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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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235호'''
'''보은 삼년산성'''
報恩 三年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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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성주1길 104 (어암리)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232\,655㎡
'''지정연도'''
1973년 5월 25일
'''제작시기'''
삼국시대
'''위치'''


1. 개요
2. 역사
3. 구조
4. 고분군
5. 관련 유적
6. 바깥고리
7. 사적 제2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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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은 삼년산성은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에 있는 화강암으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 마립간 13년(470)에 축조되었고, 소지 마립간 8년(486)에 고쳐 세웠다. 삼국사기는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설명하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었다.
삼년산성은 1973년 5월 25일 사적 제235호로 지정되었다.

2. 역사


신라가 삼국통일의 전초기지로 쓰려고 심혈을 기울여 축조한 요새였다. 3년간 노동하여 자비 마립간 13년(470)에 완공했는데, 성을 쌓는 데 화강암 약 1천만 개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5세기 한반도는 백제와 신라가 연합해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던 시대였고, 그래서 견고한 성이 필요했으므로 삼년산성을 축조한 것.
삼국사기는 3년에 걸쳐 만들어 자비 마립간 13년(470)에 완공되었다고 할 뿐, 투입한 노동력의 규모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의 소지 마립간 8년(486)조에 일선(一善: 현 경북 구미) 지방의 장정 3천 명을 동원해서 삼년성과 굴산성을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진흥왕은 재위 15년(554) 이곳에서 조련한 군대를 몰고 관산성 전투(현 옥천)에서 백제 성왕을 죽였다. 백제를 멸망시킨 김유신의 5만 군대도 삼년산성에서 훈련을 받았다. 무열왕은 신라와 당나라 간 동맹을 위한 국제회의를 이곳에서 열었는데, 당나라에게 무력시위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후백제가 충북 일대로 확장하면서 후백제의 판도에 들어갔는데, 심지어 고려 태조 왕건도 후백제가 차지한 삼년산성을 재위 원년(918)에 빼앗으려다 크게 패한 바 있다. 그야말로 불굴의 천년요새였다.[1] [2]
난공불락요새답게 기록상 149승 1패라는 무시무시한 성과를 남겼다. 백제는 물론, 수나라, 당나라도 꺾은 고구려조차 이 성 앞에선 답이 안 나왔다. 유일한 1패는 통일신라 헌덕왕 14년(822) 김헌창반란을 일으켰다가 삼년산성에서 관군에 패해서 함락당한 것.

위공과 제릉이 장웅의 군대에 합세해 삼년산성(三年山城)을 공격해 승리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4년

전해지는 기록은 '''이게 끝'''이라서 성이 함락된 유일한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함락되었는지커녕 전투과정조차 알 도리가 없다. 한국의 수많은 성들 중에서도 탑급으로 난공불락이라 내부 배신일 확률이 크지만, 어디까지나 추측 중 하나일 뿐, 김헌창이 이 성에서 지휘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김헌창은 자신의 반란군과 더불어 계속 패전을 거듭하다가 본거지였던 웅진이 신라 관군에게 포위당하자 자결하였다.

3.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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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둘레는 약 1.8 k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10 m 이상으로 대단히 높다. 조선시대의 산성이 산 정상을 두르는 형태로 대체로 낮은 편인 것과 비교했을 때 그야말로 요새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았다. 이처럼 성벽이 높고 크기 때문에 하중도 막대하므로, 성벽 모퉁이의 하중이 큰 부분에는 기초를 견고하게 하고자 4중 계단식으로 쌓았다.
성벽의 동쪽과 서쪽은 안쪽은 다진 흙으로, 바깥쪽은 돌로 쌓는 내탁외축(內托外築) 방법을, 남쪽과 북쪽은 모두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는 내외협축(內外夾築) 방법을 이용했다.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신라가 이 성을 정말로 철옹성으로 만들겠다고 작정한 티가 난다. 정문으로 사용한 서문의 경우 성벽이 안쪽으로 휘었고 계곡부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약간 어긋난 지점의 경사면에 있어, 성 밖에서 문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음은 물론 남북으로 치성 2개가 배치되어 공격하는 적을 쉽게 반격할 수 있다. 북문은 문 밖에 이중으로 성벽을 쌓아 벽을 돌아 올라서야 문으로 다가갈 수 있게 설계했고, 동문은 들어오는 길을 'ㄹ'자로 만들어 들어오기 힘들게 만들었다. 남문은 치성을 설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만 접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러한 형태인 성문을 현문식(縣門式)(또는 현문식 구조)이라고 하는데, 신라의 성문의 전형적인 구조이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옥필(玉筆)·유사암(有似巖)·아미지 등 글씨가 오목새김되었는데, 김생(金生)의 필체라고 전한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이라고 평가받는다.

4. 고분군



주변에는 무덤 수천 기가 있는데, 행정명을 기준으로 '대야리 고분군'이라고 하지만 최근에는 '삼년산성 고분군'이라고도 한다. 유명한 고총 고분군이 아니다보니 상대적으로 관심이 떨어져 도굴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서 지자체 대부분이 그렇듯 지역 내 역사문화 관련 유적의 정비 일환으로 삼년산성 고분군에 현황조사 및 발굴조사를 했다. # 5세기 후반-6세기 초반에 삼년산성 고분군이 형성되었다고 추정한다.
신라에게 산성+고분군 조합은 거점적 역할을 했던 곳으로 추정한다. 삼년산성과 삼년산성 고분군은 5세기 신라의 전통적인 활동반경인 영남지역[3]에서 벗어나서 생겨나는 대표적인 사례로써 신라가 가야권에 대한 지배력을 관철시킬 무렵부터 북방으로 진출을 꾀했다는 물적 증거로 볼 수 있을 듯하다.

5. 관련 유적


충북, 대전 일대는 소위 '''중원지역'''이라고 지칭되며 삼국시대 5~6세기의 각축장이었던 만큼 관방시설이 굉장히 많다. 중원지역의 삼국시대 산성들이 실제로 유네스코에 등재될 가능성은 낮지만 '''중부내륙 산성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등재'''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6. 바깥고리



7. 사적 제235호


삼년산성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으며, 소지왕 8년(486)에 고쳐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800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 천기의 무덤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삼년산성 → 보은 삼년산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후삼국시대 이후의 이 지역은 군사적 요충지(최전방)로서의 가치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전투가 일어날 일이 거의 없어서 성이 자연스럽게 버려졌다. 그래서 고려시대부턴 삼년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진 적이 드물다.[2] 유금필 무쌍은 성 밖에서 벌어진 것이고 결국 삼년산성을 점령하진 못했으므로 삼년산성 vs 고려를 기준으로 하면 삼년산성의 승리로 봐야 한다. [3] 물론 영남지역 말고도 영동지방에도 일찍이 신라의 영향권 아래에 편입시키긴 했다. 강릉이나 삼척 등지가 대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