단, 서자임에도 장자가 왕이 되었는데 적자임에도 왕이 되지 못한 신의왕후 소생들의 입장은 어떠했을지 고려해 볼만 한 사례다.[16] 무신정변~원 간섭기~거기서의 탈피 등 고려 후기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 때문에 이때는 유력 가문들조차도 사실은 신흥 가문인 경우가 많았다. 적폐의 핵심이라 불리던 이인임조차도 중앙 정계에 진출한지 몇대 안된 신흥 세력에 가까운 출신이다.[17] 이는 단순히 야당 영수이자 아버지와 스승의 절친한 친구를 살해했다는 점만이 문제가 아니라, 여차할 경우 막나갈 수도 있다는, 즉 폭군의 가능성을 예상케 했다는 점에서 국가의 안정을 바란 이성계나 정도전에게 시한폭탄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실제로 제1, 2차 왕자의 난으로 그것이 현실화되기도 했고.[18] 물론 이건 태조와 정도전의 입장이고 이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할 건 다해놓고 이제와서 무슨 소리냐고 항변할 것이다.[19] 애초에 이들이 불편한 '유목' 생활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20] 유목민 사회에서 말자 상속 전통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유목민의 가장 주된 재산은 (탄력적이며 이동이 가능한 재화인) 가축이고, 유목민 특유의 낮은 인구밀도 및 목초지를 찾아 돌아다녀야 하는 목축의 산업적 특성상 특정한 토지 자체에 대한 소유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좋은 목초지를 얻기 위해 죽도록 싸우다 죽고 죽이는 경우는 흔하지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내 땅이라고 금 그어놓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 또한 유목민의 경우 좁은 영역에 지나치게 많은 가축이 밀집되면 목초가 고갈되어 생산성이 오히려 급감하기 때문에 가축떼가 일정 규모 이상이 되면 떼를 나누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점 역시 감안해야 한다. 즉 가문의 재산과 힘이 분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여살아야 하는 농경민과는 반대로 유목민은 제때제때 분가해줘야 세력이 커진다는 것. 따라서 장성한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공밥 먹지 말고 얼른얼른 가축떼 하나 끌고 독립해 나가야 일족의 세력이 팽창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목민의 말자상속은 엄밀히 말하면 모든 자식이 부모의 재산을 나눠 물려받는 분할상속에 더 가까우며, 다만 형들이 먼저 독립해 각각 자신의 가족이나 부족을 꾸리게 되면 마지막까지 아버지 곁에 남아있던 막내가 아버지의 가족이나 부족(즉, 독립해 나간 형들의 가족/부족의 모태가 되는 가족, 또는 부족)을 물려받는 것 뿐이다. 즉, 애매한 상징성 정도 이외에는 말자가 특별히 가장 자리를 물려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말자-분할 상속은 어디까지나 가축떼 이외에는 특별히 물려줄 게 없는 유목 서민의 상속방식이었을 뿐, 작게는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는 대부족의 족장' 에서 크게는 '칸 작위' 처럼 나눌 수 없는 것이 되면 이것은 말자 상속의 대상이 아니었다. 법 체계가 단순하고 미약한 유목민의 특성상 이런 실질적인 권력이 따르는 정치적 유산은 가장 강한 자식에게 물려졌고, 이런 경쟁에서는 아버지 밑에서 미리 공을 세워두거나 아니면 미리 독립하여 충분한 세력을 일궈둔 연장자쪽이 오히려 상속에서 유리했던 것.[21] 예를 들어, 당대 구전소설로 인기가 많았던 '삼국지연의'에서 원소와 유표의 상속문제 정도 되면 거의 '밈'의 경지에 가깝다.[22] 물론 다른 형제들도 정몽주 암살에 찬동하기는 했지만 책임은 이방원 혼자 오롯이 뒤집어쓴다. 정몽주 암살에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이 이방원이다. 하지만 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정몽주의 존재는 조선 개국에 도움이 되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가장 큰 걸림돌인 상황에서 이성계든 정도전이든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있던 터라 결국 방원이 나서서 손을 쓰게 만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조선 개국을 안 한 것도 아니고 할 건 다 해놓고 이제와서 넌 정몽주를 죽였으니 안된다는 식이면 당연히 어이가 없을 노릇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깔끔한 암살도 아니고 백주대낮에 상갓집에서 나온 사람을 다른사람들 다 보는데서 때려죽였으니 할 말이 없긴 하다.[23] 이 자질도 강희제의 조모이자, 순치제의 생모이고, 홍타이지의 적복진이였던 효장문황후가 공인하고, 뒤에서 버텨주었기에 인정받았다. 당시 순치제의 황후는 몽골 보르지기트씨였는데, 시어머니인 효장문황후의 조카였다.[24] 태조는 놀라울 정도로 세자 책봉에 있어 적장자 세습의 원칙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정도전 조차도 처음에는 나이와 경력에 따른 책봉을 건의했다가 태조가 강씨의 아들을 하도 강력하게 주장하자 데꿀멍하고 입을 닫았을 정도며, 방석 책봉에 뽐뿌를 넣는 악역은 정도전이 아니라 배극렴에게 돌아갔다. '''왕 옆의 간신 제거'''라는 명분을 내세운 이방원 입장에서 차라리 태조가 적장자 세습을 고민하고 강씨나 죽은 정도전이 이를 부추기는 그림이 훨씬 자신에게 유리했을 텐데도 실록은 정도전이 죽기 전까지는 일관되게 강씨 아들의 책봉이 태조의 의지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어쩌면 자신과 같은 무장 출신의 방과가 공신들에게 휘둘리는 미래가 자신의 모습과 겹쳐보였을지도 모른다.[25] 태조는 일단 약 73세(72세 7개월여)에 사망하여 역대 조선왕 중 2위의 장수기록을 가지고 있다. 3위는 고종(67세), 4위는 광해군(66세), 5위는 아들 정종(62세)이다. 그런데 잘 보면 순위권들 중에서 태조 밑으로는 나라 망해서 당구치며 여생을 보내다가 죽거나(고종), 반정으로 쫓겨나 유배지에서 할일없이 노닥거리다 죽거나(광해군), 2년간 실권 없는 왕 노릇 하다가 뒷방으로 물러나서 격구나 치고 유람이나 다니며 인생 즐길만큼 즐기다 죽은(정종) 케이스 들이다. 사실 태조도 만6년의 재위기간보다 '''만10년에 가까운 태상왕 시절이 훨씬 길었고''', 원래 강골인 몸이 원치 않게 정치 스트레스에서 일찍 벗어난 덕에 저만큼 장수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설령 신덕왕후가 그렇게 빨리 죽지 않았다 해도 태조 본인이 어린 세자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나날을 지속했다면 무인년의 그 병환이 언제 어떻게 커져서 태조를 저세상으로 이끌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26] 대군들에게 연회를 베풀거나 도성 밖에서 어가를 맞이하거나 법회를 열게 하는 정도가 전부다.[27] 그럴만도 한 게 왕실의 후계자 교육이라는 것은 원·세자가 5살이 되면 강학청을 설치해서 조기교육으로 체화시켜야 할 정도로 빡빡한 커리큘럼이었다. 그걸 10살이 되도록 호랑이같은 형님들을 두고 권신의 막내둥이로 어리광부리며 자유롭게 지냈을 방석이 소화하자니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28] 조선왕조를 통틀어 이방석 외에 10세가 넘어 원자 혹은 세자, 세제로 책봉된 사례는 정종(42세)(!), 태종(31세), 세종(21세), 의경세자(19세), 광해군(17세), 소현세자(11세), 효종(26세), 영조(27세)의 8명이다. 그런데 이 세자, 세제들은 효종 정도를 제외하면 이미 혈통이나 야심, 재능 등등 여러가지 요인으로 후계자로 거론은 되던 사람들이다. 의경세자조차도 왕위에 욕심 만땅인 세조가 잠저에서부터 후계자로 키워왔던 장남이고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가 묵던에 인질로 간 이래 줄곧 아버지 인조와 정치적으로 갈등관계에 있어 어느정도 낌새는 있었다. 정말로 이방석처럼 아무 준비도 없이 덜커덕 세자가 된 사례는 찾기 어렵다.[29] 일례로 세종이 진양대군에게 활자 간행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 그가 만16세 때였다. 문종은 세종이 하도 몸이 안좋아서 이미 10대 초반때부터 툭하면 사신을 접대해야 했다. 당장 이방석의 형인 이방번도 13살에 삼군부 절제사 노릇을 했고, 무인정사 직전에도 한창 진도훈련에 투입되었으니 세자 역시도 군사훈련 등에 얼굴을 내밀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30] 사례 1: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던 듯 공부를 소홀히 해서 간관이 이를 아버지인 태조에게 알리자, 태조가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분부를 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죽하면 태조가 아내이자 세자의 어머니였던 신덕왕후와 함께 유후사(개성. 한성으로 천도하면서 옛 수도인 개성부를 개성유후사로 승격시키고 후에 개성유수부로 개편하였다)에 가게 되었을 때는 말을 관리하는 사복시의 수장인 판사복시사에게 세자가 나가 놀려고 해도 말을 주지 말라는, 즉 자신이 없는 동안에 세자를 잘 감시하라는 식의 명을 미리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사례2: 기생을 궐 안으로 들여서, 이를 안 우보덕 함부림이 서연 중에 사실 확인을 하자, 무안해하며 다시는 그리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기록에 밤에 몰래 나가 한 관원의 집에 갔다가 돌아왔다는 기록도 존재한다.[31] 특히 이거이라는 공신은 효도라는 첩을 데리고 갔는데, 문제는 이 효도라는 여인이 이방원의 매부이자 이거이 자신의 아들인 이백경(후에는 이저로 불림)과 관계를 가졌던 여인(?!)이었던 것. 이로 인해 사헌부에서 이를 비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당시 대사헌이자 이방원의 동서였던 조박과 사헌부 관원들이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백경과의 관계라든지 공신이란 점 때문에 그리하였던 것으로 보여지지만....[32] 물론 현실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한 태종의 입장상 그냥 자신의 상황에 맞게 해놨을 수도 있다. 사실 공식적으로 사병이 폐지된 상황이라 '''왕자들이 직접 거느린 인원은''' 수십명 수준이고 그 외에는 대부분 친이방원파 지휘관들이 동원한 중앙군일 가능성이 높다. [33] 태종이 오등작을 폐지하였으나 아직 과도기였던 만큼 소도공(昭悼公)으로 적히기도 한다.[34]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그를 의안군에 봉했다고 나왔었는데 고증 오류이다. 왜냐면 이성계가 즉위한지 얼마 안 돼서 바로 세자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따로 군(君)이나 기타 존호를 받지 않았다. 정도전(드라마)/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항목을 참고할 것.[35] 다만, 설령 이방석이 명나라 공주와 결혼했어도 무사히 왕위에 올랐을지는 알 수 없다. 이미 대다수 사대부들은 자질이 검증된 이방원을 더 선호하고 있었는 데다가, 명나라에서도 정난의 변이라는 초대형 변수가 터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선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36] 위에 언급된 각종 비행들은 바로 이 시기에 저지른 것으로 묘사되었다.[37] 사실 세자빈이 간통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게 바로 세자 본인의 과한 교육열이였다. 극중 세자빈은 본인도 어린 나이에 세자빈이 되고 외로워 세자에게 여러번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달라고 하지만 세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놀러가자고 해도 공부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잠을 청하자고 해도 먼저 가서 자라고 한다. 오히려 이 시기에 세자는 어머니인 신덕왕후의 침소에서 잠을 자고 싶다고 어리광을 부렸다. 간통죄가 정당화 될 수는 없지만 세자는 세자빈의 감정에 전혀 신경을 쓰지를 않았다. 심지어 세자빈이 울면서 청을 해도 미안하게 쳐다만 볼 뿐 그 이상의 일은 하지 않았다. 결국 세자빈은 간통이 드러나고 내시 이만이 처형당한 뒤 거의 반강제로 자살한다.[38] 이성계가 임종 직전 꾼 꿈에서 어머니 신덕왕후와 형 방번, 누나 경순공주와 매형과 함께 이성계를 맞으러 나타난다.[39] 살아있을 때는 배우가 변성기가 안 와 목소리가 하이톤인데 이성계의 꿈에서 나올 때는 변성기가 와서 굵직굵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