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 더비

 



'''경인더비'''
[image]
[image]
'''FC 서울'''
'''인천 유나이티드 FC'''
'''종합전적'''
(2020년 10월 31일 기준)
'''FC 서울'''
'''무승부'''
'''인천 유나이티드 FC'''
'''24'''
'''17'''
'''14'''
44전 20승 13무 11패
'''K리그1'''
44전 11승 13무 20패
3전 2승 0무 1패
'''FA컵'''
3전 1승 0무 2패
8전 2승 4무 2패
'''K리그컵'''
8전 2승 4무 2패
86득점
'''총 득점'''
55득점
1. 개요
2. 상세
3. 최다골 기록
4. 여담
5. 양팀 충돌 기록
5.1. 문학대첩 이전
5.2. 문학대첩
5.3. 문학대첩 이후
5.4. K리그1 2020 38라운드
6. 관련 문서
7. 같이보기


1. 개요


창단 초기부터 양 서포터즈가 싸우더니 자연스럽게 서로 싫어하면서 생긴 더비. 자금력의 차이로 팀 규모가 달라 순위는 차이가 나나, 경인더비가 있는 날이면 서포터즈 소모임에서 총동원이 있을 정도로 격한 더비이다. 이 경기 종료 후, 양 팀 서포터즈 충돌은 슈퍼매치, 동해안 더비와도 비할 바가 안된다. 슈퍼매치는 양 구단이 수도권 빅클럽을 놓고 다투는격이면, 경인더비는 제발 내 눈에서 사라져라라는 생각으로 다툰다.

2. 상세


K리그FC 서울인천 유나이티드 간의 경기를 이르는 이름. 실질적인 규모나 실력으로는 격차가 있지만, 두 팀의 연고지인 서울특별시인천광역시가 거리도 가까운 편이고, 양팀의 서포터즈인 수호신파랑검정 둘 모두 극성맞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만날때마다 서로 불붙은 듯이 으르렁거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인더비가 형성되었다.
슈퍼매치는 수도권 대표 두 기업구단의 경기라 주목받았지만, 이 매치는 그냥 색다른 이유 없이 서로가 서로는 매우 혐오해서 생긴 라이벌 구도라고 보면 된다.
한때는 경기가 있을때마다 최소 한번 이상 폭행사건이 벌어진 적도 있고 현재도 언론에 보도만 안될 뿐이지 종종 양 팀의 서포터간에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 인천 서포터의 서울월드컵경기장 홈 측구역에서의 장외 서포팅, 인천 서포터의 욕설과 도발에 서울 팬이 깃대를 들고 찔러대며 위험한 행동을 한 사건 등, 서울-인천 서포터간 충돌 도중 인천 서포터 쪽에 휩쓸린 서울 서포터 1명이 인천 서포터에게 집단린치당한 사건등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여러 충돌로 두 구단 사이는 완전히 갈때까지 가게된다. [1]
이미 이전부터 사이가 벌어질대로 벌어진 인천과 서울 관계에 큰 폭탄이 터진 사건이 있었다. 2008년 10월에는 서울에서 걸개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그 걸개가 인천과의 경기에서 반으로 찢어진 채로 발견이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게다가 그 경기는 심판이 상호 간의 충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경기였다. 그 결과 상호 간에 폭력에 가까운 태클이 난무를 하던 상황에서 안재준과 정조국이 공중볼 싸움을 하다가 정조국의 광대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터진다.[2] 게다가 경기는 그 난리 속에서 2:2 무승부로 끝난다. 이걸로 경기장 밖에서 인천과 서울의 대규모 충돌이 터졌고, 앰뷸런스까지 출동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게다가 서울팬들은 분노를 참지 못해, 인천 구단 사무실로 쳐들어가서 난리를 피우기까지 하는 둥, 지금까지 경인더비 사상 최악의 충돌이었다.
당시 서울 서포터즈에서 경찰에 신고하여 수사가 이루어졌고, 인천구단과 인천서포터즈를 경찰이 수사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내용은 경찰수사 결과 이렇다할 혐의점은 없었고, 사건 자체는 그렇게 끝났다. [3] [4]
이외에도 인천과 서울의 충돌은 매년 벌어지는 일이었다. 인천 구단 공식 인스타그램은 K리그 모든 구단을 팔로우했지만 서울만 안했을 정도로 구단간의 사이 또한 좋지는 않다. 심지어 2010년대 초반에 서울이 홈경기에서 서울은 거친 인천의 플레이에 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 영상을 상영했는데, 사실상 인천은 태클을 남발하지 않으면 서울을 이길 수 없는 수준 낮은 팀이라는 뉘앙스의 영상이었다. 이에 다음 홈경기에서 인천은 "인천은 영원히 인천이라는 땅을 떠나지 않는다."라는 뉘앙스의 영상을 홈에서 틀어버리며 맞대응 했다.
이 점에 주목한 언론에서 두 팀의 경기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면서 경인더비란 명칭으로 정착한다. 또, 양팀에 오래 소속된 선수들은 경기때 득점 후 상대 도발 세레모니를 하거나, 과열되는 경기를 보여줄때도 종종 있다.
처음 언론의 주목을 받았을 땐 언론이 만들어줬다며 무시하는 일부 서포터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선 누구나 인정하는 치열한 더비매치로 거듭났다. 심지어 '''슈퍼매치는 언론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라이벌전이고, 경인 더비야말로 진정한 더비라고 치켜세우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5] 서울 서포터 역시 수원과의 경기때보다 더 과열될 때도 있다.
전력차가 커도 만날때마다 짜릿한 명승부가 자주 나온다. 인천 유나이티드가 처음으로 리그에 참여한 2004~2006년은 인천이 근소하게 서울을 앞서고 있었고 인유 창단이후 팀의 첫 원정 승리가 2004년 8월 1일 삼성하우젠컵 서울 원정 1:0 승리(이전시즌 안양 LG 치타스에서 뛰었던 마에조노 마사키요의 PK골)였다. 2007~2009년까지는 인천이 서울을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서울이 2010, 2012년에 두번의 리그 우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부터 2013년까지는 백중세를 유지했다(2010년 1승 1패, 2011년 2무, 2012년 1승 1패, 2013년 1승 2무 1패). 이후로는 서울이 쭈욱 우세를 점했다.
다만 2018년에는 서울의 굴욕이었다. 총 4번을 붙어 2무 2패로 인천을 상대로 1승도 못 거둔 것. 인천이 리그에 참가한 2004년부터 2018년까지 서울이 인천을 상대로 한 번도 못이긴 해가 이전까지 딱 두 번이었다. 05년에 인천이 1승 2무를 거둬서(리그컵에서 3:2승, 리그에서 2:2 무승부 2번) 서울이 1승도 못 거둔 첫 번째 해였다. 이후 2011년에 무승부만 두 번이 나왔지만, 패배는 내주지 않았다.(1:1 무승부 2번) 하지만 2018년에 인천이 2승 2무를 거둔다. 2018년은 서울 입장에서는 13년만에 패배까지 내주고도 1승도 못한 시즌을 맞이한데다, 승강플레이오프까지 겪었다는 점에서 가장 굴욕적인 해라고 봐야할 해였다.
2015년에는 더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리그와 FA컵 결승까지 서울이 가져가는 결과가 나왔지만 2016년에는 이기형 감독대행 체제에서 서울에 승리를 거둬 시즌막판 대반전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며 호락호락 상대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2017년 9월에도 서울전 승리로 작년에 이은 막판 뒤집기로 바닥을 다지고 이후 무패행진으로 간신히 잔류에 성공한다. 2018년 3월에는 서울이 1:0으로 앞서다 89분에 시우타임에게 한골먹혀 무승부로 끝났고, 2018년 7월에는 4개월 무승행진중인 인천이 2:1 역전승을 만들어냈다. 2020년 마지막 경인더비는 인천의 잔류가 걸려있다. 그리고 인천이 이기면서 잔류에 성공함과 동시에 경인더비 2연승을 기록했다.
2013년부터 쭈욱 서울이 우세를 점하던 경인더비에 변화가 2018년부터 일어난다. 이재하 단장의 마지막 시기부터 시작된 구단축소 운영과 서울 프론트의 운영으로 서울의 전력이 약해지기 시작한 것. 게다가 엄태진이 부임하면서 서울의 전력약화는 더더욱 심해지면서, 항상 우세를 점하던 경인더비에서 인천이 크게 치고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인천이 경인더비에서 이긴 횟수는 고작 3번이었지만,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동안 인천이 4번을 이기면서 5년 동안의 승리 횟수를 3년 만에 넘겨버리게 된다.
2020년을 기준으로 지난 10경기의 전적에서 인천이 4승 3무 3패로 우위를 정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심지어 2017년 9월 17일부터 2019년 4월 21일까지 서울이 인천을 한 번도 못이기는 충격적인 상황까지 벌어졌다. 2019년에 문제를 해결한 서울이 3번 연속 승리를 거두나, GS그룹의 줄어든 지원과 프런트의 삽질이 더 심해진 2020년에는 다시 연승을 인천에게 내주는 결과가 나왔다. 서울이 인천에게 경인더비에서 연승을 내준 것은 2013년 3월 9일이 마지막이었는데, 7년 만에 다시 인천에게 연승을 내어준 것. 서울입장에서는 씁쓸한 것이 2013년의 연승을 내어줬을 때에는, 서울은 리그의 우승권 팀이었고, 인천도 시민구단 내에서는 준수한 지원을 바탕으로 전력을 강화시키는 것에 성공한 해였다.
하지만 2020년에 인천은 강등권에서 헤메는 모습을 보였고, 팀 전력도 여름이적 시장에서 임대생으로 메우기 전에는 스쿼드 자체가 불안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외국인 선수가 부상으로 장기입원과 계약해지가 터질 정도로 인천의 상황이 아주 안좋은 상황이었다. 이런 팀을 상대로 서울이 2연패를 했다는 것은, 서울의 전력이 많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GS그룹의 지원이 더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는 방증이다.
역대 전적이나 평소 전력 대비로는 인천이 서울에게 많이 뒤쳐졌지만 인천이 서울에 이기는 경기는 그 경기를 바탕으로 반전에 성공한적이 많기 때문에 인천에게는 중요한 경기고 서울쪽에서는 상당히 껄끄러운 경기다. 2018년 11월 24일에는 인천이 서울 원정에서 5년 7개월만에 승리를 거두며 강등권을 탈출했다. 반면 서울은 끝없는 수렁에 빠지며 승강 플레이오프까지 떨어졌지만 부산에게 승리를 이끌어서 강등을 피했다.
이 더비매치가 열리는 날에는 경찰이 엄청나게 대기하고 있다.

3. 최다골 기록


※ '''2019 시즌까지 포함'''
'''순위'''
'''선수'''
'''득점'''
'''출장'''
'''비율'''
'''클럽'''
'''국적'''
<^|1> 1
<^|1>데얀
<^|1> '''12'''
<^|1> 25
<^|1> 0.48
<^|1>인천(1)
서울(11)
<^|1>[image]
몬테네그로
<^|1> 2
<^|1>박주영
<^|1> '''9'''
<^|1> 23
<^|1> 0.39
<^|1>서울(9)
<^|1>[image]
대한민국
<^|1> 3
<^|1>몰리나
<^|1> '''6'''
<^|1> 12
<^|1> 0.50
<^|1>서울(6)
<^|1>[image]
콜롬비아
<^|1> 4
<^|1>한교원
<^|1> '''5'''
<^|1> 8
<^|1> 0.62
<^|1>인천(5)
<^|1>[image]
대한민국
<^|1> 5
<^|1>라돈치치
<^|1> '''5'''
<^|1> 12
<^|1> 0.41
<^|1>인천(5)
<^|1>[image]
몬테네그로

4. 여담


  • 역대 최다득점자는 데얀이다. 44경기(FA컵 포함) 12골.
  • 언론과 서울을 비롯한 다른 K리그 팬들은 경인더비라고 칭하고 있으나 인천 유나이티드측에서는 2016년 7월 17일 이 더비를 인천광역시인(仁) 서울특별시경[京]을 따서 인경전으로 칭하기 시작했다.
  • 구도는 잉글랜드의 머지사이드 더비와 비슷하다고 보면된다. 가까운 지역과 더불어 괜찮은 자금력으로 화려한 선수진을 구축하며 ,한때 리그에서 황금기를 이끌었던 리버풀과 자금력부분에서는 밀리지만 열정은 대단한 에버튼이 연상된다. 역대전적에서도 선수 스쿼드가 두터운 리버풀이 앞서는거처럼 서울이 앞서긴하지만, 2010년 중후반 들어서는 인천 역시 만만치 않게 치고 올라왔다.
  • 그러나 서포터즈간의 관계가 나쁘지 않은 머지사이드 더비와 다르게, 경인 더비는 노스웨스트 더비처럼 갈등이 심화된걸로 알려져있다. 서포터즈간 갈등이 심한 매치라, 경기마다 소모임에서 서포터즈 총 동원령이 있을정도다.

5. 양팀 충돌 기록


자잘한 걸개도발이나 상호 견제는 기재하지 않음.

5.1. 문학대첩 이전


2006년 문학 : 인천-서울 경기에서 경기종료직전 인천서포터 중 일부가 W석을 통해 S석으로 도발을 했고, 이에 분노한 FC서울 팬 몇몇 달려들어 철창사이로 깃발을 쑤셨다. 이 일로 서울 팬들은 콕콕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인천과 서울이 본격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한 지점.
2007년 문학 : 2007년 인천 유나이티드에서는 구단샵에서 유니폼을 구입하면 일반석 18경기 입장권 교환티켓을 증정하는 이벤트를 실시했는데, 인천 팬들 사라고 실시한 이벤트에 서울팬들이 난입했다. 서울팬 여러명이 돈을 모아서 유니폼 한 벌을 구입한 후에 정작 유니폼은 버리고중고로 팔아버리지, 교환티켓을 한장한장 뜯어서 한 장씩 들고 가서 다같이 문학 일반석으로 입장한 후에, 원정팀 응원석에서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 펜스를 타고 넘어간 것이다. 후에 이 사건은 주로 월담신 사건이라고 불리게 된다.
2008년 서울 : 이전에도 장외서포팅은 있었으나, 전에는 양측 서포터가 만나지 못해 충돌이 없었다. 하지만 이 날은 서로가 접촉을 하면서 철창 하나 사이에 두고 온갖 욕설과 폭언이 난무했다. 게다가 조금씩 인천과 서울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하면서, 기존 장외서포팅 충돌보다 더 격하게 붙었다. 서로에게 침을 뱉는 건 기본.

5.2. 문학대첩


2008년 문학 : 일명 '''"문학대첩"'''이라고 불렸던 충돌. 위에서도 기재한 걸개가 반으로 찢어져 문학 경기장에 걸린 사건. 10월 4일에 터진 사건으로 현재의 경인더비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이 시기까지의 경인더비는 순전히 서포터즈 사이의 갈등이었지, 구단 수준에서 부딪히는 더비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날을 기점으로 경인더비는 서포터즈를 넘어서서, 아예 구단 수준의 싸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10년이 넘도록 이어져 오고 있다.당시 상황 요약 글
경위는 다음과 같다.
이 경기 전에 서울은 한 걸개를 도둑맞고 만다. 당시 서울 서포터즈는 도난 신고를 하며, 이 걸개를 찾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10월 4일에 경기가 시작된다. 당시 서울은 우승경쟁을 위해서, 인천은 6강 플레이오프 경쟁을 위해서 승점 3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때의 경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축구와 격투기 그 사이를 걷던 경기였다. 양팀 사이에서 격렬한 태클이 오고 갔고, 심판은 이를 통제하는데 실패한다. 그 결과 태클을 빙자한 폭력이 상호 간에 오고가고, 선수들 사이에도 흥분도가 높아지게 된다.
그 와중에 정조국이 선제골을 넣는다. 그리고는 인천 서포터즈 쪽에 주먹감자를 날리는 세레머니를 한다. 이 결과 인천 서포터즈는 흥분 상태에 돌입한다. 그리고 인천은 득점한 골이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으며, 골이 취소되자 흥분의 상태는 더 높아진다. 게다가 드라간의 헤딩슛이 골문으로 향하자 서울 측에서는 구경현이 공을 손으로 쳐내면서 퇴장까지 발생하는 난장판이 벌어지게 되는 등 경기 전반이 혼란의 카오스였던 상황이었다. 경기 중에 전반에는 이준영과 김치우가 크게 충돌을 했고, 후반에는 방승환과 아디가 크게 충돌을 하고, 서울의 안태은은 인천의 박재현에게 정강이를 향해 스터드가 들어가는 태클이 나오던 지경이었다.
참고로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다. 경기 내용은 무승부였지만, 서울에서 2명이 퇴장을 당했고[6], 주먹만 나갔으면, 그때부터 축구가 아닌 격투기로 종목을 바꿔서 소개해도 될 정도로 경기 양상은 난장판 그 자체였다. 이 경기양상은 선수와 코칭스탭을 넘어서, 서포터즈까지 흥분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경기 중에 이미 이성이 사라진 경기장에 폭탄을 하나 더 던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바로 정조국이 안재준과 공중볼을 경합하는 과정에서 광대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은 것이다. 당시 정조국은 하락했던 폼을 끌어올렸던 상태였고, 국가대표 재합류 가능성이 높던 상황이었다. 그랬던 그가 광대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자, 선수단은 물론이고 서포터즈들까지 이제 더이상 통제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7]
그리고 경기장에 분노와 흥분이 가득찬 상황에서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기름에 불을 붙이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바로 서울 서포터즈가 분실한 걸개가 문학경기장 S석에 걸린 것이었다. 단순하게 걸개가 걸린 것이 아니었다. 그 걸개가 반으로 찢어진 채로 S석에 걸렸고, 당연히 서울 서포터즈는 인천이 걸개를 훔쳐서 반으로 찢은 뒤에 경기장에 걸은 것으로 생각했다. 당연히 시작부터 극도의 흥분으로 가득했는데, 경기내내 분노를 키우는 상황이 중첩이 되니.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대규모 물리적 충돌.[8]
이미 경기 종료 전에 서울 서포터즈는 인천 서포터즈에게 선전포고를 날렸던 상황이었다. 경비인력과 경찰이 중재하려 했지만 그 수가 너무 적어, 서포터즈들을 제어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본격적인 충돌이 터진다. 이 충돌은 추가로 증원된 경찰인력이 들어와서야 끝이 났는데, 그 와중에 서울 서포터즈가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일까지 벌어진다. 경기 직후에는 서울 서포터즈 인천 구단 사무실에 쳐들어가기까지 했는데, 다행이 물리적인 폭력 및 재산파괴 행위는 없었다. [9]
당연히 이런 대규모 충돌을 언론에서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언론에서는 집중적으로 이 충돌을 다뤘는데, 당연히 기사 내용이 나올 때마다 서울을 서울대로 분노, 인천은 인천대로 분노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억측마저도 기사화 되면서[10] 인천 구단은 말 그대로 분기탱천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일은 이후에 있을 경인더비부터는 서포터즈의 문제가 아니라 구단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서울 구단도 이를 마구 갈게 되었다.
당시 이 사건이 얼마나 컸던지, 아이러브사커와 같은 당대의 주류 축구커뮤니티에서 다른 경기들의 게시글은 그냥 묻혀버리고, 문학경기장에서 벌어진 충돌에 대한 글이 태풍처럼 올라오기 시작한다. 당연히 커뮤니티 내에서도 서울과 인천 양 팀 팬들을 크게 충돌했다.[11]
충돌 목록에서도 가장 긴 분량을 자랑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역대 경인더비 충돌 중에 이보다도 큰 충돌은 없었다. 이 충돌로 경인더비는 서포터즈만의 영역을 넘어서 언론에서도 언급되기 시작했고, 양팀 서포터즈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당연히 구단 간의 사이도 크게 틀어져 버렸고, 오로지 감정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이후로도 양팀은 지속적인 충돌을 겪고 있다.
이 사건을 모르는 어린 팬들은 서울과 인천이 왜 더비가 되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고, 양팀의 더비 자체가 성립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는 경우가 있다. [12]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10년이 넘게 시간이 지났음에도 감정이 남았을 정도로 이 날의 충돌은 굉장히 컸다.
그리고 결말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당시 경찰은 걸개 도난 사건에 대해서 수사를 했지만, 범인을 특정할 증거가 없었다. 서울도 범인을 인천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정황증거만으로 경찰이 인천은 범인으로 수사할 리가 없었고 직접증거는 서울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건은 유야무야 끝이 났고, 마무리가 정확히 안 맺어진 사건이, 깔끔하게 마무리될 리가 없었다. 결국 경인더비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영원한 적대의 길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5.3. 문학대첩 이후


2010년 서울과 문학 : 이미 이전부터 양 팀의 걸개는 경인더비 때에는 서로를 도발하는 걸개가 나뒹굴고 있었지만, 이 해에는 아예 통신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5월 9일 문학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인천은 '어버이날의 교훈 잊지말자 연고이전 패륜'라는 걸개를 걸었다. 이를 기억하고 있던 서울은 10월 3일 상암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개천절의 교훈 개천 니들은 안돼'라는 걸개로 응수한다.
2011년 서울과 문학 : 2010년까지의 경인더비가 서포터즈 간의 갈등이었다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구단과 구단의 갈등으로 번진다. 6월 상암에서 서울은 인천의 파울을 중점적으로 편집한 영상을 틀었다. 내용은 서울의 선수들이 상대의 거친 공격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용사라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파울을 하는 선수들이 거진 인천이었다는 거였다. 2010년의 충돌을 겨냥한 영상이었다.
이에 인천은 10월에 문학에서 벌어진 경인더비에서 인천은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인천이라는 땅을 버리지 않는다는 내용의 영상을 틀었다. 영상 자체는 인천팬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이었지만, 문제는 이 영상을 틀었을 때의 상대가 연고이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서울이었다는 것이다. 즉 의도적인 영상이었다는 것. 이제 경인더비는 결코 서포터즈 수준의 갈등이 아니라는 것을 구단 수준에서 공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사건이었다.
참고로 6월 상암에서 벌어진 경기에서는 경기 종료 후에도 양측 서포터즈가 서포팅을 이어나갔다. 상대 서포터즈가 먼저 나가라는 기싸움이었고, 이 때문에 애꿎은 경비업체만 퇴근시간이 늦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2015년 상암 : FA컵 결승이 경인더비로 치뤄지게 된다. 여기서 악명높은 서울의 서포터즈인 타나토스 인원 10여명이 분실물을 돌려준다는 이유로 S석으로 접근하게 된다. 당연히 인천팬 입장에서는 타나토스가 접근한다는 사실만으로 좋게 대응할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상호 간에 충돌이 벌어진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쟁 수준의 충돌이었지만, 문제는 이 사건의 목격담이 커뮤니티에 올라왔다는 것. 이 과정에서 험악한 분위기에 인천의 가족팬이 퇴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이가 상호 간의 충돌에 울음을 터트린 것. 그리고 이 내용이 커뮤니티에 올라가자, 다른 구단의 서포터즈에서 자기들도 같은 일을 당했다는 증언이 올라오게 된다. [13] 특히 바로 4강전 상대였던 울산도 똑같은 일이 타나토스에 의해서 벌어졌다고 증언을 하면서, 상습범이 아니냐는 말과 함께 양팀 서포터즈의 감정은 더욱 격해졌다.

5.4. K리그1 2020 38라운드


코로나19로 인한 부분적 유관중 시행 도중, 2020년 10월 3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K리그1의 마지막 라운드인 38라운드가 경인 더비로 치뤄지게 되었다. 이 경기에서 인천은 무조건 승리해야 다이렉트 강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서울 구단에서 원정석을 개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원정석으로 쓰여진 S석 쪽에 수많은 인천 팬들이 자리했다. 이 경기는 경기 전날인 10월 30일에 FC 서울의 수비수인 김남춘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치루어졌고, 경기장 게이트에는 김남춘을 추모하는 공간이 설치되기도 했다. FC 서울은 이 경기에서 서포팅 유도를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런데 S석에 자리한 인천 팬들이 인천 선수들이 좋은 플레이를 보였을 때 박수를 치며 응원하는 등 원정팀을 계속 서포팅하였고, 경기가 인천의 0:1 승리로 인천의 잔류가 확정되자 엄청나게 열광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경기 후반에는 서울과 인천 선수 간의 충돌이 일어났고, 인천의 김준엽이 서울의 권성윤에게 백태클[14], 서울의 양한빈이 인천의 김도혁을 걷어 차 퇴장까지 당하는 등 선수와 팬 모두가 감정적이었던 경기였다.

경기가 끝난 직후, 서울 선수들이 센터 서클에서 모여 눈물을 흘리는 동안 인천의 주장인 김도혁은 원정팬들의 박수를 유도하는 논란이 될 행동을 보였다.# 그 이후 김도혁은 경기 이후에 문제가 되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하였고, 김남춘의 빈소를 찾아 조문을 하고 왔다고 자신의 SNS에 밝혔다. # 이 경기로 인해, 서울 팬들이 가지고 있는 인천에 대한 증오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 외의 사례에도 매년 충돌이 터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욕설과 폭언 정도는 약한 수준이며, 도발 걸개나 비하 걸개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그냥 달린다고 보면 된다. 다만 물리적 수준의 대규모 충돌은 크게 줄은 상황.
2021년 첫 경인더비는 2021년 3월 13일 K리그1 4라운드 인천에서 열린다.

6. 관련 문서



7. 같이보기






[1] 심지어 어느 서울의 소모임은 인천옷을 입은 바트 심슨의 목을 자르는 행위를 담은 티셔츠를 입기도 했다. 인천이 문학경기장을 쓰던 시절에 인천에 걸린 걸개 중에 하나가 바트 심슨이 인천 유니폼을 입고서 FU를 날리는 걸개가 있었기 때문[2] 당시 정조국은 국대 복귀 가능성이 높던 상황[3] 추후에 인천 서포터즈였던 미추홀보이즈 올렸던 진행사안은 경찰은 서울 서포터즈에게 인천이 범인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근거를 요청했고, 서울 서포터즈는 물증을 내놓지 못했다는 글을 올렸다.[4] 당시에 얼마나 큰 충돌이었으면, 축구커뮤니티에서 수원에서 걸개를 훔쳐, 반으로 찢은 후에 인천과 나눠가졌다는 루머가 나도는 지경이었다.[5] 다만 이것은 서울과 수원이 서로를 라이벌이라고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을 정도로 싫어하기 때문이다.[6] 구경현이 골이 되던 공을 손으로 쳐내서 레드카드, 기성용이 경고 2장을 받아 경고누적 퇴장을 당했다.[7] 참고로 이미 인천과 서울 서포터즈는 경기 전에 경기장 바깥에서 한 차례 충돌을 겪은 상태였다.[8] http://cafe.daum.net/CM3Korea/2nkg/2797?q=%EC%9D%B8%EC%B2%9C 당시 목격자 게시글[9] 구단 사무실에서 폭력사태가 터졌으면, 이건 연맹에서 처리해야할 문제가 되기 때문[10] 안재준이 고의로 정조국을 부상입혔다는 내용[11] 당시 운영진들이 이 충돌을 진정시키고자, 강퇴처분을 10명 가까이 내렸다는 글이 있었을 정도[12] 지역도 다르고, 팀의 규모나 시설 자금력에서 인천이 밀리기 때문[13] 돌려주려고 했던 물건이 머플러였는데, 락카로 칠했다는 말에서 순수한 선의가 아니라는 의심을 받았다.[14] 권성윤은 태클로 인한 고통으로 인해 당한 후 경기가 끝날 때 까지 다리를 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