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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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臣秀次
1568년 ~ 1595년
1. 개요
일본 쇼쿠호 시대의 쿠게나리 다이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였으며 후계자였던 인물. 1590년대 초반 칸파쿠(関白)직을 역임하며 사실상 도요토미 정권의 이중 권력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리 탄생 후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2. 생애
2.1. 초기
156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누나인[1] 토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지헤에(治兵衛).
1570년 오다 노부나가와 아자이 나가마사의 동맹이 깨진 후, 1572년 외숙 히데요시가 아자이 나가마사의 가신 미야베 케이준을 회유하면서 케이준에게 인질 겸 양자로 보내진다. 이후에는 미요시 야스나가의 양자로 가서 미요시 성(姓)을 사용했다.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이후에는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후계로 대두되면서 히데츠구는 히데요시의 몇 없는 친척으로 중용되었으며, 시즈가타케 전투, 키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에 종군, 착실히 공을 세워 100만석의 다이묘로 성장했다. 단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서로 간의 유일한 전투인 코마키 - 나가쿠테 전투에선 참패를 당한 전적이 있다.
전투에서 신중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서로 군을 움직이지 않았고 양군은 교착 상태에 빠졌는데, 이케다 츠네오키가 나카이리(中入り - 별동대를 이끌고 적 후방이나 본거지를 공격하는 일, 일종의 우회 기습)를 건의해 나카이리 부대의 총대장이 되어 출진했었다. 근데 이를 간파한 이에야스의 역공에 당했고 함께 출진한 이케다 츠네오키[2] (히데츠구의 장인)와 모리 나가요시 (모리 란마루의 형)등은 전사, 히데츠구 본인은 겨우 목숨을 건진 채 도망쳤다.
2.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였던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요도도노가 낳은 도요토미 츠루마츠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츠루마츠는 3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히데요시의 나이는 이미 50살이 넘어갔기에 더 이상 아이를 기대할 수 없으리라 여겼고, 이에 여러 양자들 중[3] 가장 가까운 혈족인 여동생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후계자가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히데츠구에게 칸파쿠의 자리를 넘겨주고 자신은 전임 관백이라는 뜻에서 태합에 취임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시기 임진왜란에 전념하고 있던지라 도요토미 히데츠구는 주로 내정을 맡았고, 실제로 안 그래도 무거운 징세로 악명 자자한 일본에서 전쟁 노역 때문에 고통받던 백성들의 삶을 나름대로 잘 보살펴주었다고 한다. 고요제이 덴노가 히데츠구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히데츠구의 어머니에게 원호를 내려줘서 위로했다는 것을 볼 때 교토의 관백으로서 황실과의 관계도 괜찮았던 모양.
이대로 도요토미氏의 후계자로 잘 사나 싶었지만... 요도도노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게 되면서 상황이 뒤집힌다.
주변 사람들은 살아남고자 모조리 히데츠구와 관계를 끊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는 것을 안 히데츠구는 저 나름대로 살아남고자 고민하게 된다. 그 일환으로 자신의 딸과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혼약시키고 장성할 때까지의 후견인을 자처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를 놔두면 히데요리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것으로 여겨 일가족과 함께 숙청한다.
훗날 이는 도요토미 가에 엄청난 자충수로 돌아오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땜방은 잘하지만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없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가 가진 편협한 시야가 그대로 드러난 일로도 볼 수 있다.
- 다만 히데요시의 히데츠구 숙청을 꼭 <편협한 시야로 인한 근시안적 실책> 이라고 보아야 할 지에는 상당한 이론의 여지가 있다. 애초에 히데요리의 탄생 자체가 히데요시 개인에게는 엄청난 행운과 기쁨이었을지 몰라도 도요토미 정권 차원에서는 오히려 빼박불가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든 함정 카드에 가까웠던 것이다. 히데츠구를 동정하는 의견에서는 흔히 히데요리 탄생 이후 히데츠구가 그 후견인을 자처하며 자신에게 반란의 뜻이 없음을 필사적으로 호소했다는 점에 주목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히데요시의 권력이 건재한 상태에서> 히데츠구가 저자세를 취했다는 것일 뿐이지, 히데요시 사후에도 같은 태도를 유지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또한 명의 영락제나 조선의 세조, 동로마의 안드로니코스 1세와 같이 전대의 권력자가 살아있을 때에는 별다른 찬탈 의사를 보이지 않던 친족이 그 권력자가 죽고 어린 후계자가 승계받은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권력을 찬탈하려 들었던 사례는 역사적으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히데츠구가 히데요시에게 대항할만한 힘이 없는 상태에서 무력하게 숙청당했기에 <굳이 숙청할 필요가 없었는데 괜한 짓을 했다>고 받아들여질수도 있지만 실제 당시 도요토미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히데요시 사후 히데츠구가 히데요리를 위협할 가능성은 충분히 높았고 이를 막을 다른 안전장치가 따로 없었기에 막연하고 낙천적인 기대만으로 히데츠구를 방치하기는 너무 위험했던 것.
이 문제를 숙청없이 깔끔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사실 딱 하나뿐인데, 바로 히데요리가 충분히 성장하여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때까지 히데요시가 권력을 장악한 채 살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려면 히데요시가 최소한 70대 중후반까지 장수해야 하는데, 당시 사람들의 기대수명을 생각하면 이는 상당히 난망한 목표이다.(실제로도 히데요시는 60대 초반에 죽었다.) 그리고 정치적 상황 역시 좋지 않았던 것이, 일단 히데츠구와 히데요리의 나이가 25세 차이로 히데요리가 20세의 성인이 되었을 때 딱 히데츠구는 45세로 경력의 절정을 달리고 있게 된다. 히데요리가 히데츠구와 대등한 상대로 성장하기에는 나이차가 너무 크지만 그렇다고 히데요리가 전면에 등장했을 때 히데츠구가 자연스럽게 물러나기에는 적은 나이차인 것. 게다가 히데츠구의 숙청 과정에서 유력 다이묘 가문의 딸들이 연루된 것이 히데요시가 인망을 크게 잃은 원인으로 지적되는데... 이는 돌려 말하면 히데츠구가 여러 유력한 다이묘 가문들과 혼인관계를 맺은 정도로 탄탄하게 자신의 권력기반과 후계자로써의 입지를 이미 다지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만약 후계구도를 두고 경쟁하게 된다면 히데요리로써는 불리한 점을 하나 더 갖게 되는 셈. 또 그리고, 히데츠구의 숙청으로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요토미 가문 내에서 히데요리를 보호할 성인 남성이 전혀 없게 되었다는 것이 도요토미가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역사적으로 권력자의 친족은 그 가문의 위세를 유지하는 주춧돌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권력자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의 역할도 한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차라리 성인 남성이 여럿이면 상호 견제라도 기대해 보겠지만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가문 내의 성인 남성이 히데츠구 한명(게다가 히데츠구는 나름 입지를 가진 한때의 후계자)인 상황이 되면 차라리 가문 외의 적보다도 더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히데요시->히데요리의 권력 계승 구도에서 히데츠구는 지나치게 강력한 잠재적 위협이었기에 어차피 숙청은 피하기 어려웠다는 것. 히데츠구가 살아있다는 것은 곧 히데요리가 지속적으로 치명적인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물론 히데츠구에 대한 히데요시의 숙청이 지나치게 잔인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 역시 다른 면에서 보면 그 정도로 강력하고 철저한 숙청이 필요할 정도로 히데츠구의 위협은 막대했다. 말하자면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히데츠구 숙청 자체는 필연적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수단과 정도에서 지나침이 있긴 했으나 그 역시 어느 정도는 필연적이었던 셈이다. 또 이 부분에서 역으로 보면, 만약 히데츠구가 히데요시의 권력을 계승한다면 그때는 전임자의 아들이라는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히데요리가 히데츠구에 대한 위협으로 자리잡게 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조카를 무리하게라도 숙청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갓 태어난 아들이 아닌 조카를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것이고, 이 경우 조카가 권력을 승계한 후 아들을 숙청할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위험성이 생기는 것이다.. 결국 히데요리의 탄생은 히데요시에게 <도요토미 가문의 권력 유지>와 <아들의 안전과 권력 계승>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딜레마를 안겨주었던 것이며, 여기에서 히데요시가 한 선택은 도요토미 가문의 권력 유지에 불안 요소를 만들더라도 아들을 보호하고 아들에게 직접 권력을 물려주는 쪽이었던 셈이다.
정리하자면, 히데요시->히데요리의 권력 계승 구도에서 히데츠구는 지나치게 강력한 잠재적 위협이었기에 어차피 숙청은 피하기 어려웠다는 것. 히데츠구가 살아있다는 것은 곧 히데요리가 지속적으로 치명적인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물론 히데츠구에 대한 히데요시의 숙청이 지나치게 잔인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 역시 다른 면에서 보면 그 정도로 강력하고 철저한 숙청이 필요할 정도로 히데츠구의 위협은 막대했다. 말하자면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히데츠구 숙청 자체는 필연적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수단과 정도에서 지나침이 있긴 했으나 그 역시 어느 정도는 필연적이었던 셈이다. 또 이 부분에서 역으로 보면, 만약 히데츠구가 히데요시의 권력을 계승한다면 그때는 전임자의 아들이라는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히데요리가 히데츠구에 대한 위협으로 자리잡게 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조카를 무리하게라도 숙청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갓 태어난 아들이 아닌 조카를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것이고, 이 경우 조카가 권력을 승계한 후 아들을 숙청할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위험성이 생기는 것이다.. 결국 히데요리의 탄생은 히데요시에게 <도요토미 가문의 권력 유지>와 <아들의 안전과 권력 계승>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딜레마를 안겨주었던 것이며, 여기에서 히데요시가 한 선택은 도요토미 가문의 권력 유지에 불안 요소를 만들더라도 아들을 보호하고 아들에게 직접 권력을 물려주는 쪽이었던 셈이다.
3. 히데츠구 할복 사건
1595년, 히데츠구가 천황에게 돈을 바치거나 유력 다이묘들에게 돈을 빌려준 것이 포착되자, 히데요시는 모반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히데츠구를 추궁한다. 그런데 당시 히데츠구는 조정의 대신직인 관백이었고 당시 일본 왕실이 돈이 없어서 다이묘들에게 돈을 지원받아 살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4] 왕에게 돈을 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다이묘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상위 영주가 하위 영주에게 흔히들 하는 일이었다.
히데츠구는 해명을 위해 출두하지만 히데요시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7월 8일 히데츠구는 결국 출가해 고야산高野山으로 들어간다. 이 시대에 출가한 자는 할복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는 출가한 관백이라고 해서 젠코우禅閤라고 했으며, 도요토미의 성으로부터 호우젠코우(豊禅閤)라고 불렸다.
하지만 7월 15일 히데츠구는 할복을 행했다. 결국 히데츠구는 세이간사(青巌寺)・야나기(柳)의 사이[5] 에서 할복한다. 향년 28세. 사세구는 "물가 그림자의 소나무의 폭풍이나 친구 물떼새 살지 않게 된 구석의 포구(浦)(磯かげの松のあらしや友ちどり いきてなくねのすみにしの".
그 후 그의 목은 산죠가하라에 효수되었고 그의 처자 30여명도 그 앞에서 처형되었다.[6] 그것도 모자라 그 시신을 한 구덩이에 파묻은 뒤 '축생총(畜生塚)'이라 이름 붙였다. 당시에는 보통 할복해서 죽은 사람의 가족까지 처형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지나친 처분이라는 말이 많았다.
당연히 여기에는 계실 이치노다이와 그 딸 미야도 끼여있었다. 모가미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는 측실이라 하나 아직 나이가 어려 히데츠구의 처소에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였지만 그 안에 들어갔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딸을 살리기 위해 애걸했으나 히데요시는 모가미 요시아키의 면회 조차 거부하며, 심지어 코마히메 처형 후에도 코마히메의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근신 처분을 내려, 모가미 요시아키를 몇 개월간 강제로 연금시켰다. 이 와중에 모가미 요시아키의 정실 부인이자 코마히메의 어머니가 사망했다.[7]
다만 히데츠구의 정실은 이케다 츠네오키의 딸, 즉 이케다 테루마사의 누이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모친이 누구인지는 불명이지만(이치노다이의 딸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확증은 없다) 후에 사나다 노부시게의 측실이 되는 딸 한 명과 그녀의 동복 누이도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또한 오고노 츠보네의 딸인 오키쿠도 갓난 아이라는 이유로 외갓집에 맡겨져 살아남았다.
이 사건으로 히데츠구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히데요시는 민심을 크게 잃었고, 히데요시 아들인 히데요리와 모친인 차차에게도 원망의 화살이 가는 등 도요토미 세력 약화에 결정타를 먹인다. 게다가 마에노 나가야스, 키무라 시게코레 등 도요토미를 오랫동안 섬겨왔던 고참 신하들이 할복 또는 유형에 처해지면서 도요토미 정권의 가신단이 크게 줄어들었으며 모가미 요시아키, 호소카와 타다오키, 토도 다카토라, 다테 마사무네 등의 유력 다이묘부터 아사노 나가마사, 미요시 나가후사 등 친족들마저 연루되어 처벌을 받음으로서 히데요시 사후 이들 유력 다이묘와 친족들이 히데요리의 방어막이 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붙는 계기가 되었다.[8]
예전에는 '간신' 이시다 미츠나리의 참언 탓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도 많다. 옛 히데츠구 가신들 중 상당수가 이시다 가에 들어갔으며, 심지어 마이 효고 같이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미츠나리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다 전사한 이들도 있다는 것이 그 근거 중 하나. 아무래도 주군을 참소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더 나아가 미츠나리가 오히려 히데츠구의 구명에 나섰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오사카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숨겨진 히데요리 아들인 도요토미 쿠니마츠까지 찾아서 사형시키자 많은 백성들이 "태합 전하가 자신의 아들 히데요리에게 천하를 물려주려고 죄없는 히데츠구와 그 가족들을 학살한 인과응보"라고 말할 정도였다.
3.1. 숙청 명분
에도 시대에는 천도론에 입각하여, 히데츠구가 악행을 저질렀고, 그로 인하여 숙청당했다는 시선이 존재하였다. 그러한 에도 시대의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다.
- 오사카에서 벌어진 의문의 연쇄 살인의 범인이 그라고도 한다.[9]
- 천황이 죽어서 사냥이 금지되어 있는데도 사슴 사냥을 하겠다고 우기기도 했으며[10] 금녀의 성역이자 금렵구인 히에이(比叡) 산[11] 에 여자들을 데리고 사슴 사냥을 갔다가 스님들로부터 제지를 받자 더 날뛰며 원숭이며 너구리까지 잡아 절 본당에 가져와 요리해 먹었다. 이를 전해들은 히데요시는 말문이 막혀있다가 겨우 '저건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 그 외에도 의붓 딸과의 추문이 있었다. 히데츠구의 계실[12] 이치노다이는 원래 히데요시의 측실이었다가 히데츠구에게 내려졌는데, 히데요시 전의 남편과의 사이에 미야라는 딸이 있었다. 이 딸에게 히데츠구가 손을 댔다는 것. 이 소문을 듣고 히데요시는 모녀를 함께 사랑하다니 짐승이나 할 짓이라며 격노했다고 한다.
- 츠지기리 형식으로 시험 베기를 시행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와 같이 악행에 대한 이야기는 부정되었기 때문에 숙청의 명분은 히데츠구의 정책에 대한 히데요시의 반발 혹은 히데요시에 대한 모반 혐의였다고 여겨진다. 모반이 실재한 것이었냐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료와 학자들이 부정하고 있으나, 그와 별개로 모반이 히데츠구의 혐의였다는 시선은 존재한다.
한편, 근래에 도요토미 정권의 구조에 대한 연구를 행한 야베 켄타로(矢部健太郎)의 경우, 히데츠구의 모반은 존재하지 않았고, 애초에 히데츠구의 죽음은 숙청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4. 가계
- 정실 : 와카고젠(若御前) -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딸
- 계실 : 이치노다이(一ノ台) - 우대신(右大臣) 기쿠테이 하루스에(菊亭晴季)의 딸, 처형
- 측실 : 미야 - 처형
- 측실 : 기타노 소바이인(北野松梅院) - 도요토미 주마루(豊臣十丸)의 할머니, 생존
- 측실 : 고고노 쓰보네(小督局) - 단노와 뎃사이 다카시게의 딸
- 오키쿠 - 사건 당시 생후 1개월이라서 생존.
- 코마히메 -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의 딸, 처형
- 측실 : 오쿠니(お国) - 오시마 신자에몬(大島新左衛門)의 딸
- ?(이치노다이로 추정)
- ? - 생존, 우메가코우(梅小路) 가문에 하가(下嫁)
- 류세이인(隆清院) - 생존,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의 측실로 하가(下嫁)
5. 평가
그를 보는 시각에 따라 악행을 일삼은 포악한 권력자와 음모에 휘말린 불우한 청년으로 견해가 갈린다. 과거에는 대체로 전자가 우세했는데, 이는 에도 막부의 도요토미 정권 비하 및 일본 제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미화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전자의 경우 히데츠구가 히데요시에게 숙청당한 불쌍한 피해자인 것과 별개로 도요토미 가문 인물을 좋게 평가하는 것 자체가 에도 막부의 정통성에 위협을 가하는 일이 되었고[15] , 후자의 경우 일본 제국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조선 및 대륙 침략의 선구자로 추앙하며 그가 말년에 일으킨 임진왜란까지 미화했으므로 말년의 히데요시를 최대한 좋게 평가하려면 히데츠구 숙청 또한 히데츠구 본인의 자업자득으로 평가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가 선정을 베풀었던 점[16] , 센 리큐를 사사(師事)하고 공가들과 교류 했던 교양인이었다는 점 등이 조명되면서 후자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다. 행정 면에서 나름대로 재능이 있었고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는 등 배움에 힘썼고 임진왜란으로 많이 어려워진 일본 백성들 삶에도 노력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외에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당대 일본의 천황이었던 고요제이 덴노가 그의 명복을 빌고자 히데츠구의 어머니에게 원호를 하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한국인들 중에서도 임진왜란을 일으켜 수많은 조선 백성들을 죽게 만든 잔혹한 양아버지에게 비참하게 숙청당한 것 때문에 히데츠구를 동정하는 이들이 많은 편이다.
히데요시 사후 어린 사촌 동생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자리를 찬탈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히데요리를 보좌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쉽게 전횡하지 못했을 수 있고, 설령 찬탈했다 한들 친자식이 아니라는 게 정설인 히데요리와 달리 진짜 혈연이기 때문에 도요토미氏의 정권임에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래저래 안타까운 인물.[17]
6. 기타 창작물
6.1. 영상물
NHK 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에서는 대하 드라마 단골 배우인 진나이 타카노리[18] 분. 작가에 따라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는 나름의 능력자나 희생자로 그려지기도 하는 다른 작품에 비해서, 순수하게 열등감 투성이에 능력은 없는 개찌질이에다가 페도 로리콘으로 전락해버렸다(...)
오슈를 정벌하는 도중 술자리에 모가미 요시아키의 가족을 불러서 시중들게 만들며 자기 꼬봉이 되라고 요구하는데, 그것만 해도 명문인 모가미 씨[19] 에게는 굴욕 중의 굴욕이건만 겨우 10살 남짓한 모가미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를 앉혀놓고 술을 따르라며 희롱하다가 급기야 첩으로 달라고 조르기까지 한다. 옆에서 보던 아사노 나가마사가 어이없었는지 코마히메는 아직 너무 어린 나이이니 좀 큰 뒤에나 데려가라고 하자, '''"나가마사 자네는 아직 여자 맛을 모르는구만. 활짝 피어난 꽃도 아름답지만 조그마한 꽃봉오리의 맛 또한 각별한 것이야."'''라고 꾸짖고, 당황한 요시아키가 코마히메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서 폐를 끼쳐 가문의 망신이 될까 두렵다고 최대한 완곡하게 거절하자 '''"그건 내가 천천히 하나하나 가르치겠다!"'''라고 일갈하여 좌중과 시청자들을 식겁하게 만들었다.
이런 변태적인 모습을 보이는 히데츠구에게 식겁한 모가미 요시아키가 필사적으로 거절하려고 하자 열등감이 폭발해서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날 소홀하게 대접하고도 앞으로 출세할 수 있을 것 같나?! '''코마히메를 내놔!'''"라고 억지를 부려 결국 관철시키고 만다. 대놓고 변태 아저씨 A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는데다가 너무 노골적인 단어들이라서 저건 도저히 TV에 나올 워딩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시청자들도 많다(...)
후일 히데츠구 사건으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데, 코마히메의 죽음은 모두가 안타까워했지만 이 드라마의 히데츠구는 보여준 모습이 있는지라 많은 시청자들이 천벌이라고 생각했다. 요시아키는 자기가 권력 앞에 굴했기 때문에 딸이 죽었다며 비통해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요 근래의 평가가 반영되어 인정받고 싶어했던 젊은이의 모습으로 나온다. 역사적으로 야마우치 카즈토요가 히데츠구의 휘하였다는 것을 반영하여 드라마 내에서의 평가가 후한편. 히데요시를 위하여, 포로로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 모습이 나오고 전쟁보다는 행정에서 나름 공적을 발휘한 것도 나온다. 하지만 츠루마루가 생겨난 후 불안해 하는 모습이 점차 보이고,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좌절하여 술로 인생을 보내게 된다. 거기에 관백자리에서 내치려는 것을 안 부하들의 반발과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비참하게 자결하게 된다.
사나다마루에서는 능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인품도 있는 사람 좋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츠루마루가 죽고난 뒤 나름 정신을 차려서 제대로 관백의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히로이마루가 태어나자 심각하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동생의 죽음에 대해서 차갑게 대하는 히데요시의 모습에 질려서 결국 관백 자리를 버리고 도주한다. 쿄에 있는 사나다 가의 저택에서 숨어지내다가 사나다 노부시게가 히데요시에게 소환되자 코야 산으로 도주, 결국 그곳에서 할복하며 생을 마감한다.
세키가하라(2017)에서는 본인은 등장하지 않지만, 정실을 제외한 측실과 가솔들이 참형에 처해지는 장면이 나온다.
6.2. 노부나가의 야망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개발살 당한 것 이외에 군사적으로 큰 실책도 없고, 오히려 행정 면에서 히데요시를 보조한 전적이 무색하게 완벽한 폐급 능력치로 나온다.
능력치는 창조 기준으로 통솔 37, 무용 52, 지략 27, 정치 55.
6.3. 한국의 사극들
여기서는 100% 히데요시의 희생자로 묘사된다.[20]
1980년대 중순 당시 엄청난 제작비로 만들어 인기를 끌던 MBC의 사극 조선왕조 오백년 - 임진왜란 편에서는 풍신수차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추남이라고 알려졌던 히데츠구와는 어울리지 않게 미남형 탤런트인 박찬환[21] 씨가 배역을 맡았다. 어째 한자 이름이 豊臣秀'''車'''로 나온다. 풍신수길이 빡돌아서 강제로 할복시키는데 풍신수차는 등장하자마자 할복하면서 퇴장... 심히 안습하다.
징비록에서는 유세형이 맡았다. 도요토미 츠루마츠가 죽은 틈을 타 네네가 추천해서 관백 자리에 앉았는데 비중은 거의 없다. 하지만 히로이마루가 태어나고 안그래도 불안했던 입지가 더 줄어들게 되고, 결국 히데요시가 전쟁을 반대하는 다이묘들을 숙청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그를 희생양으로 써 모반을 꾀했다는 누명을 씌워 할복 자살하게 만든다.[22] 이때 히데츠구는 울면서 자신의 딸만큼은 살려달라고 말하는데 히데요시가 말로는 알았다고 했고 그 뒤의 일이 나오지는 않지만 위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히데츠구의 일가족은 물론 관련된 사람들까지 싸그리 다 죽여버렸다(...). 사실 작중에서도 알았다고 말하는 히데요시의 표정부터가 이미 그럴 생각 없다는 걸 피력하고 있다.
[1]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같은 친누나다.[2] 오다 노부나가의 젖형제(유모의 아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혼노지의 변이후 오다 집안의 후계자를 정하는 키요스 회의의 결정권자 5인중 한 명이 되었으며, 히데요시가 추대한 산보시를 선택하여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는데 일조한다. 히데요시가 자신의 후계자까지 고려한 히데츠구와 이케다 츠네오키의 딸을 혼인시킨 것은 그만큼 히데요시가 각별하게 생각한 것 같다. 실제로 히데츠구와 그 측실들은 모두 참수했으면서도 이케다 츠네오키의 딸만은 살려준다.[3] 우키타 나오이에의 아들 우키타 히데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유키 히데야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된 처남의 아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비롯한 여러 양자들이 있었다 전해진다.[4] 오오기마치 덴노는 초기에 생계를 꾸리기도 어려워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돈의 지원과 권위를 되찾는 것을 대가로 관직과 활동명분을 주었고, 이 기조는 당시 왕인 고요제이 덴노 때도 그대로 이어진다.[5] 이 자리는 훗날 고야산의 곤고부지 자리가 되었다.[6] 그중에는 토요토미 정권 핵심 다이묘나 나름대로 지방에서 영향이 있는 다이묘 딸들도 있었다. 이들이 숙청되면서 히데요시에게 불만을 품은 일부는 나중에 도요토미 가문을 배신하고 도쿠가와 편에 붙게 된다.[7] 병사라는 말도 있고 자살이라는 말도 있지만 원인이 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8] 이 외에도 사건에 직접 연루되지 않았지만 히데츠구의 가신이었던 야마우치 카즈토요, 호리오 요시하루, 나카무라 카즈우지, 다나카 요시마사 등의 다이묘들도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에 붙었다. 이들은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신하였을 때부터 따랐던 중신들로 히데요시도 이들을 깊이 신임하여 이에야스를 견제하라고 미카와의 토지를 하사했으며(미카와는 원래 도쿠가와의 구 영지였으나 이때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간토의 구 호조 영지로 전봉되었던 상태였다.), 원래대로라면 이에야스가 에도에서 오사카로 진격할 때 버텨주는 방패막이 되었어야 했으나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바로 이에야스에 붙어버렸으며,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경우엔 아예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바치기까지 하였다.[9] 덧붙여 이 사건은 오오타니 요시츠구도 범인으로 의심 받았다. 그가 앓고 있던 한센병 때문에 인육 등을 노린 살인으로 의심한 것 같다.[10] 이때 '죽은 이에게 공양하기 위해 사슴 사냥을 하니, 살생 관백(셋쇼 간파쿠. 원문에서는 셋소우 간파쿠라 이른다)이라 부른다.'는 낙서가 돌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셋쇼는 일본어로 살생을 뜻하기도 하고 섭정을 뜻하기도 한다. 일종의 말장난.[11] 고대로부터 히에이 산은 조정과 국가를 비호한다는 진호 국가 사상의 중심, 천태종의 총본산으로서 일본인들에게는 종교적인 성소였으며, 이 산을 통째로 불살랐던 오다 노부나가는 이후 '제육천마왕'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2] 측실이라고도 한다.[13] 공가들의 일기와 대조해보면, 사냥을 나갔다고 되어 있는 날에 히데츠구는 주라쿠테이에 있었다.[14] 그 잔혹함 자체를 문제삼기는 하였으나, 이는 일본의 각종 처형법에 대하여 잔혹하다 본 선교사들의 입장임을 기억해야 한다.[15] 실제로 상술한 것처럼 히데츠구 사후 히데츠구의 가신이었던 이들이 이시다 가문에 들어갔는데 이 이시다 가문의 당주인 이시다 미츠나리가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의 실질적 수장이었으며 그에 따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수장으로 하는 동군과 서로 적이었다.[16] 그의 영지 중 하나였던 오미하치만 시에서는 아직도 그를 기리고 있다. 다만 자기 지역 영주였던 무장을 기리는 건 오늘날 일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로 소위 '악인'이나 '모반자' 이미지가 박힌 것으로 알려진 아케치 미츠히데나 마츠나가 히사히데도 그들이 영지였던 지역에서는 아직도 그들을 기리고 있다.[17] 오다 가가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그렇게 쉽게 무너져 버렸던 것은 노부나가 뿐 아니라 장남 노부타다까지 혼노지에서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정통성을 가진 장남이 살아있었다면 아무리 노부나가가 죽었어도 그리 쉽게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노부타다는 상당히 유능한 편이었고 동생들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니 더더욱 그렇다.[18] 명탐정 코난 실사판 기획에서 모리 코고로를 맡은 적이 있다(...)[19] 모가미 요시아키 항목 참조.[20] 특히 작품에 따라서는 더더욱 비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부하들이 위의 독안룡 마사무네에서 볼법한 위의 발언까지 했다고 모함 받는 장면까지 나온다. 당연하지만 이때 히데츠구는 '''"니놈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라고 절규하는 건 덤.[21] 불멸의 이순신에서 권준 역[22] 이때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히데츠구는 히데요시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고 있었는데 히데요시가 "그럼 누가 감히 관백 전하를 모함했다는거냐!"라고 주변에 역정을 내는 '''척'''을 한다. 이때 마에다가 한명 있긴 하다고 말해주고 히데요시는 누구냐고 묻는데 대답이 '''"태합 전하."'''(...) 히데요시는 "...나?"라고 말하며 뚱하게 있다가 이내 진의를 깨닫고는 마에다를 칭찬하며 "그래 히데츠구. 그럼 내가 할복할까?"라고 묻는다. 히데츠구는 당연히 울며 겨자먹기로 혐의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고 히데요시는 네 영지로 돌아가서 잘못을 생각해보고 할복하라 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