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안동 김씨
1. 개요
'''安東 金氏(新)'''
안동 지역 호족으로 고려 개국 공신인 김선평[1] 을 시조로 하는 안동 김씨.
2. 역사
인조 때 청서파로 김상헌, 김상용 형제가 나타나면서 관운을 타게 된다. 후손 중에서 김조순이 드디어 왕실의 외척으로 등장하면서 세도 정치로 이름을 날리며, 흥선대원군이 등장하기 전까지 약 60년간 세도를 누린다.
이에 힘입어 신 안동 김씨는 조선 시대 정치가의 최고 영예인 종묘 배향공신을 무려 6명이나 배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밖에도 15명의 정승, 6명의 대제학, 청백리 1명, 9명의 대장, 3명의 왕비(순조비 순원왕후, 헌종비 효현왕후, 철종비 철인왕후)가 나왔다. 장동 김씨라고도 불리우는 이 신 안동 김씨는 일찍이 한양으로 올라와 자리를 잡은 탓에 한양 양반 즉 경반(京班)으로 분류되며, 실제로 경북과 안동지역의 안동 김씨는 선 안동 김씨가 대부분이다.
신 안동 김씨로 유명한 인물로 김상헌, 김상용, 김조순, 김삿갓, 김옥균, 김좌진, 김두한 등이 있다.
숙종 조에 척화파의 거두로 좌의정까지 올랐던 김상헌의 손자인 김수흥과 김수항이 영의정에 오르고, 후에 수항의 아들 김창집도 영의정이 되었다. 단, 이들은 모두 정쟁에 휘말려 유배지에서 사망 혹은 사사되었다. 이후 다시 복귀하게 되는 것은 순조 대의 세도정치. 철종 대로 가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 정승이 모두 후 안동 김씨였던 적도 있었다. 김조순 이래 순(淳), 근(根), 병(炳)자 항렬로 내려오면서 '조선 팔도에 벼슬하지 않은 안동 김씨가 없었다.' 란 말도 나왔다.[2] 위에서 보듯 이 시기의 왕비는 죄다 안동 김씨다. 신정왕후 조씨는 원래 효명세자빈이었고...
참고로 김씨 성에 이름 끝에 "현(顯)", "년(年)", "일(鎰)"자가 들어가 있으면 거의 99% 신 안동 김씨라 보면 된다.[3]
2.1. 장동(壯洞) 김씨와 세도정치
세도정치를 주도한 세력은 흔히 '장동 김씨'라 불리는, '''한양을 근거로 한''' 후 안동 김씨의 한 분파(주로 김상헌 후손)였다. 김창협의 10세손 김계권(金係權), 11세손 김영수(金永銖)에 이르러 점차 가세가 신장되더니, 12세손 김번(金璠)이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장동 김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서울 백악산(白岳山) 아래의 청풍계(淸風溪)와 장의동(壯義洞)에 터전을 마련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이들 장동 김씨는 장동, 즉 장의동(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 일대)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곳은 차후 장동 김씨의 경저(京邸)가 되는 곳이자, 정치적인 거점이 되는 곳이 되었다.
본문에 언급하는 세도정치의 이미지 때문에 외척이란 운빨 하나로 가문이 성장했다는 오해를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위에 나왔듯이 신 안동 김씨, 정확히는 이 장동 김씨는 이미 김상헌 이후 조선의 명가문으로 성장한지 오래된 가문이었다.
당시 정계 고위직에서 영남 남인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며, 지방의 양반들은 영호남 할 것 없이 은거하며 학문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이인좌의 난은 이러한 상황에 기름을 부었다. 그나마 지방 양반 중에는 기호(경기 / 충청) 지역의 노론 이외에 기호 지역의 소론, 남인 일부가 요직에 등용된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영남 유림들은 정조, 순조에 끝없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주장하며 이름도 유명한 영남 만인소를 여러차례 올리기도 했고 훗날 대원군이 세도 정치를 혁파하고 탕평적인 인사를 펼치고 나서야 영남 유림들이 일부 등용되었으며 그들은 이후 대원군의 지지 세력이 되었다.
13세손 김생해(金生海), 14세손 김대효(金大孝)를 지나 15세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에 이르러 그들의 가문은 충절(忠節)의 가문으로 부상하게 된다. 김상헌은 본래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형제지간이었는데,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은 강화도 남문루에서 분신하였고, 김상헌은 척화항전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또한 김상헌은 1639년에 청이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였을 때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에 압송되어 6년 동안 감금되기도 하였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그는 대로(大老)로 인정받으며 북벌의 상징적 인물로 숭앙되었으나, 양주의 석실촌(石室村)에 은거하였다.
장동 김씨는 주류인 노론에 합류하였다. 14세손 부친 김수항(金壽恒)과 백부 김수증(金壽增), 중부 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은 장동 김문을 노론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게 만들었다. 김수흥과 김수항은 송시열ㆍ송준길과 사우 관계를 맺으며, 현종조의 예송논쟁, 숙종조의 환국기를 지나며 노론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1674년의 갑인예송 때에는 춘천과 영암으로 유배되었다가, 1680년 경신환국 이후에는 10년간 형제가 번갈아 가며 영의정에 제수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1689년의 기사환국에 즈음하여 유배 후 사사(賜死)라는 파란을 겪는다. 오직 백부 김수증은 현재의 강원도 화천군 화악산(華嶽山)에 은거하며, 혼란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시파로 노선을 타면서[4] 정조의 눈에 들게 된다. 김조순은 정조가 총애했고 생전에도 그와 사돈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정조 본인도 김조순의 증조부인 김수항 등의 학문을 정순하다고 여겨 존경했을 정도였다. 정조 본인은 노론 자체를 싫어한 것도 아니며, 싫어할 수도 없는 것이 오히려 노론의 영향을 받고 성장한 인물이다. 정조는 문체반정이니 하는 행보를 밟았고 심환지에게 나도 벽파라며 커밍아웃하기도 했다.
안동 김씨는 나라 망하게 한 가문으로 인식이 박혀 있지만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청백리나 훌륭한 관리, 재상도 많다. 오히려 이런 면모 때문에 일찌기 안동 김씨가 융성하게 된 것이다. 세도 정치의 막을 연 김조순도 실록을 보면 관서 지방을 다녀와 백성들의 어려움을 상소한 일도 나오고, 관대한 면도 있는 유능하고 곧은 관료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생전에 정조의 큰 신임을 받는 정조의 친위 세력이었고, 그의 딸이 순조의 비가 된 것도 정조의 유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안동 김씨를 이끌던 시기는 안동 김씨의 전횡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김조순은 당대에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김조순의 뒤를 이어 김조순의 아들인 김좌근과 양손자인 김병기, 또다른 장동 김씨인 김문근 등이 국정을 농단하면서 세도 정치는 모두가 아는 막장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과거에서 왕족을 제치고 장동 김씨 출신이 급제하자 '조선이 이씨의 나라인가, 김씨의 나라인가'를 외친 경평군 이세보[5] 가 털려서 귀양을 갔을 정도였다. 어찌나 이들의 위세가 높았는지 이원경을 추존하려던 역모의 주모자들도 왕은 갈아치워야 하지만 안동 김씨는 보전해야 한다는 소리를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래도 상황이 급변하면 하루 아침에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었음을 우려했는지 왕실의 외척 즉 왕의 장인 자리는 놓지 않았다.
비록 헌종조 초와 철종조의 안동 김씨의 권력 독점은 조선이 망하는 데 크게 기여한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이들은 자기 집안이라면 능력도 안 보고 무조건 요직에 앉힌 여흥 민씨[6] 와는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로 일족 관리가 굉장히 철저한 편이다. 참고로 이 집안은 무능하다고 판단되면 얄짤없이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보내는 건 기본이고 승진도 안 시켜준다.[다만,] 그 흥선대원군마저도 안동 김씨 중 유능한 인사들을 판서급으로 기용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김병학과 김병국을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건 불가능했다.[7] 고종 초의 정승과 재상직을 역임하며 대원군의 개혁 파트너 급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김병학은 고종 초의 대표적 영의정이었고 대원군의 개혁 정책을 뒷받침했으며, 그의 아우인 김병국은 이조 판서, 호조 판서를 역임했고 사창제 실시에 크게 기여했다.[8] 그렇지만 끝내 정승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이 한이 됐는지 대원군 하야를 거들었고 덕분에 고종 친정 이후에 이최응과 함께 정승직을 역임할 수 있었다. 김병기는 병조판서, 좌찬성을 역임했다. 대원군 하야 이후에는 김병덕, 김병교, 김병시, 김병지 등 안동 김씨들이 판서급의 요직에 대거 기용되었다.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은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 엄밀히 말해선 큰 관심이 없던 것에 가깝지만. 천주교 탄압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정순왕후와 벽파 세력이었고 그 이후에 집권한 안동 김씨 입장에선 굳이 천주교 잡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안동 김씨 내부에서는 천주교 신자들도 간간히 나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김상헌의 봉사손인 김건순으로[9] 이 사람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청나라를 정벌하려는 망상을 품고 있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여러 의미에서 시파(時派 : 시류에 영합)다운 면모. 헌종 때의 천주교 박해인 기해박해를 주도한 세력은 풍양 조씨.[10] 그래서 기해박해는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박해라는 해석이 있다. 다만 기해박해 때는 순원왕후 김씨의 수렴청정기였고 김좌근이 대비의 자문을 맡고 있었던데다 바로 다음해에 기해박해를 주도한 정승이자 풍양 조씨와 겹사돈 관계였던 이지연이 탄핵, 유배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풍양 조씨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식으로까지 해석하기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가 그럭저럭 잘 지낸 걸 보면 애초에 두 가문이 싸우기나 한 건지...[11]
3. 인물
3.1. 항렬 미상
4. 관련 문서
- 안동 김씨, 구 안동 김씨
- 풍양 조씨
- 인천 이씨 - 조선시대에 안동 김씨 척족이 있었다면 고려시대에는 대응되는 척족은 인천 이씨가 있다. 이자연(고려)은 정조의 김조순에 비견되는 명망과 훌륭한 인품을 가진 문종의 충신이었으나 후손들인 이자의,이자겸등이 국정 농단한것까지 똑같다.
- 세도정치
- 화산세가필적
[1] 고창 전투에 큰 공을 세운 삼태사 중 일원이다.[2] 물론 100% 는 아니다. 예외는 있다.[3] 전에는 '동(東)'자라고 기술되어 있었으나 의성 김씨에서도 '동(東)'자 항렬이 많아서 제외하였다.[4] 김달순 처럼 사도세자를 비판하던 벽파에 가담한 장동 김씨도 없지는 않았다.[5] 단, 이 말 자체는 경원군 이하전이란 주장도 있다.[6] 민비 민씨의 친정[다만,] 지방의 수령 정도는 무능한 자라도 기용했는데 이러한 행위는 결국 부패한 수령들이 고을을 담당하는 구조가 되게 하였고 이들의 수탈로 삼정의 문란이 심화되었으며 수많은 백성이 이를 못 이기고 민란을 일으키는 시초가 되었다.[7] 참고로 이 둘은 흥선대원군과 친밀한 관계였고 강화도 조약을 반대하거나 유보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런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8] 사창제(社倉制)는 사창을 백성이 직접 관리하는 제도이며 주자의 정책이다. 고종 실록에 김병국이 사창제를 건의하는 기사가 실려있는데 김병국과 고종 모두 주자의 정책임을 인지하고 있다. 사창제 자체도 성공적이라 고종 11년 호조 판서가 고종에게 "그래도 사창제가 환곡 중에서 가장 낫습니다." 라고 할 정도이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9] 다만 김건순은 당시 조선의 실세인 안동 김씨 집안이며 권력의 핵심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사회에 불만을 품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이 다소 이상하다는 역사학자들의 견해도 있다. 나중에 김건순은 역모를 일으키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으나, 안동 김씨 집안의 권세가 워낙 막강해서 일반적으로 역모죄라면 적용되는 연좌제가 안동 김씨 집안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김건순 한 명한테만 책임이 쏠렸다(...)[10] 박해 사건이 풍양 조씨가 득세할 때 일어났기에 풍양 조씨 세력이 박해를 주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박해를 하라고 시킨 인물은 순원왕후였다. 본격적인 탄압이 있던 것도 순원왕후가 "왜 요즘은 서학을 안 때려잡냐? 얼른 때려잡아라" 라고 해서 벌어진 일이다. 사실 안동 김씨가 천주교에 큰 관심이 없었어도 일단 때려잡을 수밖엔 없었을 것이다. 그들 자신도 유자고 유자 중에 신주 불태우고 제사 안 지내는 행위를 옹호할 사람도 그걸 주장할 명분이 있는 사람도 없다. 아무리 안동 김씨가 강하나 천주교를 때려잡지 않는다는 것은 지방 유림들에게 "저 인간들 안 되겠어" 라며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몰아낼 가능성이 높았다.[11] 철종 즉위 후 헌종의 정책을 몽땅 다 뒤집고 헌종을 도왔던 이들을 죄다 처벌했는데 이들 중 풍양 조씨는 조병현 한명 뿐이다. 여담으로 이 인물은 독립운동가 조완구의 증조부이고 조남승의 고조부이다.[C] A B C D E F G H I J K L M N 문정공파. 김상헌의 후손.[12] 아래에 서술된 김옥균이 갑신정변 때 역적으로 몰려 25세 항렬자가 '균(均)'에서 '규(圭)'로 바뀌었다.[B]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문충공파. 김상용의 후손.[13] 실제 피격당한 심영을 제일 먼저 치료한 의사이다. [14] 영화 《덕혜옹주》에서 박해일이 연기한 김장한의 형이자 극 중 해방 이후 김장한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다.[15] 의열단원으로 영화 《밀정》에서 공유가 맡았던 김우진의 실제 모델이다.[16] 같은 30세손이어도 일찍 태어난 사람은 基자가 많고 늦게 태어난 사람은 年자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