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전투
1. 소개
후삼국시대의 전투.
서기 930년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고창(古昌)에서 맞붙은 전투. 사실상 후삼국 시대의 승패를 결정 지은 전투이다.
공산 전투에서 견훤이 대승을 거두고 후백제는 사상 최대의 판도[1] 를 자랑하며 고려에 대한 맹공을 가한다. 드디어 견훤은 상주에서 고려의 경상도 마지막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고창을 점령하기 위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진군한다.
당시 후백제군이 워낙 기세등등했기에 왕건은 고창을 포기할 것도 진지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유금필의 진언에 따라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창으로 진군한다.[2]
당시 고창에는 고작 고려군 3,000명이 주둔 중이었고, 이를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 그리고 속국화된 신라의 호족 지원군이 포위한다. 전사자를 보면 만 단위로 몰려왔던 듯 하다. 그리고 이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왕건의 고려군과 대치한다.
왕건은 질 것을 걱정하여 죽령으로 달아나면 위험하다고 건의한 대상(大相) 공훤(公萱)과 홍유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잇길을 닦으려고 했으나. 도망칠 길을 미리 닦기보다는 본격적으로 공격해야 한다는 유금필의 주장에 따라 고려군은 북쪽 지대인 병산에 진을 쳤고, 후백제군은 남쪽 지대인 석산에 진을 쳤는데 두 진 사이의 거리는 500보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치열한 전투가 3일 ~ 4일 동안 계속되었다. 초기에는 후백제가 우세했으나, 견훤에게 반감을 가진 고창 일대 신라 호족들이 고려의 편을 들고[3] , 그틈을 타서 희대의 먼치킨 유금필이 저수봉으로부터 정예 기병을 이끌고 총공격을 가해 견훤은 대패했다. 후백제군의 전사자만도 8,000명에 달했고 견훤은 겨우 목숨만 건져서 후퇴한다. 견훤에게 반기를 든 고창의 호족 중 김행, 김선평, 장정필 3명은 훗날 3태사라 해서 고려의 공신에 봉해진다. 지금도 안동 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한 사당과 제사가 지내지고 있다. '''그야말로 공산 전투의 복수요, 왕건으로선 죽음 근처까지 갔던 패배 이후 판세를 뒤집는 승리.'''
이 중 김행에 대해 왕건은 '능병기달권(能炳幾達權)'[4] 이라 하여 권씨 성을 하사하여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김선평, 장정필도 각각 안동 김씨,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2. 결과와 후폭풍
이 전투로 인해 결국 후삼국의 주도권은 고려가 장악하게 되었고 후백제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거의 다 먹었던 상주를 완전히 고려에게 빼앗기고, 소백산 일대를 고려에 넘겨야 했으며, 신라와 양주에 대한 영향력도 모조리 상실한다. 웅주와 강주 역시 고려군의 맹공에 밀려서 위태위태해지고 재탈환했던 나주도 유금필의 기습 공격을 당한다.[5] 나름 회심의 작전이었던 수군을 이용한 송악 공격이 절반의 성공을 거두지만 역시 유금필에 의해 좌절된다.
백제 입장에서는 "유금필은 견훤의 원수, 유금필을 죽입시다!"인 상황, 고려 입장에서는 "유금필은 고려의 구원 투수, 이게 다 유금필 덕택이야!"인 상황... 그런데 유금필이 훗날 투항하는 견훤을 구해낸다는 점이 아이러니.
이 전투에서 주도권을 잃은 후백제는 고려의 공세에 조금씩[6] 밀리게 되고 934년 운주성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면서 이전의 기세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의 길을 걷고 만다.
한편 이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모든 경상도 일대의 대부분의 영토들을 전부 고려의 영토로 편입시켜 한반도 중북부에 한정되어 있었던 기존 영토를 동남부까지 확장하여 경주에서 차타고 30~40분 거리인 포항까지 고려의 영토가 된다. 후백제의 영향력이 사라진 신라는 육지 영토 3면이 경상도를 차지한 고려에 갇혀 수도 서라벌과 인근 동해안 영토만 지배하는, 말 그대로 초기 신라 수준의 조그마한 소국이 되었고, 고창 전투, 운주성 전투 이후 935년 경순왕이 항복할 때까지 고려의 종속국으로 전락한다.
3. 안동이란 지명 유래
전장을 전북 고창군(高敞郡)으로 착각하는데, 그 곳은 후백제의 중심지인 완산주 소속으로 후백제 영역이다. 보다시피 한자도 서로 다르다. 공산 전투, 고창 전투, 일리천 전투 모두 후백제와 고려의 세력이 중첩되는 신라 내지, 현재의 경북 지방에서 맞붙은 전투이다. 안동의 옛 지명이 고창이며, 이 전투 이후 동쪽(東, 신라)을 평안(安)케 했다는 의미로 안동(安東)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4. 대중 매체에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다루어졌다. 167화(본격적으로는 168회)에서부터 170회~171회까지 이어졌으며, 여기서는 신라 호족들의 도움이 승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창작을 더해, 집안 싸움이 백제가 패배한 결정적 원인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태자 신검이 원래 정해진 때에 협공을 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유금필의 군대에 길이 막혀서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여기서 신검은 '''"길이 막혔다는 핑계로 여기서 내가 협공을 안 하면 아버지도 금강이도 전투에서 다 죽어버리겠지"'''라는 삐딱한 생각으로 정말로 협공을 포기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유금필은 갈라산에 주둔 중이던 자신 휘하 부대를 반으로 나누어 박술희에게 갈라산 지역을 지키게 하고 왕건의 본대를 지원하러 간다. 지원군이 절실한 상황에서 신검의 군대가 움직이지 않는 바람에 백제군 본대는 완전히 포위되어 일방적으로 패배하며, 견훤은 [7] 금강, 박영규, 최승우 등과 함께 초라한 몰골로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간다. 이전 공산 전투, 삼년산성 전투에서 왕건이 초라한 몰골로 도망치던 모습을 훌륭히 재현한 것이다.[8]
왕건의 입장에서는 공산과 삼년군에서 당한 패배를 똑같이 갚아준 격. 이는 화공으로 박살나는 백제군을 지켜보며 "옛날에 저들도 나와 같았을 것이야. 저 공산에서 나처럼 이렇게 보고 있었을 것이야." 라고 하는 왕건의 멘트로 드러난다. 왕건에게는 공산 전투의 완벽한 리벤지 배틀이었던 셈. 덤으로 공산 전투에서 왕건이 포위되었을 당시 견훤이 왕건에게 항복하라며 도발을 하고 약을 올렸는데, 고창 전투에서는 홍유와 배현경이 견훤이 화공으로 갇혀서 오도가도 못할 때 승리의 웃음까지 더해서 철저하게 견훤을 조롱하며 자신들의 군주가 당했던 굴욕을 그대로 갚아준다.
고창 전투에서 한참 백제군이 박살나고 있는 때 3태사[9] 가 이제 백제군은 완전히 포위되어 무너지고 있으니 백제 왕을 잡으면 된다고 하자 왕건은 "나도 공산에서 살아나왔소이다. 수만 명이 어우러져 싸우는 전장이올시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백제 왕을 놓치는 수가 있소이다."라고 자신의 경험을 말해주며 끝까지 방심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백제 왕은 목을 내어놓아라! 이미 돌아갈 길도 다 끊겼느니라! 어서 목을 내어놓아라!"'''(홍유)
'''"백제 왕은 어디 있느냐?! 어디 얼굴 좀 보자꾸나!"'''(배현경)
어이없게도 신검의 군대를 막고 있던 유금필은 이미 오래 전에 그곳을 빠져나와 고려군 본대에 합류한 상황인데 신검은 여전히 유금필이 막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움직이지 않았다. 유금필은 오히려 백제군 본대를 처참히 무너뜨리고 있었으며 처음에는 견훤도 신검의 군대와 대치 중이라는 유금필이 왜 여기 와 있냐며 당황해한다. 이 전투에서 유금필의 존재감이 상당한데, 백제군 병사들이 '''"유금필이다! 유금필이다!"'''를 외치며 줄행랑치기도 하고 금강 태자도 견훤에게 "어서 피하시오소서. 저 자가 유금필이옵니다." 라든지, "폐하, 피하시오소서. 유금필이옵니다. 저 자와 마주친다면 여기서 살아 나가기 어렵사옵니다."라고 말하는 등, 황제에서부터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백제군 전체가 유금필 한 명 때문에 벌벌 떠는 모습이 나온다.[10] 도망친 견훤 일행을 끝까지 추적한 것도 유금필이었다. 유금필을 본 견훤의 코멘트는 '''"나는구만. 아주 그냥 훨훨 날아다녀."'''(...) 그래도 총사인 금강은 매부 박영규에게 유금필 부대를 막으라고 지시한다. 박영규는 운주 전투에서도 견훤을 추격하는 전의 성주 이치와 겨루며 추격을 지연시키고 견훤을 지켜낸다. 그리고 휘하 무사들을 집사장에게 인솔을 맡겨 장인의 탈출까지 돕는다고 묘사한다.
유금필 부대에게 쫓기다가 화공을 당해 견훤과 최승우가 말에서 떨어지고, 박영규와 금강은 말에서 내려 견훤을 호위해 탈출한다. 전투 전 고창성을 함락시키고 다음날 아침 낙동강 어죽을 먹자던 견훤은 어죽 먹는건 고사하고 불맛만 엄청나게 보고 연기만 실컷 마시고 말았다.
드라마의 묘사에 따르면 이 신검의 군대가 합류하였다면 전세가 역전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하며 최응 역시 "만약 신검 태자의 군대가 움직여서 우리의 뒤를 쳤다면 전투 결과는 굉장히 달라질 수도 있었다"고 언급한다. 또한 왕건 역시 신검이 군대가 움직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군대는 포위당한 백제군을 지원하고 고려군의 뒤를 칠 수 있는, 한 마디로 전술적으로 굉장히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규모도 1만이나 되는 대군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보면 움직이는게 당연하며, 만약 진짜로 유금필 때문에 길이 막혔다고 해도 다른 길로 돌아서 가려는 시도라도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초라한 몰골로 도망쳐 잠시 숨을 돌린 견훤은 함께 탈출한 최승우, 박영규, 금강과 자신의 모습을 깨닫자 껄껄 웃으며 지난 날 공산에서 왕건도 이러했을 거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침울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서는 도와주러 오지 않은 신검에 대해 고심하며 '''"그 놈은 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지 않은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마침 그 주변을 지나가던 신검군 전령이 견훤에게 딱 걸리고 말았고, 그 전령으로부터 더욱 속터질 소식을 듣게 된다. 신검이 자신을 도우러 오기는 커녕 문소성으로 후퇴를 해버렸는데, 돌아가보니 문소성마저 고려에 뺏긴 상태였다는 것이다. 평소 불같은 성격으로 태자들을 갈구면서 구타하기도 서슴지 않고 수틀리면 참수하라고 명령까지 내리던 견훤도 모든 사실을 알고는 너무 기가 막혔는지, 이번에는 태자들에게 어느 정도 갈굼을 시전하는듯 하다가 "너무 기가 막혀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도 안 난다. 우선 회군부터 하자."며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 신검의 위험한 반항(...)은 창작이지만, 드라마 상에서는 이게 견훤이 신검과 멀어지고 막내인 금강을 후계자로 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사건으로 나온다. 전투 이후 최승우와의 대화에서 '''"신검이에게 실망을 했네. 아니, 실망이 아니라 절망을 했어!"''' 라면서 신검을 아예 후계자에서 리타이어 시켜버리려 했지만, 최승우를 비롯한 대소 신료들의 간청으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로 한다. 문제는 마지막 기회였던 송악 전투에서도 신검은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겪으면서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고, 이후 운주 전투에서의 대 병크로 결국 후계자 교체 시도와 쿠테타라는 후백제의 국가 막장 테크로 이어진다. 극중에서는 운주 전투 이후에 완전히 금강에게 후계를 주는 것을 결심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고창 전투가 끝나고 운주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백제의 장군이던 공직이 백제에 환멸을 느껴 고려로 귀순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것 역시 백제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공직이라는 인물이 처음에는 비중 있게 나오다가 공직 역을 맡은 배우 이정웅이 건강 문제로 드라마에서 하차해 버리는 바람에 이 사건도 전혀 묘사되지 않고[11] 대신 실제로도 귀순한 기록이 있는 '일길찬' 벼슬을 맡고 있는 것으로 설정된 염흔이라는 다른 인물이 고려에 귀순하는 것으로 나온다. 대신 제작진도 염흔의 귀순이 갑툭튀성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166화부터 조금씩 비중을 할애해줬다.
5. 현재
안동에는 이 고창 전투와 관련된 설화에서 유래한 지명과 풍습이 남아있다.
- 합전길 : 안동시 송현동 소재.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맞붙어 싸웠다고 해서 합전(合戰)이라는 지명이 남게되었다.
- 말구리길 : 안동시 태화동 소재. 후퇴하던 견훤이 말에서 떨어졌다고 하여 말구리라는 지명이 남게되었다.
- 차전놀이 : 안동 지역의 민속 놀이이자 무형문화재 24호인 차전 놀이가 고창 전투에서 유래되었다.
[1] 신라는 사실상 속국화, 통일 신라 9주 중 완주, 무주, 웅주, 강주, 양주, 상주의 6주 점거, 나주 재탈환 등으로 한주, 삭주, 명주의 3주를 점거한 왕건에 비해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였다. 더구나 한주, 삭주는 변방이라 땅만 넓지 남방의 주들에 비해 경제력이 더 낮았던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명주도 독자세력을 구축한 성주 김순식이 공산 전투 직후에야 귀부하면서 간신히 얻은, 느슨한 동맹에 가까운 지역이었다.[2] 요약하자면 고창 포기 → 상주 완전 상실 → 후백제에게 북진 진격로 제공 → 호족들 대이탈 → 국가 멸망 테크.[3] 견훤이 서라벌을 점령하고 경애왕을 죽인 사건에 대해 신라인들은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4] '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하였다'라는 의미.[5] 성패는 기록이 없어 알 수없다.[6] 기록을 보면 고창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가던 도중에 고려 성 하나를 함락하고 갔다는 기록이 있다.[7] 이후 신검을 만난 견훤은 나도 금강이도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왔으니 ''''얼마나 낙심이 크겠느냐?!'''' 라며 갈군다.[8] 심지어 고창 전투의 경우, 그 지형이 공산 전투보다 더 험하다고 한다.[9] 고창성주 김선평, 김행(권행), 장정필[10] 아마 그 전에 벌어진 삼년산성 전투에서 유금필이 보여준 대활약에 떤 나머지... 물론 이후로도 이 상황은 계속된다.[11] 처음 공직이 등장할때 나레이션으로 공직의 투항을 언급하니 배우 건강 문제만 아니었다면 분명히 들어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