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 석조약사불좌상
8세기 ~ 9세기 경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의 삼릉계곡에서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 석조 불상.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된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의 형제 불상으로 유명하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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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경주국립공원 공식 페이스북 :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
불상 높이 3m 40cm.
경주 삼릉계곡에서 만들어진 8세기~9세기 경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 불상으로, 원래는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 삼릉계곡 정상부 바위 아래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반출되었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나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등 수많은 경주 시내의 유물들이 일제의 치적쌓기 경쟁의 일환으로 서울이나 일본 등으로 강제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불상도 같은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이 석불은 광배와 대좌가 온전히 남아있는 보기드문 불상이다. 항마촉지인의 약사여래좌상으로 얼굴은 근엄하게 명상에 잠겨있는 모습인데, 머리에는 넙적한 육계를 새기고 전체에 나발을 조각하였으며 원만하고 근엄한 상호의 눈썹은 이중 반원으로 조각하였다. 미간에는 백호를 조각하였고 머리의 앞뒤가 길며, 신라 특유의 삼도가 새겨진 목은 짧게 조각하였다. 가사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로 비스듬히 내린 우견편단에, 왼쪽어깨에서 부터 무릎까지 별도로 덮어 변형된 통견형식을 취하고 있다. 왼손은 배 앞에서 오른 발 위에 얹고 약합을 얹었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에 얹어 촉지인을 하고 있다. 얼굴이 풍만하고, 신체는 건장하며, 층단형으로 표현된 옷주름 등이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양식을 이어받은 모습이다.
광배는 거의 원형으로 두광과 신광 모두 이중선으로 돌리고, 바깥으로 단순한 불꽃모양을 조각하였다. 두광의 안쪽에는 자방을 만들고 주변으로 연꽃 8엽을 조각하였고, 선과 선 사이에는 화불 3구와 구슬장식 십자모양 문양을 조각하였다. 신광은 이중선 사이에 연 한 줄기가 올라와 꽃망울과 연잎과 활짝핀 연꽃 한 송이를 조각하였다. 두광과 연결되는 부분에 올라온 활짝 핀 연꽃에는 화불을 새겨넣었다. 대좌는 상중하대를 갖춘 팔각형으로 통일신라시대 대좌의 일반형이다. 지대석에 붙은 하대에는 복판의 복련을 16잎 조각하고, 중대석은 팔각으로 처리하였는데 앞뒷면에는 안상 안에 향로를, 나머지 면에는 공양천인상을 조각하였다. 상대석에는 겹연화문을 조각하여 통일신라 중엽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의 생기없는 굳은 얼굴, 뭉툭한 손, 짧고 웅크린 자세 등 최전성기를 지난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광배와 대좌는 매우 정교하며 장식적이다. 전체적으로 광배와 대좌의 비례가 안정감이 있어 800년을 전후한 시기의 불상으로 여겨진다. 이 불상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에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신라의 대표 불상으로 차출된 후 100여년에 지난 오늘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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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
발견 당시 불상은 절벽과 큰 바위 사이에 다진 자그마한 터 위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불상이 있었던 주변 바위에는 지름 30㎝ 가량의 반원형 기둥 자리가 남아 있고 기와편이 흩어져 있어 신라시대 당시에는 큰 건물 안에 모셔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약사여래불은 3미터 40센티미터가 넘는 큰 크기를 하고 있는데 당시 신라인들은 불상을 큼직큼직하게 위용있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특이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755년(경덕왕 14)에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內末)이란 장인이 분황사에 무게 30만 6천 7백근(斤)의 약사불동상(藥師佛銅像)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존하는 성덕대왕신종이 구리 12만근을 들여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거기에 비하여 이 약사불의 크기는 애교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 불상의 수배가 넘는 크기일 것으로 짐작되는 분황사 약사불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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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경주 분황사의 약사불상 이야기 - 한국상장회사협의회
경주 남산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시대 절터는 147개 가량 되며, 특히 이 불상이 있었던 삼릉곡에는 가장 많은 수의 불상이 봉안되었다. 이 약사여래상은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된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지금으로부터 1,200~1,300여년 전 신라인들의 불교문화 및 석조공예술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된다.
1. 개요
8세기 ~ 9세기 경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의 삼릉계곡에서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 석조 불상.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된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의 형제 불상으로 유명하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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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경주국립공원 공식 페이스북 :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
불상 높이 3m 40cm.
경주 삼릉계곡에서 만들어진 8세기~9세기 경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 불상으로, 원래는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 삼릉계곡 정상부 바위 아래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반출되었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나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등 수많은 경주 시내의 유물들이 일제의 치적쌓기 경쟁의 일환으로 서울이나 일본 등으로 강제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불상도 같은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이 석불은 광배와 대좌가 온전히 남아있는 보기드문 불상이다. 항마촉지인의 약사여래좌상으로 얼굴은 근엄하게 명상에 잠겨있는 모습인데, 머리에는 넙적한 육계를 새기고 전체에 나발을 조각하였으며 원만하고 근엄한 상호의 눈썹은 이중 반원으로 조각하였다. 미간에는 백호를 조각하였고 머리의 앞뒤가 길며, 신라 특유의 삼도가 새겨진 목은 짧게 조각하였다. 가사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로 비스듬히 내린 우견편단에, 왼쪽어깨에서 부터 무릎까지 별도로 덮어 변형된 통견형식을 취하고 있다. 왼손은 배 앞에서 오른 발 위에 얹고 약합을 얹었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에 얹어 촉지인을 하고 있다. 얼굴이 풍만하고, 신체는 건장하며, 층단형으로 표현된 옷주름 등이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양식을 이어받은 모습이다.
광배는 거의 원형으로 두광과 신광 모두 이중선으로 돌리고, 바깥으로 단순한 불꽃모양을 조각하였다. 두광의 안쪽에는 자방을 만들고 주변으로 연꽃 8엽을 조각하였고, 선과 선 사이에는 화불 3구와 구슬장식 십자모양 문양을 조각하였다. 신광은 이중선 사이에 연 한 줄기가 올라와 꽃망울과 연잎과 활짝핀 연꽃 한 송이를 조각하였다. 두광과 연결되는 부분에 올라온 활짝 핀 연꽃에는 화불을 새겨넣었다. 대좌는 상중하대를 갖춘 팔각형으로 통일신라시대 대좌의 일반형이다. 지대석에 붙은 하대에는 복판의 복련을 16잎 조각하고, 중대석은 팔각으로 처리하였는데 앞뒷면에는 안상 안에 향로를, 나머지 면에는 공양천인상을 조각하였다. 상대석에는 겹연화문을 조각하여 통일신라 중엽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의 생기없는 굳은 얼굴, 뭉툭한 손, 짧고 웅크린 자세 등 최전성기를 지난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광배와 대좌는 매우 정교하며 장식적이다. 전체적으로 광배와 대좌의 비례가 안정감이 있어 800년을 전후한 시기의 불상으로 여겨진다. 이 불상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에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신라의 대표 불상으로 차출된 후 100여년에 지난 오늘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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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
발견 당시 불상은 절벽과 큰 바위 사이에 다진 자그마한 터 위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불상이 있었던 주변 바위에는 지름 30㎝ 가량의 반원형 기둥 자리가 남아 있고 기와편이 흩어져 있어 신라시대 당시에는 큰 건물 안에 모셔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약사여래불은 3미터 40센티미터가 넘는 큰 크기를 하고 있는데 당시 신라인들은 불상을 큼직큼직하게 위용있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특이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755년(경덕왕 14)에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內末)이란 장인이 분황사에 무게 30만 6천 7백근(斤)의 약사불동상(藥師佛銅像)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존하는 성덕대왕신종이 구리 12만근을 들여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거기에 비하여 이 약사불의 크기는 애교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 불상의 수배가 넘는 크기일 것으로 짐작되는 분황사 약사불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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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경주 분황사의 약사불상 이야기 - 한국상장회사협의회
경주 남산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시대 절터는 147개 가량 되며, 특히 이 불상이 있었던 삼릉곡에는 가장 많은 수의 불상이 봉안되었다. 이 약사여래상은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된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지금으로부터 1,200~1,300여년 전 신라인들의 불교문화 및 석조공예술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