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건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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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로 재현한 건명문의 모습

1. 개요


慶熙宮 建明門
경희궁중문이다. 궁의 정문흥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 정전 숭정전의 정문인 숭정문으로 가는 길에 있었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의 마당이 건명문 자리이다.

2. 역사


1620년(광해군 12년)에 지어졌으며 1860년대 중반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을 철거할 때 헐려 사라졌다.

3. 특징


  • 정면 3칸, 측면 2칸의 1층[1] 목조 건물이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상바름을 하였다.

4. 여담


  • 그 유명한 신문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억울한 사연이 있는 백성이 두드리면 이 직접 사연을 접수하고 처리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절차가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궁 안으로 들어와서 쳐야하는 문제 때문에(...) 잘 쓰이지 않다가 연산군 때 폐지하였다. 이후 1771년(영조 47년)에 부활하여 창덕궁진선문에, 경희궁엔 바로 이 건명문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미 왕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는 합법적 수단인 격쟁이 있었기 때문에 신문고는 별 쓰임새가 없었고 사실상 순조 이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건명문을 가장 많이 활용한 왕은 영조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건명문을 검색하면 인조실록에 3건, 정조실록에 1건, 그리고 순조실록에 5건이 나오는데 비해 영조실록엔 무려 185건의 기사가 나온다. 건명문 밖 마당에서 신하들의 활쏘기를 참관하기도 하고#, 죄인들을 국문하기도 하였으며#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거나# 쌀을 나눠주기도 하고# 시사(試士)에 친림하여 인재를 직접 뽑기도 하였다.# 그리고 원래 정전(숭정전)의 정문인 숭정문에서 열던 아침조회[2]도 이 곳에서 행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1]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이라고 표현한다.[2] 조참(朝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