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제이 덴노

 


[image]
'''시호'''
고요제이 덴노(後陽成天皇, 후양성 천황)
''''''
가즈히토(和仁)→가타히토(周仁)
'''능호'''
후카쿠사북능(深草北陵)
'''생몰'''
1571년 12월 31일 ~ 1617년 9월 25일
'''재위'''
1586년 12월 17일 ~ 1611년 5월 9일
'''연호'''
분로쿠(文禄)→케이초(慶長)
'''황거'''
츠치미카도히가시노토우인도노
(土御門東洞院殿)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일본의 제107대 천황. 에도 막부의 첫번째 천황이다. 원래 이름은 가즈히토(和仁)였지만, 후에 가타히토(周仁)로 고쳤다. 오오기마치 덴노의 황태자 사네히토 친왕(誠仁親王)의 아들. 고요제이 덴노는 즉위한 후 아버지를 요코 덴노로 추존했다.

2. 생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로쿠(文禄) 2년(1593), 조선에서 약탈해 온 금속활자와 활자인쇄본 서적을 고요제이 천황에게 바쳤다. 천황은 그 해 구게 로쿠조 아리히로(六条有広)나 니시도인 도키요시(西洞院時慶) 등에게 명해 그 기술을 사용해 '고문효교(古文孝教)'를 인쇄하도록 하였다(분로쿠칙판文禄勅版). 이는 일본에서 금속활자를 사용한 최초의 인쇄 작업이었다. 또한 게이초(慶長) 2년(1597)에 조선 활자를 모방한 대형 목활자(木活字)를 제작해 '금수단(錦繍段)'을 개판하게 하였다(게이초칙판慶長勅版). 역으로 말하자면 한국사에서는 고려시대 때 개발된 금속 활자가 저때까지도 일본에는 없었다는 소리가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자 단고(丹後)의 다노베 성(田辺城)에서 서군(西軍)과 교전 중이던 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斎)를 아껴서 양군에게 칙령으로 성을 열 것을 명했다. 게이초 8년(1603)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정이대장군/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으로 임명하고, 에도 막부가 개창되었다. 조정의 권위를 억압하려는 막부는 교토에 대한 간섭을 강화해, 조정이 갖고 있던 관위 서임권이나 연호 개원(改元)까지도 막부가 가져왔다. 게이초 14년(1609)에 궁중에서 여관(女官)의 밀통 사건(이노쿠마 사건猪熊事件#)이 일어나자 막부는 교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에 명해 엄벌을 요청하였다.
고요제이 덴노는 히데요시의 강권으로 제1황자 요시히토 친왕(良仁親王)을 차기 계승자로 삼았지만, 히데요시가 죽고 이를 꺼려 동생 도모히토 친왕(智仁親王)에게 양위하기를 바랬고, 조정 신료들이나 쇼군 이에야스는 이를 반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 뒤, 고요제이 천황은 이에야스의 동의를 얻어 요시히토 친왕을 강제로 닌나지(仁和寺)에 출가시키고, 제3황자인 마사히토 친왕을 태자로 세웠다. 게이초 16년(1611)에 마사히토 친왕(훗날의 고미즈노오 덴노)에 양위하고, 센도고쇼(仙洞御所)로 물러났다. 그러나 고미즈노오 덴노는 상황의 처소에 좀처럼 찾아가지 않는 등 덴노와 상황 두 부자는 오랫동안 불화 상태였다고 한다.
겐나(元和) 3년(1617)에 47세로 붕어하였다. 시신은 화장되었는데, 이후 역대 덴노는 모두 매장되었으므로, 화장으로써 장례를 치른 마지막 덴노로 기록된다.[1]

3. 기타


유학국학에 매우 능해서 겐지모노가타리 문서, 이세모노가타리 구간쇼를 지었다고 하며 일본서기를 게이초칙판으로 발행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죽은 후에, 히데츠구의 어머니를 위로하고자 즈이류인(瑞龍院)이란 원호를 내렸으므로 히데츠구와 사이는 나쁘지 않았던 듯하다.
여담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당시의 덴노이기도 하다. 조선으로 출병하지 말라는 어명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내렸는데, 씹혔다(...).

[1] 단, 125대 덴노였던 아키히토 상황의 이후 장례 예법이 화장으로 공개되면 변경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