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다

 

'''작위'''
'''왕태자(王太子) 겸 고추대가(古鄒大加)'''[1]
'''성씨'''
고(高)
''''''
공(共)(?)[2] / 조다(助多)
'''부왕'''
장수왕
'''아들'''
문자명왕
'''생몰연도'''
미상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고구려태자. 장수왕의 아들이자 문자명왕의 아버지다.
능력이 있었지만, 하필이면 '''아버지가 고대인들 중에서는 역대급이라고 할 정도로 너무 오래사는 바람에 자신도 노인이 되어''' 왕위조차 못 잇고 세상을 떠나서 안습함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

2. 생애


'''고추대가(古鄒大加)'''[3] 벼슬을 지냈는데, 하필이면 아버지인 장수왕이 90세가 넘도록 장수하는 바람에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왕위를 못 이었다.
다만, 장수왕의 연세가 연세인지라 고추대가로서 장수왕 재위 후반기에는 실질적인 국정업무를 대행했을 수도 있다.
끝내 장수왕이 98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이미 세상을 떠난 조다를 대신하여 조다의 아들인 나운이 왕위를 이었는데, 그가 바로 문자명왕이다.[4]
조다의 행적이라고 볼 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중원 고구려비이다. 내용을 보면 신라와 외교를 맡은 고구려 태자 공(共)이 보이는데, 중원 고구려비를 세운 장소인 국원성을 방문한 적이 있는 듯하며, 태자 공은 법흥왕과 함께 꿇어앉았다거나 그에게 적추를 내렸다고 한다.[5] 그런데 이 태자 공이 고추가 조다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태자 공(共)이 고추가 공(古鄒加 共)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조다와 동일인물이라는 가능성이 있다. 다만 중원고구려비의 성립연대를 문자명왕 대로 보는 견해도 있어서 확정짓기는 어렵다.

3. 여담


'한심하다'는 뜻을 가진 비속어인 '''쪼다'''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 스펀지 101회 방송분에서 소개한 적이 있고 이를 정설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으나, 왕족의 이름은 백성들이 마음대로 내뱉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라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물론 피휘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삼국시대 당시에는 중국 풍습이었던 피휘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아 고구려 사람들이 '조다'라는 이름을 이야기할 수조차 없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왕족의 이름을 한심하다는 의미의 속어로 쓴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고, 설령 당시 고구려에서 그런 의미의 속어가 돌았다 해도 공공연하게 쓰일 순 없었을텐데 어떻게 1500년의 세월을 지나 살아남았을지는... 무엇보다 현대음이 "조다"이지만, 당장 17-19세기때만 해도 발음이 전혀 달라지는데 15세기 이전의 발음과 같다고 할 수 없다
당시 인터뷰를 했던 국어학자 서정범 교수[6]에 의하면 장수왕 이야기는 근거가 없는 이야기에 불과하고, 1960년대 불량배들이 누구를 골려줄 때 '쫘 버려라'라는 은어에서 유래되었거나 '쫀다'라는 동사가 명사화된 걸 정설로 보고 있다고 한다.
바다 건너에 있는 어느 섬나라에도 비슷하게 여왕이 너무 장수해서 칠순이 넘도록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있는 안습한 왕세자가 있다. 이쪽은 아직 현재진행형.
사실 이 분야의 압권은 따로 있다. 바로 프랑스 왕 루이 14세. 장수왕과 마찬가지로 70년 넘게 재위하다가 왕세자뿐만 아니라 왕세손까지 모두 왕보다 먼저 죽어서 '''증손자'''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루이 15세다. 다만 루이 14세는 4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장수왕보다는 훨씬 이른 나이인 76세에 사망했다.[7] 루이 14세의 왕세자왕세손은 고조다처럼 늙어 죽은게 아니라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것.
[1] 중원고구려비 기록.[2] 중원고구려비 기록. 다만 해당 비문은 장수왕 말년인 480~481년경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기에 그때까지 그가 살아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3] 왕족 가운데서도 최상위의 호칭으로 고구려가 졸본성-국내성의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성장하면서 합병한 세력들의 호칭들을 왕 아래에 일원화시키면서 등장했고 태자가 겸직했다. '태자'라는 공식 직위와는 또 별도로 붙는 타이틀로서 영국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비슷하게 볼 수 있다.[4] 그래서인지 삼국사기 장수왕 본기에서는 안 나오고 문자왕본기에 나온다.[5] 고구려 측의 군주도 아닌 신하가 신라의 군주와 동렬로 만났거나, 더 나아가서 무언가를 하사했다는 것으로 보아, 양국의 각각 광개토대왕 / 내물 마립간 시절 때(4세기 말) 원군을 보내주었던 이래로 굳어진 고구려-신라 간의 서열관계가 법흥왕 때까지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서정범 교수 무고 사건의 그 사람 맞다.[7] 물론 어디까지나 장수왕과 비교해서 이른 나이지 그 당시에 76세까지 살았으면 충분히 장수한거 맞다. 다만 그보다도 1000년이나 이전에 100세 가까이 산 장수왕이 괴물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