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
1. 개요
고려의 문신. 황주 토산현(현 황해북도 토산군) 출신이다.#
드라마 태조 왕건의 히트로 왕건의 신동 책사로도 알려지기도 했지만 고려사에서는 군사 참모로써의 활약은 찾아볼 수 없고 행정 업무를 주로 수행했던 관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2] 역임한 직책들이 오늘날에 비유하면 대통령비서실장이나 행정안전부 장관 정도 되는 중책이었고 사후 왕건의 배향공신이 된만큼 왕건 정권의 싱크탱크 역할을 한 중요한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2. 생애
기록에 의하면 황주의 대상(大相, 태봉의 품계로 당시 9등급 중 3위에 해당) 최우달(崔祐達)의 아내가 임신을 했는데 집의 오이 가지에 참외가 열리는 일이 일어났다. 최우달의 이웃에서 이 일을 궁예에게 고하자 궁예는 점을 쳤는데 "이 집에서 아들을 얻으면 나라에 불리하니 기르지 말라"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궁예의 말대로 아들이 태어나자 최우달은 아이를 숨겨서 길렀는데 어릴 때부터 오경에 능하고 문장에 통달하여 불과 10대의 나이에 궁예가 발탁하여 관직에 나가게 된다. 최응의 뛰어난 학식에 감탄한 궁예는 "이야말로 성인을 얻는다 함이 아닌가"라고 최응을 총애했다고 한다. 915년 왕건이 궁예에게 모반을 의심받아 관심법으로 시험하려 하자 붓을 일부러 떨어뜨린 뒤에 그것을 줍는 척을 하면서 '일부러 모반하였다고 말하면 살 것'이라고 은밀히 충고했다. 왕건이 최응의 충고대로 따르니 궁예는 왕건이 정직하다면서 왕건을 용서하고 되려 큰 상을 내렸다.
왕건이 궁예를 타도하고 고려를 세우면서 최응은 왕건의 총애를 받아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는 원봉성의 지원봉성사, 국무를 담당하는 최고 의결 기관인 광평성의 광평낭중, 오늘날의 행정안전부에 해당하는 내봉성의 내봉경을 거쳐 광평성의 광평시랑 등을 역임했는데 이로 볼 때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문장에도 탁월한 면모가 있었는지 왕건이 삼한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개경의 7층탑과 서경 중흥사의 9층탑에 쓰일 발원문을 쓰라고 명하자 지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성인이라는 이름답게 매일 목욕재계를 하고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병이 들었을 때도 고기를 먹지 않아 왕건이 동궁 왕무를 보내 고기를 먹기를 권했으나 거절하자 몸소 직접 행차해 병문안을 하며 "고기를 먹지 않으면 불충이요, 불효로다"라고 하자 고기를 입에 댔다고 한다.
932년 삼한 통일을 몇 년 앞두고 35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시호는 희개(熙愷). 왕건이 원보에서 대광 품계를 주고 태자태부에서 사도, 태부에 추증했고 나중에 태조의 배향공신으로 위패가 모셔졌다. 고려사 태묘 예지에 기록된 배향공신 중 개국공신에도 지명된 신하는 시호에 개국(開國) 미칭이 붙어있다.[3] 고려 건국에 도움을 줬으면 미칭이 붙는데 최응은 미칭이 없다. 태조의 여섯 공신 중 유일하게 없는데 이유는 알 수가 없으며 태봉의 중신이었고 고려에서도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는데 결국 소외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사후에 최응의 집안이 몰락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사료가 없어 알 수는 없다. 후삼국 통일 이전에 사망하여 통일 후 공을 따질 때 없었던게 결정적인 듯하다.[4] 삼사 직에서도 차별이 있었는데 개국 미칭이 붙은 공신은 모두 태사(太師) 직을 추증받았다. 그러나 최응만 1단계 아래인 태부(太傅)이다.
3. 역임 관작
4. 대중매체에서
4.1. 태조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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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아역부터 사극 만렙 배우인 정태우[6] 가 열연했다. 그가 태어날 때 오이 가지에 참외가 열렸다는 일화도 소개될 정도로 비중있는 인물임을 암시하였으며[7] 극 중반까지는 대체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비슷하게 가다가 극 중반을 넘어서는 제146화에서 조물성을 휩쓴 전염병에 걸려 태평이 임종을 맞이하면서 왕건에게 "신이 죽은 뒤에는 내봉성령 최응을 크게 쓰시옵소서."라며 유언을 남겼고 최응에게도 "폐하의 대업을 이루는 것은 그대의 손에 달려있다"며 왕건의 보필을 부탁하며 사망함에 따라 군부를 책임지던 태평의 후임자가 되어 병부의 수장인 병부령 직을 제수받아 왕건의 책사로서 후백제의 최승우와 대결을 펼치는 걸로 나온다. 극 중에서는 병부령이 되기 이전 외교를 전담하던 내봉성령 직위에 있을 때부터 병부령이 되고 군권을 맡은 뒤 사망할 때까지 군사적인 업무 외에도 조정 내의 여러가지 일들을 왕건이 고민할 때 왕건의 최측근으로서 차분하거나 때로는 직언하여 왕건에게 조언을 하기도 한다.
궁예의 관심법으로부터 왕건을 구해낸 유명한 일화도 드라마에 그대로 묘사되었는데 종간, 은부, 아지태 등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일만 터지면 계속 가만히 있는 왕건을 걸고 넘어져 궁예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최응이 왕건을 관심법으로 한 번 보라고 조언하는 장면까지 추가로 넣었다. 관심법이란 곧 사망 플래그이기 때문에 얼핏 보면 곧 왕건을 죽이라는 말이나 다름없는 조언이기는 했으나 이 판을 주도한 최응이 현장에서 왕건에게 살아날 길을 코치해 준 덕분에 왕건은 살아났다. 국문이 끝난 뒤 궁예도 "최응이 네 말마따나, 관심법으로 보니 아우는 역시 충신이었다."라면서 상당히 만족한 모습을 보인다.[8] 전제 왕권을 이용하여 왕건을 공개적으로 구제하고 반대파의 입을 다물게 한 장본인은 궁예였지만 따지고 보면 이벤트를 처음부터 기획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성사시킨 사람은 최응이었던 셈. 이후에는 광기가 극에 달한 궁예가 형미대사를 처형하면서 민심과 국운이 완전히 궁예를 떠나 왕건에게 향했다는걸 눈치챈 종간이 최후의 수로 고경참문을 조작해 왕건에게 반역자 혐의를 씌워 죽이려고 하자 최응은 김행선을 비롯한 금서성의 학자들과 함께 도리어 궁예를 칭송하는 내용이라고 해석해 궁예를 속이고 왕건을 구해주기도 하는데 이 모습을 본 종간은 이제 가망이 없다며 완전히 체념했다. 왕건에게는 충언을 아끼지 않으며 진심어린 충성을 바친 것에 비해 궁예에게는 굉장히 사무적으로만 대하였다. 그래서 궁예가 최응을 박대한 것도 아니고 광기로 미쳐가는 시점에서도 오히려 잘 대해준 편이라 비정한 태도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응이 극 중 등장할 시점에서 궁예는 궁예의 최측근들이자 정치계 대선배들인 왕건과 종간의 충언조차도 무시하며 신하들과 백성들을 탄압하는 독선적인 모습을 보여준만큼 당시 10대 소년에 막 관료로 부임한 최응이 간언을 한들 궁예가 들어줄리가 만무했고 궁예는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수준을 넘어서 간언하는 이에게 적의와 살의를 드러낼 정도로 하급자가 충언하는 것 자체를 혐오하였다. 궁예 정권 말기에 이르러서는 강비와 화해하고 강 장자와 부인이 모두 죽어 초상집인 처가에 사위로서 문상가는 일이 도리임을 이전과 달리 강하게 권하는 등 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줬고 아지태처럼 궁예에게 아첨하여 이익을 뜯어내지는 않음으로서 궁예에게는 한때 모시던 군신 관계로서 최소한의 예를 표했다.
조금 냉혹한 일면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조물성 전투 이후 서로 인질을 교환하면서 고려로 온 백제의 인질 진호#s-1.3의 일이다. 조물성 전투의 승리 이후 유리한 고지를 점한 후백제가 파죽지세로 신라를 압박해 들어가자 가뜩이나 자존심이 상해 있던 고려의 장수들은 왕건에게 군사를 일으킬 것을 청한다. 하지만 왕건은 백제에 인질로 가 있는 사촌동생 왕신의 존재 때문에 이들의 청을 들어주지 못한채 방관만 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답답해하던 유금필, 신숭겸, 박술희가 방책을 의논하고자 최응을 찾아간다. 최응은 준비했던 독약[9] 을 내놓으며 진호를 독살할 것을 권하는데 그렇게 되면 왕신도 자연히 목숨을 잃을 것이니 아무런 걸림돌없이 군사를 일으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최응이 준 독약을 받은 유금필은 인질을 관리하던 왕식렴을 찾아갔고 결국 진호는 그렇게 목숨을 잃었으며 최응의 의도대로 백제에서 왕신이 죽게 되자 양국간에 다시 전쟁이 벌어지게 되지만 문제는 이후 벌어진 전쟁이 공산 전투였다는 것이다. 냉정한 면모가 다시 1번 드러나게 되는 부분이 고려가 후백제에 3번째로 패한 삼년산성 전투의 뒷처리 때인데 호족들의 배신으로 또다시 대패한 왕건이 격노하여 개경에 있던 배신자 호족들의 가족들을 전부 끌어내 "철퇴로 때려죽이라"는 명을 내렸을 때 다른 신료와 장수들은 폐주가 연상된다며 너무 심하다고 만류하였으나 최응만은 담담하게 "폐하께서 하시는 일이니 신하가 참견할 부분이 아닙니다."라고 대응하며 참혹한 광경을 표정도 변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았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멘탈이 강한지, 뭔 일이 벌어지든 간에 대부분 무표정하게 상황을 지켜본다.[10]
실제로도 왕건이 크게 의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는 고창 전투 이후 최응이 아파서 쉬고 싶다고 할 때마다 왕건은 "최응이 이 사람하고는, 자네 없이 어떻게 하루라도 이 조정이 잘 굴러갈 수 있겠나?"하며 거절하는 것과 지혜가 필요할 때마다 최응을 찾는 것은 예삿일이며 훗날 혜종이 되는 태자 왕무를 정윤으로 책봉하는 일에 관해 조정이 시끄러웠을 때 "어차피 나중에 다시 이 일이 논의된다 하더라도 결론은 똑같다. 장자 우선이라 했으니 조정의 내분이 심해지기 전에 빠르게 매듭지어야 한다."고 조언하여 왕건이 이를 받아들인 일과 서경에서 왕건을 대신해 만세를 받은 일이 기폭제가 되어 유금필에게 안좋은 감정이 있던 신하들이 유금필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며 올린 상소를 보고 격노하는 왕건에게 "유금필 장군은 분명 죄 없으나 이 일은 폐하께서 원인을 만드신 것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라며 강직하게 직언한 일도 있다.[11] 드라마 중반을 지나서부터 등장 인물들이 최응은 요절하리라는 암시를 대놓고 던진다.[12]
사실 실제 역사상의 관직이나 행적으로는 군사 참모라기보다는 행정 관료에 가까웠던 인물이었지만 궁예 때 등용된 후 왕건 즉위 초까지는 관복을 입었으나 수염을 기른 이후부터는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이 종간처럼 바뀌었다.[13] 조물성 전투 패전의 책임을 지고 최응이 굶어 죽으려 하자 소식을 들은 배현경이 "최응 그 사람이야 욕심이 없고 담백한 사람이니 그럴만도 하다."며 탄식하는 등 조정 신료들 대다수가 최응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학문과 지모를 존경해 공손하게 대한다. 왕건도 최응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인지 건강이 악화되어 안색이 나쁜걸 본 김행선과 복지겸이 휴가를 줘야 한다고 왕건에게 요청하지만 왕건은 "최응 없이 조정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며 병부령보다는 업무가 적은 내봉경으로 자리를 바꿀뿐 휴가를 주지 않았다.[14]
비록 서로 적국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최승우는 시종일관 최응을 아들에게 인자한 아버지와 같은 태도로 대하는데 반해 최응은 최승우를 은근히 라이벌로서 견제하고 경계하는 태도를 보인다.[15] 죽는 날까지 건강에 이상이 없었던 최승우와는 달리 최응은 최승우와 만날 때마다 병에 걸려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약간 궁지에 몰려 있고 긴장한 듯한 모습으로 그려진다.[16] 둘의 맞대면 후 수싸움 장면을 보면 온화한 최승우가 능글맞은 여우처럼 보일 지경. 다만 최응이 죽기 전 예성강 전투 와중이던 제178화의 예성강 포구에서 가진 마지막 만남에서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최응 역시 최승우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고 그에게서 백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나름의 예언[17] 을 하기도 하였다.
성인으로 불리며 궁예와 왕건이 후대한 것을 반영해서인지 제179화~제180화에서 나온 그의 최후는 중병[18] 에 걸린 상태에서 왕건에게 올리는 마지막 상소문을 쓴 뒤 눈을 뜬 채 앉은 자세 그대로 사망한 것으로 묘사되었다.[19] 이후 그의 빈 자리인 후임 병부령은 배현경이 메우게 되며 정신적 후계자는 최지몽이 맡게 된다.[20] 가뜩이나 요절했다는 역사적 사실도 있고 조물성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 플래그를 세우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생환하여 플래그를 분쇄. 그러나 2번째로 병에 걸렸을 때는 얄짤없었으며 궁예가 집권하던 지난 조정에 출사한 것이 14세, 사망 당시 왕건의 조정에서 35세에 사망했다. 수많은 헌책, 차분한 성품, 조급해하는 왕건을 달래는 모습, 요절한 천재 참모라는 그의 모습은 삼국지의 순욱과 곽가를 합친듯한 모습이다.
드라마의 영향인지 신라삼최 중 1명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신라삼최는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이다. 아마 최언위가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유명하지 않아서 그런 듯.최응, 본관은 황주며 대상 우달의 아들이다. 일찌기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그집 오이 줄기에 갑자기 참외가 맺히므로 이웃 사람이 이를 이상히 여겨 나라에 고하니, 궁예가 점을 쳐 말하되, 생남을 하면 나라에 불리하니 기르지 말라 하였으므로 부모가 숨겨 길렀다.
나이 열넷에 궁예의 조정에 발탁되었고, 희대의 신동으로써 나라를 보좌하였다. 사서오경과 문장에 능통하였고 늘 궁예 옆에 머물렀으며 궁예는 그를 성인이라 하여 크게 위하고 아꼈다.
궁예가 포악해진 이후 이른바 관심법으로 많은 사람을 죽일 때 왕건도 누명을 쓰고 위기에 몰린 바 있었으나, 그가 극적으로 구해주어 결국 나라를 얻게 하였다.
왕건이 고려를 세운 이후, 광평성과 내봉성, 병부 등의 중책을 역임하며 총애를 받았고, 늘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며 욕심이 없었다.
이때 홀연히 죽으니 나이가 서른 다섯이었다. 그는 후에 태자태부(太子太傅)가 증직되고, 태조 왕건의 묘정에 배형되었으며 시호는 희개(熙塏)라 하였다.
[1] 대상(大相) 품계를 가진 고위 호족이었다.[2] 드라마에서도 군사 참모의 면모는 일찍 죽은 태평이 많이 보여줬고 최응은 왕실의 행정 업무를 주로 맡으면서 왕건에게 조언하는 모습을 보여줬다.[3] 복지겸, 홍유, 박술희, 유금필, 최지몽, 서필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람들은 시호에 개국 미칭이 붙었다.[4] 신숭겸도 후삼국 통일 이전에 죽었으나 왕건을 살리기 위해 죽은 것이므로 다른 4명의 장군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최응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며 배향공신에 끼워준 것만으로도 엄청난 영예.[5] 오프닝에서의 태평과 최응. 관복으로 미뤄보아 고려 건국 직후이며, 이후 태평이 퇴장한 이후에는 왕규(김명수 역)와 찍었는데, 그 때부터 복장은 종간처럼 평복을 입은 모습이다.[6] 정태우의 경력을 보면 알겠지만 아역 때부터 사극에 출연하다보니 누군가의 어린 시절은 기본이고 요절하는 역할을 엄청 맡았다. 한명회와 왕과 비에서 단종 역, 용의 눈물에서 무안대군 이방번 역, 여인천하에서 인종 역, 왕의 여자에서 폐세자 이지 역. 덕분에 그가 최응을 연기했을 때 최응에 대해 모르던 사람들도 '아, 저 인물도 오래 못살겠구나.'라고 예측하는 스포 아닌 스포가 됐다.[7] 여기서는 극 중 캐릭터 설정에 맞게 궁예 대신 종간이 점을 쳐서 흉사임을 알아내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작중 궁예는 미륵을 자칭하기는 해도 예언이니 관상이니 하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8] 이 때 왕건이 한 말의 뉘앙스를 읽으면 "왕께서 내가 역모를 도모했다고 하셨으면 내가 실제로 도모했든 안했든 한 것이다." 정도다. 그러니 공개적인 자리에서 궁예의 왕권을 높이는 이벤트이기도 했던 것이다. 지록위마의 이벤트가 떠오르는 사건이다.[9] 조물성 전투에서의 굴욕적 협상을 자신의 죄라고 여겨 굶어 죽으려 했으나 집까지 직접 찾아온 왕건의 간청에 마음을 돌린 일이 있다. 하지만 만약 또다시 죄를 짓는다면 망설임없이 목숨을 끊고자 독약을 구해놓았다고 한다.[10] 가령 석총이 철퇴에 맞아 죽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겁을 하거나 충격을 받는 모습을 보였으나 최응은 무표정하게 그 광경을 보았다. 술에 취한 궁예가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였을 때는 최응 역시 놀라는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이 때는 냉혹한 종간마저도 크게 당황하며 놀라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신숭겸을 잃은 후 왕건이 배신한 호족들의 가족을 궁예와 똑같이 철퇴로 때려잡는 방식을 선택하자 왕건의 부인들은 눈을 감고 울음을 터트리고 신숭겸의 의제인 박술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처형 장면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거나 안타까워하는데 최응은 그냥 덤덤하게 무표정으로 처형을 지켜보았다.[11] 헌데 유금필의 삭탈관직과 곡도 유배형은 최응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12] 경보대사의 "신동이 가엾게 되었구나. 남은 수명은 10여 년 정도구나."라는 발언이나 최승우의 "고려의 신동도 딱하게 되었구나. 나보다 더 박한 운이 있다니. 고려의 신동은 올해를 넘기기 어렵겠구나."하는 발언 등.[13] 구체적으로는 제131화 후반 상주에서 아자개를 귀부시키는 임무를 맡을 때 관복을 벗은 것을 시작으로 줄곧 그렇게 나온다. 제131화는 아자개가 귀부함으로써 박술희와 대주도금의 이야기가 끝나고 이흔암의 반란이 진압되어 궁예의 잔여 세력이 완전히 퇴장했으며 그동안 극 중 등장이 없었던 견훤의 셋째아들 견용검이 처음 소개되는 등 궁예가 사실상의 주인공이었던 '시즌 1'이 끝나고 왕건과 견훤이 대립하는 '시즌 2'가 시작되는 경계선이라고 해도 좋은데 최응의 이미지가 바뀌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고증 오류인데 관직을 가지고 있는 몸이니만큼 관복을 입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사실 종간이 평복으로 조정에 오락가락하는 것도 문제인데 광치나에서 물러나 일개 원로로서 정치에 참여하게 된 이후로도 관복을 입고 나오는 박지윤 쪽이 제대로 된 것이다.[14] 이로 인해 이후 최응의 부음을 태자에게 듣고 난 장화왕후는 놀라면서 "그 사람은 그럴만도 하다. 남이 하나를 걱정하면 열을 걱정하는 자리에 있었고 남이 십 년을 생각하면 그 사람은 천 년을 생각하는 자리에 있었다. 이렇게 일찍 가는게 이상하지 않다. 나랏일 때문이다. 너무 많은 일을 하다 죽었다."면서 안타까워했다.[15] 최승우 역의 전무송과 최응 역의 정태우는 이전 작품인 왕과 비에서는 문종과 단종 부자로 출연한 바 있다.[16] 유일하게 최응이 아프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바로 아자개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상주성에서 만났을 때이다. 최응은 최승우를 알았지만 최승우는 백제로 돌아온 뒤에 그가 최응임을 알았다.[17] 최승우가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나 최응은 최승우와의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알게 되고 그것을 죽기 전 왕건에게 올리는 상소들 중 하나에 적어 올렸는데 이를 나중에 본 왕건, 김행선, 복지겸은 놀라울 뿐.[18] 의원의 말로는 간장, 폐장, 위장 등 온 몸에 악성 종기가 퍼졌으며 몇 개월을 넘기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온 몸에 퍼진 악성 종양에 증세가 나타나면 이미 늦었다는 걸로 보아 말기 암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최응은 성인이라면서 고기를 먹지 않고 마치 도를 닦는 사람처럼 정갈한 음식만을 섭취했다고 하는데 정작 그런 사람이 암으로 죽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부분이다.[19] 이러한 형태의 죽음을 불교에서는 좌탈입망(坐脫立亡)이라고 한다. 법력이 높은 고승들이 앉은 자세(坐脫)나 선 자세(立亡)로 열반에 드는 것을 의미한다.[20] 최지몽이 최응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는데 그렇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극 중에서 최지몽은 최응과 각별한 사이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꿈풀이나 점(卜)에 능한 모습만 보여줄뿐 책략을 세우는 모습은 단 1번도 보이지 않으며 극 중에서 최응의 뒤를 이어 병부의 수장이 된 인물은 배현경으로 오히려 배현경이 최응의 빈 자리를 메웠다고 보는 쪽이 적절하다 할 것이다. 다만 최응의 후계자처럼 자주 묘사된건 최지몽이고 배현경은 최응과 특별한 접점이 없었다. 삼국지로 비교하자면 제갈량의 직위는 장완과 비의가 이었지만 강유가 후계자로 자주 인식되는 것과 비슷하다.[21] 180화 초반. 나레이션을 하면서 그의 과거 영상들이 편집해서 올라왔으며, 마지막 문단 즈음 화면에 비춘 그의 위패에는 '대 고려국 병무령 겸 내봉경 부군 신위'이라 적혀 있으며, 시중 김행선을 비롯한 많은 신료들이 상복을 입고 절을 하는 모습을 비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