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북송 관계

 

'''고려-북송 관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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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


고려북송의 관계.

2. 상세


후대의 국가들인 조선명나라 간의 관계는 꽤 좋았기 때문에, 고려와 북송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미묘하게 조금 다르다.
두 나라는 일단 겉으론 사이가 좋았다. 960년 송나라 건국시기 부터 고려 광종이 사신을 보내 통교를 시작했다. 만주에 거란이 등장하고 여요전쟁이 발발하는 등 국제 정세가 급변하면서 필요에 따라 국교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게 되지만, 그래도 이 과정에서 고려는 송을 이용해 요를 견제하는 동시에 공무역을 통해 송에게서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었고, 송 역시 요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에게 좋은 대접을 해줬다. 의천이 송으로 건너갔을 때 고려사란 절도 지어주고, 급기야는 고려의 사신을 서하의 사신보다 높이고, 조공사가 아닌 '''국신사'''란 별도의 명칭을 붙여 격을 높여주었다.
송나라 입장에서는 송 독자적으로는 요나라금나라를 상대할 힘이 부족했기에 고려와 힘을 합쳐 요나라와 금나라를 막아보려 했던 의도가 있었기에 고려를 잘 대해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송나라의 외교적 방침을 요나라가 있었던 때는 연려제요(聯麗制遼)라 했고 금나라가 있었던 때는 연려제금(聯麗制金)이라 했다. 물론 동상이몽이라고 정작 고려는 송이 원하는 군사적 대응에는 미온적이었다. 사실 송도 고려가 여요전쟁 당시 3차례나 도움을 요청했으나 요가 두려워서 고려를 외면하였고 그 후 고려가 틈틈이 요와 금의 상황을 알려주면서 도와줄테니 요나 금을 치자고 하면 발빼기 바빴다는 점에서 도긴개긴이긴 했다.
그래도 고려나 송, 모두 상대방에게 원한 것은 유목 제국에 대한 무언의 견제였기 때문에 견제 그 자체만으로도 외교상의 실리가 있긴 했다. 서로 군사적으로 크게 도와주진 못해도 후방 견제 그 자체에서 나오는 효과가 있었기에 결론적으로 발해를 멸망시킨 저력이 있는 요나라도 송과 고려 어느 쪽도 멸망시킬 수 없었고, 이것만으로도 송과 고려가 연합할 가치는 있었다는 것. 다만 고려의 경우는 요나라 침입 당시 결과적으로 요를 관광 태우긴 했지만, 고려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실제로 고려의 문자 기록이나 유물, 사적들을 보면 요나라의 침공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분간될 정도. 그래도 여요전쟁 당시 피해는 회복이 가능한 수준이었긴 한데, 몽골과의 전쟁은...그냥 고려가 깡그리 불태워졌다. 북송의 후신인 남송은 아예 몽골에게 멸망해 버렸고.
하지만 고려 사신에 대한 융숭한 대접과 고려와의 (조)공무역은 점점 송의 국가 재정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번은 남송의 상인들이 고려 사신들에게 물품을 빼앗겨 물어달라고 호소하기도 했을 정도. 이로 인해 요나라의 실제적인 위협이 줄어들자 송의 신료들 사이에선 반고려 입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소동파로 알려진 소식(소동파). 그는 고려를 대놓고 '''맥적'''(貊狄)이라고ㅡ 부르며 다섯가지 이유를 들어 고려와의 관계를 재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내용은,
1. '돈이 너무 많이 든다.'
2. '백성들이 힘들다.'
3. 고려가 송에서 '가져간' 물품을 거란에게 '갖다 주고' 있다.
4. 고려는 입으로는 '송을 받든다' 하면서 정작 실리만 챙길 뿐이며, 심지어 송의 지형을 '그려 가고' 허실을 조사하고 있다.
5. 거란이 고려와의 관계를 '트집잡을' 위험이 있다.
특이하게도 당시나 이후나 고려에서 소동파의 인기는 대단했다. 예를 들어 김부식과 동생 김부철은 소식과 소철 형제에게서 이름자를 따서 지은 것이었다. 기타 고려가 송에게 갑질한 내용이나 소동파의 인기는 항목 참조.
송과 고려의 이런 미묘한 관점 차이는 요 대신 금(여진)이 들어섰을 때도 비슷하게 이어지는데, 흠종 땐 소식이 주장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를 들어 고려 사신을 개봉으로 불러들이지 않고 객관에 1년이나 머물게 하다가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
이 외에도 송사를 보면 송의 여러 안습한 처지를 볼 수 있는데, 가령 고려의 사신이 들어오자 송 조정이 백성까지 동원해 '''운하'''까지 파려고 했는데 이때 손부(孫傅)라는 신하가 반대하자 이를 파직시켰다. # 이에 손부의 파직이 부당하다고 허한(許翰)이라는 또다른 신하가 이의제기를 하자 허한마저 파직시켜 버렸다.[1] #
한편 고려사신이 지금의 산동성인 청주를 방문하자 청주의 관원들이 성 밖에 나와 고려사신에게 절을 올렸으나 오직 청주의 종사 호순지만이 절을 하지 않아 송나라의 자존심을 지킨 일화도 있다.[2] #
그럼에도 고려에게 송이 퍼준 이유는 당연히 요나라 견제인데 과하다 싶을 정도로 퍼준 이유가 있다. 일단 요나라에 퍼 주는건 물론이고 서하의 경우도 하사금이라는 형식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세폐를 내야한다. 요나라에게 퍼 준 정도는 아니지만 절반 이상은 된다고. 고려랑 비슷하게 고개 숙인 안남국의 경우는 스스로를 남제라고 자칭했다. 북송 입장에선 주적인 요나 서하 견제엔 도움 안되는 위치에 있어서 별 신경을 안 쓴 것도 있다.
그에 비해 고려는 안남국처럼 해동천자 드립을 북송에게 직접 치지는 않았다. 북송 입장에선 고려가 주적인 요를 견제하기도 좋은 위치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고려와 북송 간에는 요나 서하 같이 정기적 세폐를 달라는 조약도 없었다. 사신들한테 많이 챙겨주긴 하더라도 이게 매년 서하나 요나라 한테 조약맺고 주는 세폐급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쉽게 말해 서하나 요한테 퍼붓는 어마무시한 세폐 비용을 고려의 경우는 달라고 안하니까 고려 사신이 오고 가는 데 접대용만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니까 당연히 아낌없이 접대용으로 쓰게되는 것.
결론적으로, 송나라 입장은 '''우리가 고려랑 친하게 지내면 고려가 알아서 원수 요나라를 막아 주겠지?'''이었고, 고려 입장은 '''송나라 님아, 제발 요나라 정벌 좀. 정벌만 시작하면 우리가 참가해 줌. 물론 그전까진 한발자국도 안 움직일거임ㅋ'''이었기 때문에 양자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정강의 변이 일어나고 북송의 수도 카이펑이 함락되고 북송 체제가 사실상 멸망하면서 양국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친선 관계는 강제 종료되어 버린다.[3] 이후 남송과 고려와의 관계는 고려-남송 관계 항목 참조.


[1] 송사 권363 열전122[2] 송사 권 303 열전 62[3] 물론 윤관의 여진정벌을 통해 여진족의 힘이 예전과 다르니 금나라를 믿지 말라고 고려가 경고했으나 송은 이를 씹고 금나라를 이용하여 요를 멸망시킨 후 금나라를 뒷통수 치려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