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웨스트 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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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Liverpool F.C.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Manchester United F.C.
'''
'''노스웨스트 더비 (North West Derby)'''
'''종합전적'''
(2021년 1월 24일 기준)
'''리버풀 FC
Liverpool FC
'''
'''무승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Manchester United FC
'''
'''67'''
'''58'''
'''81'''
'''최근 5경기 전적'''
'''일시'''
'''장소'''
'''결과'''
'''대회'''
2019년 2월 23일
'''올드 트래포드'''
맨유 0 - 0 리버풀
프리미어 리그
2019년 10월 20일
'''올드 트래포드'''
맨유 1 - 1 리버풀
프리미어 리그
2020년 1월 19일
'''안필드'''
'''리버풀 2''' - 0 맨유
프리미어 리그
2021년 1월 17일
'''안필드'''
리버풀 0 - 0 맨유
프리미어 리그
2021년 1월 24일
'''올드 트래포드'''
'''맨유 3''' - 2 리버풀
FA컵
1. 개요
2. 배경
3. 역사
4. 여담
4.1. 양 팀에서 모두 뛰었던 선수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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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나라에는 두 클럽 밖에 없습니다. 두 클럽만이 종교처럼 받아들여지죠. 이건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무언가 더 큰 의미가 있어요.

이 둘은 50년 동안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말하기 싫지만, 우리가 공통점으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비전을 가진 위대한 스코틀랜드 출신 감독들, 유스들, 지역 출신 선수들, 커뮤니티, 의미, 이상한 승리를 하는 것, 이길 수 없는 경기를 이기는 것...

제게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것들은 분명히 무언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심장으로 느끼는 그 무언가에요.

'''두 클럽은 종교입니다. 그런건 이 두 클럽 밖에 없어요.'''

'''The biggest game in English football? Liverpool vs Manchester United 中'''

영국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프로 축구 명문 클럽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팀인 '''리버풀 FC'''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간의 라이벌 더비 매치이다.
두 클럽 모두 잉글랜드 북서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노스웨스트 더비'''라 불리며,[1] 둘 다 강을 끼고 있어 무역의 중심이 된 강변 도시이자 동시에 공업 도시이다. 스코틀랜드의 올드 펌 더비, 아르헨티나의 엘 수페르클라시코, 스페인의 엘 클라시코 등과 함께 세계 축구의 최대 라이벌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잉글랜드 프로 축구에서 가장 유명한 더비 매치로 꼽힌다.

2. 배경


맨체스터리버풀 사이는 고작 30마일로, 자동차로 한 시간이면 다녀 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다. 맨체스터와 리버풀에 가면 반드시 방문해야 할 명소가 있는데, 맨체스터는 산업 박물관, 리버풀은 알버트 독이다. 산업 박물관은 수로 사업을 기반으로 한 맨체스터의 눈부신 성장의 역사를 담아낸 곳이며, 알버트 독은 리버풀이 항구 도시의 기초를 닦은 곳이다. 이러한 관광명소들이 보여주듯이, 맨체스터와 리버풀 두 도시들은 18세기 산업혁명 때 급속도로 발전했다.
내륙에 위치한 맨체스터는 철도와 운하 산업으로, 잉글랜드 북서쪽 해안가에 위치한 리버풀은 항만 산업으로 눈부신 성장을 거두었다. 맨체스터는 산업 혁명의 중심지답게 시대를 앞선 기술을 통해 수많은 공산품을 생산하던 도시였는데, 영국의 수출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맨체스터 시에서 만들어내는 공산품 양도 많아졌고, 맨체스터는 생산한 상품들을 인근 해안 도시인 리버풀의 머지사이드 항구를 이용해 세계로 내보냈기 때문에, 대영제국의 수출 전진기지가 된 리버풀도 덩달아 엄청난 호황을 누리게 됐다.
1830년에는 영국 최초의 도시간 철도 노선이 두 도시 사이에 놓여 협력 관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공업물자의 수송을 담당한 것은 맨체스터와 리버풀을 잇는 철도였는데, 이 노선은 세계 최초로 전 구간에 기관차를 이용한 여객 및 화물 운송을 수행, 근대적인 철도 운송 시스템의 시발점이 되었다. 대영제국 시절 전세계 무역의 절반 이상을 거쳤던 리버풀은 당시 영국 최대 규모의 무역항이었고,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도 리버풀(리버풀은 모항)에서 출항했다. 1894년, 맨체스터는 항구의 물류비용이 비싸지자 공산품을 직접 수출하는 방법으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맨체스터에서 곧바로 아일랜드 해로 연결되는 당시 서양에서 가장 큰 운하를 건설했다.[2] 그리고 이 맨체스터 운하의 등장은 리버풀에게 크나큰 타격으로 다가오면서 '''양 도시 사이의 적대감정이 시작된다.'''[3] 또한 마거릿 대처 때 사이좋게 동네가 망할 뻔 하기도 했다.[4]

3. 역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는 1878년에 창단되었고, 리버풀 FC의 경우 1892년에 창단됐다.[5] 하지만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리버풀은 2부 리그로 강등되며 침체기를 겪었고, 반면에 맨유는 전설적인 명장 맷 버스비의 지도하에서 안정기를 갖게 된다. 이후 1962년 리버풀의 전설적인 명장 빌 샹클리가 부임하면서 리버풀과 맨유의 경쟁 구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64년부터 1967년 사이에 두 팀은 우승을 놓고 리그 패권을 다투던 경쟁팀이었지만, 지금의 상황과 비교하자면 양 팀간의 사이는 좋았다. 맨유와 리버풀을 이끌던 맷 버스비(1909~1994)와 빌 샹클리(1913~1981)가 매우 절친했던 사이였기 때문이었다.[6][7]

1962년 리버풀이 1부리그로 승격이 되었을 때도, 많은 변화는 없었다. 심지어 필 치스날이 1964년 이적을 했음에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는 에버튼 FC더 큰 라이벌이었다.

TV 프로듀서 데이비드 할

빌 샹클리는 당시 올드 트래포드에서 자주 볼 수 있었고, 보비 찰튼 경도 안필드에 자주 놀러갔다. 또한 맨유 레전드 보비 찰튼 경은 당시 리버풀 팬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는데, 엘로카드 조차 한 장 안받았던 매너에다가 월드컵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주인공이어서 그러했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항상 샹클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항상 그랬다. 버스비와 함께라면 구단 뿐만 아니라 구단 경영진 회의에도 참석했다. 그들은 언제나 축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샹클리는 맨유 선수들을 보기 위해 자주 우리 클럽을 찾기도 했다. 언제나 붉은색 셔츠와 넥타이를 멘 샹클리는 인사도 매번 같았다. "어이, 아들, 잘 지내고 있어?"라고 인사 한 뒤에 "넌 올드 트래포드에 오는 게 아니라 리버풀에 왔어야 했어"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데니스 로

리버풀을 대표하는 찬트인 YNWA 같은 경우도 한때는 양팀 서포터들이 즐겁게 합창하던 곡이었다. 1977년 FA컵 결승에서는 맨유의 서포터들이 패배한 리버풀 선수들을 위해 이 노래를 부르는 훈훈한 장면이 있었을 정도.
결론적으로 두 팀의 라이벌 의식이 그저 지역감정에서만 비롯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는 맨유-에버튼 관계를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에버튼도 마찬가지로 리버풀 연고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맨유와의 교류가 상당히 활발하다. 맨유에서 밀려난 선수가 에버튼에서 뛰고, 에버튼에서 이름 날렸던 루니가 맨유의 상징으로 자리잡는 것도 흔한 일이다. 리버풀과 맨시티 그리고 맨시티와 에버튼간의 관계도 나쁘지 않은 편.[8] 또한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1960년대 이전에는 리버풀과 맨유의 관계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일단 맷 버스비부터가 선수생활의 후반기를 리버풀에서 보내고도 멀쩡히 맨유의 사령탑이 된 바 있다.
결국 두 팀은 단순히 지역감정 때문만은 아니고 지역 감정과 결합하여 '''역대 잉글랜드의 축구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를 가진 두 팀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맞수'가 되어 리그 내에서 최고로 치열한 라이벌리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9]

4. 여담


  • 위에서 언급된 1964년 필 치스날의 맨유에서 리버풀로의 이적 이후 2020년 현재까지 두 구단 사이에서 직접적인 이적은 단 한건도 없었다. 2007년 가브리엘 에인세가 공식적으로 리버풀로의 이적을 요청했으나, 팬들의 격렬한 반대로 인해 무산되고 에인세는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게 되었다.
  • 수아레스의 인종차별 사건이 일어났던 경기도 노스웨스트 더비이다. 조사 결과 백인인 수아레스가 흑인인 에브라를 향해 "검둥이(negro)"라고 모욕한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수아레즈는 8경기 출장 정지와 벌금 4만 파운드(약 7200만 원)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 맨유의 전 주장 게리 네빌은 2006년 1월 22일 리버풀과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골이 터지자 리버풀 응원석으로 달려가 맨유 엠블럼에 입을 맞췄다.
  • 맨유 출신이었던 선수이자 현 더비 카운티 선수인 웨인 루니는 리버풀 태생의 에버튼의 팬이어서 리버풀 FC를 극도로 싫어한다. 오죽하면 루니의 소원이 리버풀의 홈 안필드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것이었으나 그 소원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 리버풀의 전 주장 스티븐 제라드는 안데르 에레라의 다리를 밟는 파울을 범해 자신의 마지막 노스웨스트 더비에서 퇴장을 당했다. 교체선수로 그라운드를 밟은 지 38초 만의 일.
  • 대한민국 한정으로 과거 잉글랜드 리그에 무지했던 스포츠 기자들이 레즈 더비라고 불렀다. 최근에는 조금씩 본래의 더비 이름인 노스웨스트 더비로 정정되는 추세이다. 과거 해외리그에 무지했던 박문성[10] 같은 언론인들이 양팀의 홈 저지 색깔이 빨간색인 데서 착안해 종종 쓰다가 정착된 표현으로 추정, 그러니까 콩글리시다. 시간이 지나면서 리버풀–맨유 간의 경기를 북서부 더비라고 불러달라는 지적을 많이 받았는지 맨유–아스날 간의 경기를 레즈 더비로 밀고 있다.[11][12]
  • 1959년, 어떤 알 수 없는 두 남자가 허더스필드에서 경기를 막 끝낸 빌 샹클리에게 가까이 가며 말을 걸었다. (당시 빌 샹클리는 허더스 필드 감독) 그 두 남자는 리버풀 회장 윌리엄스와 디렉터인 해리 래텀이었는데
> "이봐, 혹시 이 나라의 최고 클럽 감독 자리에 관심이 있나?" 라고 물었던 리버풀 보드진에게 빌 샹클리의 대답은
> "뭐요? 혹시 맷 버스비가 짐싸는 중이요?"(...)
  • 은퇴한 스티븐 제라드의 말로는 현역시절 맨유와의 경기가 시작되기 전 맨유의 선수들과 입장 터널 안에 함께 서있으면, 혐오의 감정마저 끓어올랐다고 한다. 함께 잉글랜드 대표로 호흡을 맞췄던 데이비드 베컴, 개리 네빌, 리오 퍼디난드, 웨인 루니와는 대표팀으로 모였을 때에 한해서 그냥 서로 아무 문제 없이 지내는 척을 했을 뿐이라고. 퍼디난드 역시 은퇴 이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이쪽은 대표팀으로 소집되는게 싫을 정도였다는 모양.[13] 결국 양팀의 레전드인 제라드와 퍼디난드, 네빌은 은퇴한 이후에야 교우관계를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14]
  • 2020-21 시즌 PL 4R에서 두 팀은 같은 날에 대패하는 굴욕을 맛봤다. 맨유는 토트넘 홋스퍼 FC에 1:6,[15] 리버풀은 아스톤 빌라 FC에 7:2로 패했다.[16]
  • 2020-21 시즌 PL 19R, 두 팀이 선두권을 놓고 오랜만에 경기를 펼치게 됐다. 맨유로서는 브루노 페르난데스 영입 이후 최초의 노스웨스트 더비이다. 이 경기를 리버풀이 이긴다면 선두권 경쟁에 더 불이 붙게 되고 , 맨유가 이긴다면 리버풀과의 차이를 벌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고, 양팀 모두 맨시티, 레스터와의 간격만 좁혀지게 되었다.

4.1. 양 팀에서 모두 뛰었던 선수



5. 관련 문서


  • 더비 매치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 리버풀 FC
  • 박지성 개고기 응원가[17]

[1] 다만 잉글랜드의 스포츠 기자인 벤 메이블리는 자신이 영국에 있을 때는 노스웨스트 더비라는 말 자체를 들어본 적이 없고, 간혹 뉴스 등에서 이 명칭이 언급되는걸 보면 주로 영국보다는 영국 외의 언론에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영국 현지에서는 무슨 더비라기 보단 그냥 리버풀 vs 맨유 혹은 맨유 vs 리버풀라고 인식하는 모양이다. 실제로 영문 위키피디아에도 리버풀과 맨유의 경쟁관계를 설명하는 기사에 ‘노스웨스트 더비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로 언급되는 정도.[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엠블럼에 범선은 이 맨체스터 운하를 의미한다.[3] 한편 2차 세계 대전 이후 전 세계의 경제가 휘청거렸고, 영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은 승전했지만, 세계 초강대국의 지위를 잃어버렸다. 게다가 전쟁 이후, 외국인 노동자의 진입장벽이 낮아지면서 항만산업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리버풀은 직격탄을 맞았다. 현지 부두 노동자들은 해고되기 일쑤였고 리버풀의 경제는 휘청거렸다. 맨체스터의 경우에는 제조업이 기반이었기 때문에 리버풀과 비교하자면 그래도 타격이 적었다.[4] 리버풀 팬들이 대처를 극도로 증오하는건 축구팬들 사이에서 유명하지만, 의외로 맨유도 대처 시대에 고통받은 전력이 있었다.[5] 존 하울딩이 에버튼 운영진들과 재정운영에 관한 이견으로 인한 다툼 끝에 당시 에버튼 중심 선수들을 데리고 나가 만든 팀이 리버풀 FC이다. 머지사이드 더비 참조.[6] 1981년 샹클리가 급사했을 당시, 버스비는 상심이 너무 컸던 탓에 관련 취재 및 전화 통화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또한 맷 버스비 경은 빌 샹클리의 후임으로 온 밥 페이즐리의 롤모델로도 유명하다.[7] 맷 버스비 경은 실제로 리버풀에서 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8] 다만 만수르가 맨시티를 인수하여, 맨시티가 맨체스터 지역의 최강자로 등극하고, 이후 2017-18, 2018-19 시즌에 리버풀과 맨시티가 서로 상대의 무패우승을 저지하면서 라이벌리가 슬슬 생겨나는 분위기이다.[9] 당시 잉글랜드는 축구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이 남달랐다. 오죽하면 초창기 월드컵도 자신들이 축구의 주인이나 마찬가진데 다른 나라들이 나와서 설치는 게 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3번(1930년, 1934년, 1938년)이나 출전을 거절할 정도였다. 웸블리 스타디움을 'The Home of the Football'이라 칭했을 정도니.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1955년 유러피언 컵도 잉글랜드 리그 우승팀에게 불참을 권유하며 막으려고 했다.[10] 심지어 붉은 장미 전쟁 더비(...)라는 정체불명의 더비명을 창안하기까지 했다.[11] 앞서 언급했듯 대한민국 한정으로 불리며 현지에서는 리버풀 FC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간의 경기를 북서부 더비(North-West Derby) 또는 고전 더비(The Classic)라 부른다. 스페인의 엘 클라시코, 독일의 데어 클라시커, 프랑스의 르 클라시크 등등과 의미가 일맥상통한다. 또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 아스날 FC 간의 경기는 그냥 아스날–맨유 라이벌리(Arsenal F.C.–Manchester United F.C. rivalry)라 부른다.[1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 아스날 FC 사이에는 흔히 더비로 불리는 라이벌리의 명칭 자체가 없는데, 한국 팬들의 인식과는 다르게 두 팀을 따로 명칭을 붙이면서까지 라이벌로 묶지 않으며, 묶는다 하더라도 근래에 들어서야 만들어진 관계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두 팀을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보통 두 팀이 리그 투톱 체제로 있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이나 빅 4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2000년대 중반을 시작점으로 본다.[13] '대표팀에 가면 리버풀, 첼시, 아스널의 녀석들이 있었으니까.'라고 한다. [14] 이래서인지 영국국대는 팀워크가 별로 안좋은 편이다. 뿌리깊히 박힌 라이벌 인식때문에 퍼디난드나 제라드의 사례가 발생했다. 팀의 선수단 네임밸류는 엄청난 수준이었지만...[15] 식스앤더시티가 재현된 경기.[16] 하마터면 이 경기처럼 될 뻔했다.[17] 리버풀을 조롱하려고 만든것일뿐 가사에 박지성을 응원하는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