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남송 관계

 

'''고려-남송 관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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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북송의 몰락
3. 남송 시대 - 외교 단절
4. 새로운 동맹 - 남송의 몰락


1. 개요


고려남송의 관계. 정강의 변 이전의 관계는 고려-북송 관계 문서 참고바람. 본래 송은 고려와 겉으로는 깊은 우호관계를 맺었으나 그 내면은 상당히 복잡했다. 그리고 정강의 변 직후 송고종 때 무리하게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가 결국 고려와의 외교 관계는 파탄이 나고 말았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서술한다.

2. 북송의 몰락


정강의 변 직후, 어찌된 일인지 송고종은 끌려간 휘종흠종을 돌려받겠다며 고려에 사신을 보낸다(?!). 명목상으로 내세운 것은 고려를 경유하여 여진으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다는 알쏭달쏭한 이유. 뭐, 난리법석이 된 북방의 육로를 거쳐 사신을 보내는 것보다 해상을 통해 안전한 고려를 경유하여 사신을 보내는 것이 더 빠르긴 했지만, 실제로는 '''고려가 남송에 줄을 설 것인지 금에 줄을 설것인지 확인하려 했던 것'''이라고 봐야 한다. 한편으로는, '혹시나 만약에 1000만분의 1이라도...고려 너네님들이 금나라 좀 때려줄 생각 없나요?'라는 생각도 있었을테고.(...) 뭐 그 정도까진 못해도 송을 위해 '''여진에 대한 최소한의 중개 역할'''을 해달라는 의도였다고도 불 수 있다. 어쨌거나 말하면, 이미 전세가 뒤집힌 상황에서 고려에게 태도를 정하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한 것인데...
이같은 행동은 결론적으로 무리수였다. 왜냐하면 금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여태까지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던 고려에게 조서를 내려 태도를 분명히 정하도록 압박을 가할 것인데, 이럴 경우 고려가 실리적으로 금을 선택할 것이 너무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송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若高麗辭以金人亦請問津以窺吳·越, 其將何辭以對?

만약 고려가 '금나라 사람도 오·월을 엿보기 위하여 나루터를 물어 왔다'라고 말한다면 앞으로 무슨 말로써 그에 대답하겠습니까?"

《송사》 외국 열전 고려조 건염 2년 10월.

이게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먼저 무리하게 도와달라고 했다가) 금나라도 고려한테 강남 공략을 도와달라고 하면 어쩔겁니까?"'''
당연히 예상대로 고려도 송나라의 무리한 요청에 크게 당황해 고려 인종은 난처해하면서 아예 송고종의 조서를 거부했다. 송사 외국 열전 고려조 건염 2년에는 대놓고 "楷有難色(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1] 사실 고려 입장에선 나름 최선을 다한다고 김부식이 송의 사신을 접대하게 하는데, 이는 고려로선 최선의 인선이었다. 김부식이 실제로 친송인지 아닌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소식의 이름자를 따라 이름을 지었을 정도로 송나라를 잘 알고 송나라 문화를 좋아하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 그런데 그런 김부식조차도 송의 사신에게 '''"여진에서도 우리 보고 군사를 요청하면 어쩔거냐? 우리도 신하로 삼던 여진이랑 친선하고 있으니 딱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너네는 왜 진작에 군사를 조직해서 여진을 칠 생각은 않고 여기 와서 이러는 건지?"'''이라며 송의 사신을 돌려 까버렸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송고종은 고려가 은혜를 저버렸다며 크게 화를 내었다는데, 심지어 어떤 정신 나간 신하는 고려를 공격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右僕射 黃潛善曰, "以巨艦載精兵數萬, 徑擣其國, 彼寧不懼."

우복야 황잠선이 말하기를, 큰 전함에 정예병 수만명을 싣고 가 곧바로 고려의 도읍지를 공격하면 저들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송사》 외국 열전 고려조 건염 2년 10월.

당연한 얘기지만, 개봉에서 시원하게 털리고 거지꼴로 강남으로 도망쳐 온 상황에서 고려를 정벌할 군사력 따윈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협력할 만한 유일한 나라라고 굳게 믿었던 고려가 딱 잘라 거절하니 마지막 실낱 같던 자존심에 고려가 핵펀치를 날려버린 것.[2]
어쨌거나 정신 멀쩡한 다른 신하들이 말렸고, 고려 쪽에서도 이내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면서 겉으로는 무마되었다만 어디까지나 말 뿐이었고 동맹을 맺거나 이후로도 군사 원조를 했다는 건 전혀 없었다. 그 이후로 결국 고려와 남송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반대 급부로 고려와 금나라의 사이는 더욱 가까워졌다. 실제 고려와 금나라 사이엔 단 한 번도 전쟁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고려와 금나라는 우호 관계였고, 두 국가는 우호 관계에 금이 갈 만 한 일은 사전에 차단하였다. 무신정변 시절엔 조위총정중부이의방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금나라의 힘을 빌리고자 매국노 짓이나 다름없이 서경 일대 40여성을 들어 귀순하겠다고 요청했으나 '''금나라가 조위총의 귀순을 거부하면서''' 우호 관계를 굳건히 했다.[3]
이런 외교 관계에는 당시 고려의 매우 복잡한 내부 사정도 작용했다. 당장 정강의 변이 일어난 1126년에는 이자겸의 난이 발생해서 개경의 왕궁이 불타고 인종이 이자겸의 저택에 머무르다가 죽임을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이런 난리를 채 수습하기도 전에 그 뒤인 1135년에는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발생해서 이를 진압하느라 또 혼란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는 남송과 협력해서 금나라와 군사적으로 대립할 여유가 없었고, 당연히 금나라와는 우호 관계를 맺으며 외부를 안정시켜야 했다. 그래서 남송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북송 멸망으로 송에게 남은 최후의 수단은 고려와의 연합 뿐이었는데, 군사적인 연합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그나마 가능한 것은 외교적인 연합 내지 친선 관계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그런데 송고종이 주위에서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고려에게 무리하고 성급한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가 '''양국 관계가 쫑 나버렸다'''는 슬픈 이야기.

3. 남송 시대 - 외교 단절


송고종 이후 다시는 송 - 고려 관계가 복원되지 않았다. 심지어 남송은 내내 고려가 금의 첩자 노릇을 할 거라는 강박 관념에 시달렸다. 고려가 위의 사건 직후 송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이후로도 몇 차례 조공을 보내보지만 남송은 끝끝내 이를 거부한다.
그러다가 1195년 ~ 1200년 무렵에는 아예 상인들이 고려에 동전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조차 금지해버린다. 뭐 민간에 다한 이러한 명령이 잘 이행되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이것으로 국가와 국가 간의 정식 관계는 단절되어버린 셈. 실제로 남송의 기록을 보면 이후로 더이상 고려에 대한 언급이 없다.
남송이 이런 조치를 취한 것도 나름 이유가 있긴 있었는데, 일단 겉으로 드러난 원인은 믿었던 고려에게 공식적으로 구원 요청을 거부당한 탓에 강남으로 도주한 굴욕을 당해 황제국으로서 권위에 큰 손상을 입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번 권위를 잃자 의심을 품게 되버렸고, 고려를 특별 취급할 이유를 잃게 된 것.

하지만 역시나 가장 큰 원인은, '''고려와의 관계가 더이상 실익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당시 통신 보급 상황으로는 대륙을 거쳐 말 몇마디로 타국끼리 실제적인 군사 협력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 심지어 나당 연합군처럼 왕국을 하나씩 격파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는 제국으로 거듭나며 성장하는 기마 민족이다. 한마디로, 카이펑이 함락되어 송나라가 강남까지 밀려나고 고려와 지리적으로 격리된 순간부터, 송-고려 연합이 금에게 실제적인 압박을 가한다는 계획은 완벽하게 소멸된 것.
사실 고려 입장에선 고려의 중립 외교가 현실적으로 실익을 보았긴 하지만, 애초부터 고려는 송의 국방 정책과 외교적 해결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에도 일단 기회가 나는데로 송에게 북방 정벌을 권유해왔고, 이것이 계속해서 무시 내지 거부 당했던 것. 그렇지만 '''북방 정벌을 권유라도 할 수 있는 송이 존재하긴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겐 힘이 되니까 송과 관계를 유지할 필요성이 있다'''라는 입장.
그런데 이렇게 취약한 이론상의 명분과 실익이 북송 멸망이라는 현실 앞에서 더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가 관성적으로 송나라와의 관계를 이어가려 하긴 하였으나 사실 무의미한 일이었고, 먼저 송이 무시하자 고려 역시 억지로 양국 관계를 이어나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고려 - 송 관계는 종료된다.

4. 새로운 동맹 - 남송의 몰락


한편, 남송은 이후 '''고려 대신 새로운 군사적, 외교적 협력 상대'''를 찾아내긴 했는데, 문제는 그들이 바로 몽골 제국이라는 것이다.어쨌든 남송은 '송나라 주도-고려 참가'를 주장했던 고려와는 달리 북송 시절부터 한족들이 가장 원하는 전쟁 시나리오였던 '몽골이 주도-송나라 참가'라는 전략 동맹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4] 몽골이 금나라를 개박살 내는 동안 남송은 뒤치기를 날려서 원수였던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복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잘 알려져 있듯 송나라는 실익을 거의 얻지 못했고 반면에 몽골은 남송의 도움으로 금나라를 간단히 무너뜨리는데 성공하고 이후의 남송은 몽골을 몇번 격퇴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더 지독한 몽골에게 완전히 멸망당하며 이후에는 원나라의 중국 지배가 시작된다. 물론 고려도 멸망은 면했지만 몽골의 침략으로 사실상 속국이 되어 1세기에 가까운 원 간섭기를 보내게 됐다.[5]


[1] '해'는 인종의 본래 이름이다.[2] 설령 고려 정벌을 위한 병력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고려랑 싸우는 순간 농담이 아니라 '''쳐발렸을 것이다.''' 당시 이자겸의 난 등으로 국내 정세가 어지럽긴 했어도, 고려 군사들은 건국 이래로 끊임없이 거란과 여진, 왜구와 싸워온 베테랑 중 베테랑들이었다. 반면 당시 남송의 군사력은 고려에게 한때 사대를 하던 여진만도 못했으니 이들이 고려 정벌을 하려고 고려의 영토에 들어가는 순간 고려의 정규군에게 귀주 대첩 이상의 대패를 당했을 것이다.[3] 이에 관해서는 금나라가 수립되기 이전 고려에 그토록 징징거리며 매달린 끝에 돌려받았던 동북 9성에 대한 기억, 일종의 고려에 대한 '부채의식'이 작용한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 고려의 여진 정벌 항목 참조.[4] 당연하지만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금나라랑 좀 찝찝한 사이 정도였던 고려랑 달리 몽골은 금에 대한 원한이 송 못지않게 엄청났기 때문이다.[5] 고려와 남송의 차이는 몽골이 고려를 멸망시킬 생각은 없었다는 점이 컸다. 몽골이 모든 국가를 닥치고 멸망시킨 것은 아니고 정복 대비 실익이 별로 없는데 비용은 많이 든다 싶은 곳들은 저항이 처절하다 싶으면 항복을 권했는데 끝까지 버티고 다른 지역을 고려할 필요가 없으면 멸망시키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단 타협안을 제시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