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기마치 덴노
1. 개요
일본의 제106대 천황. 고나라 덴노의 장남. 휘는 미치히토方仁로 손자 고요제이 덴노에게 양위할 때까지 전국시대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거친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초창기 인생은 이게 임금의 삶이냐 싶을 정도로 비참함의 극치를 달렸다. (...) 코우지 3년(1557년), 고나라 덴노가 사망하자 천조(践祚, 천황 위를 잇는 것, 즉위식과는 별개)하였다. 그런데 당시 일본 천황과 구게들은 심각하게 궁핍했는데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여러 다이묘들이 금을 헌상할 때까지 3년 동안 즉위식도 올리지 못할 정도였다.
아무튼 모리 모토나리, 미요시 나가요시 등의 도움으로 에이로쿠 3년 1월에 즉위식을 올린 오오기마치 덴노는 포상으로 도움을 준 여러 다이묘들에게 관위를 내렸다. 가장 많은 금을 헌상한 모리 모토나리에게는 무츠노카미의 관위를 내리는 것에 더하여 후계자 모리 타카모토에게 다이젠다이부를 내리는 등 여러 특권을 부여하였다. 한편 혼간지(本願寺)의 법주 혼간지 켄뇨도 막대한 돈을 헌납하여, 천황에게서 문적(門跡)칭호를 하사받았다. 이후 혼간지의 세력은 더욱 강대해졌다.
그의 재위기 초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키나이의 평온이 유지되었기에, 초반에는 그래도 안정적이었다. 키나이를 제패한 미요시 나가요시는 천황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궁궐의 보수와 경호 등에는 미요시의 힘을 투사하였다. 그 덕에 나가요시가 살아있던 시절까지는 조정은 그래도 어느 정도의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2.2. 에이로쿠의 변 이후 노부나가 상락까지
나가요시 사몰로부터 1년 뒤인 에이로쿠 8년(1565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미요시 요시츠구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에이로쿠의 변) 이후 미요시 산닌슈와 마츠나가 히사히데 사이에 내전이 발발하여 도다이지가 불타는 등 키나이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잇따른 정국의 불안정으로 천황의 생활은 궁핍해지고, 황실의 권위는 더욱 추락하였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오다 노부나가는 "정당한 무로마치 막부 쇼군"인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자리로 돌려보내고, 조정과 오오기마치 덴노를 보호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상락(上落, 군대를 이끌고 수도에 들어가는 것)하여 교토를 손에 넣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궁핍한 조정의 재정을 여러가지 정책과 원조로 회복시키는 한편,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적대세력에게 칙령을 보내 강화를 실현시켰다.
2.3. 오다 정권 시기
겐키 원년(1570년)의 아사쿠라 요시카게와 아자이 나가마사와의 싸움, 덴쇼 원년(1573년)의 아시카가 요시아키와의 싸움, 덴쇼 8년(1580년)의 이시야마 혼간지와의 싸움 등에서 맺어진 강화는 모두 오오기마치 덴노의 칙령에 따른 것이다. 또한 덴쇼 5년(1577년)에 오다 노부나가는 우다이진(右大臣)에 서임되었다. 하지만 1년 뒤 사임하고 다시는 조정의 관직을 맡지 않았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외에도 우코노에다이쇼(右近衛大将)의 직위를 1575년부터 1578년까지 맡았다. 이 지위는 최초의 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맡았던 지위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노부나가의 키나이 통일과 오다 - 아시카가의 무로마치 막부 체제의 붕괴 기간과 완벽히 일치하기 때문에[1] 노부나가의 우코노에다이쇼 취임을 오다씨의 가격을 끌어올리고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를 부정하며, 자신의 위치를 아시카가와 상대화하고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세간에 제시할 의도를 가지고 취임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1582년 5월 부케덴소(武家伝奏) 카쥬지 하루토요가 노부나가의 가신 무라이 사다카츠와 만나 "노부나가가 관백, 정이대장군, 태정대신 중에 하나에 취임했으면 한다"는 의향을 전했다고 한다. 이에 오다 노부나가는 무라이 사다카츠에게 무언가를 전하기는 했지만 무엇인지는 나오지 않으며, 이후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를 삼직추임문제(三職推任問題)라 한다. 이 때 오다 노부나가가 무엇을 대답했는지 기록되지 않은 탓에 모두 거절했다는 추측이 있다.
2.4.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기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쓰러졌다.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아케치 미츠히데는 직후 야마자키 전투에서 토벌되었다. 미츠히데를 토벌한 공으로 오다 가 내에서 세력을 급속히 확대한 하시바 히데요시는 결국 경쟁자인 시바타 카츠이에를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격파하였고, 노부나가의 잔여 세력을 통합, 집권하였다. 그는 천황의 비호자를 자칭하면서 황실의 위신과 권위를 세우며 많은 황금을 바치는 등의 행동을 보였다.
덴쇼 13년(1585년)에 칸파쿠 상론이 격화되자, 그 해결에 나선 하시바 히데요시는 후지와라 씨족의 수장인 고셋케의 고노에 사키히사의 양자로 들어가 칸파쿠에 임명되었다.[2] 칸파쿠는 후지와라氏만 할 수 있는 자리였지만, 태정대신과 달리 칸파쿠은 명예직이라 위상이 애매했다. 이듬해 당시까지 성씨가 하시바였던 히데요시는 오오기마치 덴노로부터 도요토미(豊臣)의 성姓을 하사받아 도요토미氏 정권을 세우게 된다.
일본에서는 근대화 이전까지 성姓과 氏가 구분되어 있었는데,[3] 우리나라의 성姓에 해당하는 게 우지/씨氏였고 氏에 해당하는 게 묘지/묘자苗字였다. 천황으로부터 하사받는 성을 본성本姓이라 했는데, 대표적인 게 4대본성이라 불리는 겐지/원氏, 헤이시/평氏, 후지와라/등원氏, 타치바나/귤氏이다.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왕실의 분가 세이와 겐지라는 무가 출신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를 부정한다는 의미로 헤이시/평氏를 대외적인 성姓으로 사용했으며,[4] 초기 히데요시 또한 헤이시를 사용했다 후지와라氏의 양자가 되면서 후지와라氏를 사용했고, 왕으로부터 도요토미氏라는 본성을 하사받은 것이다. 12월 25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태정대신에 서임되었다.
2.5. 말년
덴쇼 14년(1586년), 오오기마치 덴노는 황태자가 죽자 황태자의 아들 가즈히토 친왕(고요제이 덴노)에게 양위하고 센토고쇼로 은퇴하고, 분로쿠 2년(1593년) 1월 5일에 사망하였다.
3. 쇼쿠호 정권과의 관계
오오기마치 덴노의 재위기는 무로마치 막부가 형해화되는 것을 넘어 완전히 붕괴하고 쇼쿠호 정권(오다, 도요토미 정권)이 새로이 설립되는 격변기였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두 인물이 천하인으로서 일어나 전국시대를 끝내가던 이 시기, 천황과 조정은 이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1] 전국시대 때 무로마치 막부는 껍데기뿐이기는 했지만, 그 권위를 실질적으로 부정하는 다이묘는 얼마 없었다. 막부를 완전 무시했던 초기의 미요시 나가요시나 미요시 요시츠구 정도.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에도 본래는 막부 권위를 존중하였으나, 요시아키 쇼군과 점차 사이가 나빠져 결국 쇼군을 쿄에서 추방하고 막부를 정지시키게 된다.[2] 고노에 家는 고셋케의 으뜸으로 후지와라 씨족 전체를 대표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 중 하나인 고노에 후미마로가 이 집안 출신이다.[3] 원래 춘추전국시대(나아가서는 진나라 치세까지)의 중국도 성과 씨가 구별되어 있었는데 성은 바뀌지 않았지만 씨는 상황 따라 얼마든지 바뀌었다. 시황제만 하더라도 영성 조씨로 구별한다. 하지만 한나라 이후부터 성씨는 같은 개념으로 통합되었다.[4] 헤이시 또한 겐지처럼 왕실의 분가에서 기원한 무가 집안으로 헤이케모노가타리 시절 미나모토와 대립했던 집안이다. 그 때문에 미나모토를 무너뜨리는 것은 타이라라는 풍문이 있었는데 그를 이용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