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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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공식 홈페이지 -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1. 개요
慶州 甘山寺 石造彌勒菩薩立像. 신라 성덕왕 18년인 719년에 현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군 내동면 신계리에 위치한 감산사(甘山寺)에서 만들어진 신라시대의 화강석제 석조불상.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제82호)와 함께 발견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이며, 대한민국 국보 제81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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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제82호)와 함께 나란히 전시된 모습.사진 출처 : 문화유산채널 문화유산칼럼 - 감산사 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
높이 2.57m.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울산광역시로 가는 길 주변의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감산사(甘山寺)에서 만들어진 신라시대의 석불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과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이 한국의 대표적인 형제 황금 소불상이라면, 이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제82호)는 한국을 대표하는 형제 석제 거불로 불린다.
이 부처상이 만들어진 감산사는 김지성(金志誠)이란 사람이 자신이 소유했던 감산장전(甘山莊田)을 희사하여 세운 절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두 석조아미타불입상과 석조미륵보살입상에 새겨진 명문과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편 남월산(南月山)조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두 점의 불상 뒷면에는 불상의 제작을 의뢰한 발원자 및 조성 경위, 조성 배경 등에 관하여 자세하게 적혀 있어 신라시대의 사회·문화상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데, 불상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개원(開元) 7년인 성덕왕 18년(719년)에 왕의 기밀 사무를 취급하던 최고 행정기구인 집사성(執事省)의 시랑(지금의 부총리 격)을 지내던 김지성(金志成)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하여 미륵상 1구와 아미타상 1구를 만들었으며 특히 이 미륵보살은 어머니를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김지성은 평소 자연을 좋아하여 노장자(老莊子)의 유유자적함을 사모하였으며 불교도 중히 여겼다고 하며, 이에 67세가 되던 해에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 도덕경(道德經)을 읽고 불교 이론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이후 다시 복직되어 관에 들어갔으나 마음만은 불교를 떠나지 못해 모든 재산을 희사하여 감산사를 세웠다고 한다. 감산사를 짓는 공덕은 국왕 이하 여러 친족 및 일체 중생을 제도케 하여 성불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붓다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부분에는 불교의 시원이 서역에서 시작되어 중국으로 전해졌고, 그것이 신라에까지 이르렀는데, 지금의 신라 땅이 마치 사위성과 같고 극락과 비슷하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불상을 만든 것은 국주대왕(國主大王), 이찬 개원공(愷元公), 돌아가신 부모님, 돌아가신 동생이자 소사(小舍)였던 양성(梁誠, 김양성), 사문 현도(玄度), 돌아가신 아내 고로리(古路里), 돌아가신 누이동생 고보리(古寶里)와 함께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한 것이다. 아울러 이 작은 발원의 인연으로 인하여 모두 피안(彼岸)에 오르고 사생육도(四生六道)가 함께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는데, 문장은 내마(奈麻)인 총(聰)이 짓고, 사문 경융(京融)과 대사(大舍) 김취원(金驟源)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마지막 부분에는 아버지 인장일길간이 향년 37세에 돌아가시자 동해에 뼈를 뿌렸다는 내용과 성덕왕 19년(720) 4월 22일에 김지전이 죽었다는 내용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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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불상은 719년에 만들어진 이후 계속 경주 감산사(甘山寺)에 봉안되어 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현재의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이 때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등 수많은 경주 시내의 유물들이 일제의 치적쌓기 경쟁의 일환으로 서울이나 일본 등으로 강제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두 불상도 같은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전체 높이가 2.52m로, 상당히 이국적인 풍모를 지녔다. 살짝 비튼 몸, 화려한 장엄, 길게 드리워진 영락 장식, 몸에 밀착된 군의(치마) 등은 처음 보는 표현들인데, 특히 군의는 인도의 도티(dhoti)를 연상하게 한다.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에는 도솔천 미륵보살의 보관에 화불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불상 또한 명문에 새겨진 것처럼 이 상이 미륵보살이라는 것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보관의 화불(化佛)이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신라에서 처음 도입되어 유행하였던 보살상 양식으로, 이와 유사한 양식을 보여 주는 예로는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삼존불의 양쪽 협시상(脇侍像)이나 경주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석불의 서쪽 보살상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보살상들은 조성 연대가 약간씩 다르기는 하나, 근본적으로는 같은 계통의 원형에 의하여 조성된 것이다.
이 두 석조불상의 뒷면에 새겨진 명문은 신라 금석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불상을 제작한 확실한 기년명을 알 수 있어 신라시대 불교조각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30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훼손된 부분이 거의 없으며, 표현이 사실적이고 관능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 신라시대 8세기 초를 대표하는 불상 중 하나로, 그 가치가 높다. 형제 불상인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과 함께 1962년 12월 20일에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다.
3. 바깥고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두산백과 :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한국어 위키백과 :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 조각 :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e뮤지엄 :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4. 국보 제81호
경상북도 월성군에 있는 감산사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왕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한 해에 그는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과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머리에 화려하게 장식된 관(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볼이 통통하여 원만한 인상이다. 목에는 2줄의 화려한 목걸이가 새겨져 있고, 목에서 시작된 구슬 장식 하나가 다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은 오른쪽 겨드랑이를 지나 오른팔에 감긴 채 아래로 늘어져 있다. 허리 부근에서 굵은 띠장식으로 매어 있는 치마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발목까지 내려오고 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배(舟) 모양이며, 3줄의 도드라진 선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였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맨 아래가 8각이고, 그 위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와 활짝 핀 연꽃무늬를 간략하고 큼직하게 새기고 있다.
광배 뒷면에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불상을 조각하였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이 글을 통해서 만들어진 시기와 유래를 알 수 있다. 돌로 만들었음에도 풍만한 신체를 사실적으로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부터 새로이 유행하는 국제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