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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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934년 가을-겨울 사이에 발생한 후삼국시대의 전투. 고창전투와 더불어 후삼국시대 말기 후백제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린 전투이다.
2. 배경
고창 전투의 대승 이후 고려는 다시금 삼한 통일 경쟁에서 우위에 서며 후백제를 조여오기 시작한다. 이에 후백제는 어려움을 극복해보고자 예성강 전투를 통해 고려의 수군을 악화시키는 등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지만 왕건의 제거라는 소기의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 결정적으로 934년 7월경 쯤 멸망한 옛 발해의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잔존 왕족과 대신들의 귀부를 받아들이며 인적인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동시에 신라를 보호국화 하는 등 날로 영향력을 키워갔다.[1]
3. 진행
934년 9월, 왕건은 후삼국 통일 쟁탈전에서 잡은 우세의 쐐기를 박고 1년 전 신라 전선에서 있었던 전투를 되갚고자 병력을 이끌고 직접 운주성으로 내려가게 된다. 이에 질 세라 견훤 역시 노구의 몸을 이끌고 직접 출정을 감행한다. 문제는 견훤은 등창으로 인해 말을 타는 것조차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심신이 말이 아닌 상태였다는 것.
기껏 전장에 도착했지만 춥고 서릿발과 비가 오는 등 악천후에 더해 역병마저 돌게 되고, 병사들의 사기도 바닥을 치고 있는 사이 유금필의 유격대가 기습을 가해 후백제군이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전의를 상실한 후백제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는 병력 3천여 명이 전사하는 한편 동시에 용장 상달과 최필, 군의 훈겸, 술사 종훈[2] 이 포로로 잡히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4. 결과
후백제 입장에서 이 전투의 패배는 생각보다 뼈 아팠는데 해안가에 위치해있던 운주성을 내주면서 그나마 붙잡고 있던 중국 오월과의 교류조차 끊어져 버렸고 북방의 요충 지대라 할 수 있는 충청 지역을 잃어버리면서 동으로는 영남 지방을, 서로는 충청을 송두리째 날려 먹은 셈이 되어 안보적으로 상당히 취약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에 견훤은 자신이 세상을 떠날 경우 후삼국 통일의 승산에 대해 우려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만다.
이후 후백제는 앞선 연이은 전투의 패전과 함께 왕위 싸움으로 인한 내홍으로 결국 신검의 모반이 일어났고 이후 급격한 쇠락을 겪게 되어 결국 견훤의 고려 귀순과 더불어 일리천 전투를 끝으로 멸망하게 된다.
5. 창작물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운주성 전투'의 묘사는 179회에서 183회 사이로 '''드라마에서는 '운주 전투'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70세에 가까웠던 견훤의 안습함이 제대로 나온다.
한 때, 서라벌까지 침공해 경애왕을 시해하는 동시에 경순왕을 서라벌의 새 임금으로 세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고창 전투 전까지는 왕건을 밀어붙었던 백전노장 견훤은 이 무렵 자식들 간의 왕위 계승 문제와 연이은 패전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등에 욕창이 생기는 등 말 그대로 노쇠해진 상황이었다. 급기야는 요양을 권하는 의원 훈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노구의 병든 몸을 이끌고 무리한 출정을 감행한다. 이 때, 등창으로 고생하는 와중에도 신료들이 오자 위엄을 잃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모습을 보여주는 건 덤.
한편, 왕건은 예성강에서의 후백제군의 기습에 수군이 전멸되고, 황도 개경까지 농락당하는 타격을 받고 나서, 잠시 곡도로 귀양을 가 있던 유금필을 다시 불러오긴 했지만, 그 와중에 신동이면서 고려의 모든 전략을 맡았던 최응이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하는 등 견훤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운이 좋지 않았다.
아무튼, 유금필은 복귀하자마자 '정남대장군'을 맡아서 총사를 담당하게 되었고, 최응의 뒤를 이어 병부령을 맡은 배현경이 운주 전투에서 백제 왕의 친정이 예상된다고 하자 왕건이 '''"백제의 왕이 나온다?! 허....허면 나도 가야지! 백제의 왕이 나온다는데 짐이 꼭 가야 하오!"'''라고 반사적으로 나온다. 이에 시중 김행선이 만류하자 황도는 정윤 왕무에게 맡겨놓고서라도 자신이 직접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군사 훈련[3] 이후에 양국의 군대가 비슷하게 늦가을에 출병을 했는데, 모두 운주까지 오는 동안 곤란을 겪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 후백제군은 견훤의 등창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강풍을 동반한 겨울비 이후의 추위으로 인해 행군이 계속 지연이 된 채 야영을 나흘 동안 했으며, 특히나, 견훤의 환후를 들은 금강이 "우리는 겨울 준비조차 안 했다."라는 말로 미루어보아, 후백제군은 매우 급하게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금강이나 최승우, 박영규, 김총 등이 물러나 다음을 기약하자고 했지만, 그래도 진군을 해야 하는 견훤과 이번을 기회로 왕위 계승에 대해 종지부를 찍으려는 신검 형제의 생각이 맞아떨어지면서 늦게나마 출정을 하게 되었지만, 결국 이로 인해서 거리상 고려군보다 가까웠어도[4] 고려군보다 매우 늦게 도착하였다.[5]
- 고려군 역시 송악(개성)에서부터 이동하던 중에 남천현에서 폭우로 발이 묶이게 되었다.[6] 그러다가 최지몽이 "틀림없이 두 귀인을 만날 것이다."라는 예언에 고려군 내부에서는 반신반의하기는 했지만, 그 직후에 전의성주 이치의 부탁을 받고 온 남천현의 명문 호족 출신인 서목의 도움으로 무사히 남천(南川)을 빠져나오게 되었고[7] , 이후에는 전의성주 이치가 직접 자신의 휘하 정예병을 이끌고 와 합류하면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였다.[8] 물론 고려군은 북쪽에 있는 송악 등지에서 이동을 하다 보니 추위에 매우 강했다.
아무튼, 견훤의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무리하게 행군을 하던 후백제군[9] 은 운주에 늦게 도착한데다 급하게 출전하면서 추위에 대비하지 못하면서 운주에 머무는 동안, 군사들이 동사(冬死)하거나 탈영을 하게 된다. 악화된 상황에 조물성 때처럼 화친을 시도했지만, 고려군 수뇌부는 이를 무시함과 동시에 공격을 준비하게 되었고, 결국, 신검을 중심으로 한 후백제군의 중추는 싸우면서 회군을 하려고 했지만, 삼면을 에워싼 고려군의 공격으로 박살이 나면서 퇴각을 하다가 군사 종훈이 화살을 맞으면서 생포가 되었다.
전투가 시작 되기 전에 견훤은 낡은 수레에 몸을 숨기고, 군졸의 옷으로 갈아 입은 금강과 최승우, 박영규와 함께 도망[10] 을 치게 되는데, 이미 후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전의성주 이치의 추격을 받으면서 미끼용 어차를 몰고 가던 용장 최필이 전사[11] 하였으나, 임성군(현재의 예산군)을 가던 중에 견훤을 태운 마차 바퀴가 빠져 최필의 희생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렸다.
밤을 새우면서 수레를 고쳐 다시 이동하긴 했지만, 얼마 못 가서 이치와 그의 정예 기병들이 추격[12] 을 받으면서 박영규와 남아있던 병사들이 막는 동안, 견훤과 최승우, 금강은 수레 대신 말을 타고 빠져나가는데, 이 와중에 종군을 하던 의원(전의) 훈겸이 낙마를 하였고, 수풀 속에서 피하다가 추격군 중 하나이던 이치의 수하에게 베이고 죽었다.[13] 이후, 임성군 경계에서 살아 돌아온 박영규를 맞으면서 "전의 훈겸이는?"이라고 묻는 견훤에게서 회한이 밀려오는 모습도 보였다.
이후, 나레이션에서는 이 전투가 견훤의 생애 마지막 전투라고 하면서 부상을 당한 병사들과 군졸 차림의 최승우, 박영규, 금강이 뒤에 있으면서 가마에 탄 채로 추위에 떠는 견훤을 데리고 쓸쓸히 회군하는 후백제군과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황도로 개선하는 고려군의 상반된 행보를 비춰주면서 이 전투가 후백제가 멸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학계의 분석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운주(지금의 홍성군)와 웅주(지금의 공주시) 일대의 고을들이 다시 고려에 투항[14] 하였다고 전해준다. 또한, 고려에서는 이 전투의 공신인 이치에게 전의를 본관으로 하면서 이름을 '도(悼)'라고 내렸으며, 관작과 시호까지[15] 주면서 공신들을 치하하는 장면과, 태자들을 부르면서 승계에 있어서 진지하게 생각하려는 견훤의 모습을 비춰주면서 마무리지었다.
어찌되었든, 드라마에서 이 전투는 견훤이 금강에게 후계를 전할 결심을 굳히는 계기로 묘사가 되었다. 사실 견훤은 등창이 악화되면서 혼절을 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으나, 전세 역전에 필사적이었던 견훤은 전의 훈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리며 억지로 전장에 나선다. 하지만, 견훤의 상태에 우려를 표하거나 친정을 반대하던 금강, 최승우, 박영규 등과는 달리 신검을 비롯한 세 아들들은 친정을 반대하기는커녕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검이 견훤의 의지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도 아닌 것이, 극도로 쇠약해진 견훤이 결국 고집을 꺾고 회군을 명령하자, 이번엔 신검이 고집을 부리며 회군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결국 맹추위가 몰아치고 고려군은 어찌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후백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야영지에서 나흘씩이나 머물었고, 운주에 들어서는 제대로 된 전투조차 치르지 못했으며, 이는 결국 운주 전투의 참패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견훤은 아버지이기 이전에 황제인 자신의 안위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황위에 욕심만 가득한 신검에게 보위를 물려준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금강에게 황위를 물려줄 생각을 하게 되는데, 운주 전투 이후 드라마의 회차(184회~190회)는 상당수 장면이 고려보다는 후백제 쪽으로 많이 보여준다.
[1] 이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고위 인사들의 귀부에 대해 고려사는 934년 7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사절요는 925년 12월이라 말하고 있으며 동국통감에는 926년 1월의 일로 적혀 있다. 학계에서는 이 동국통감의 기록 쪽을 더 신뢰하여 926년 1월 이후 고려 쪽에 편입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2] 기본적으로는 점쟁이를 칭하는 말이고, 전근대에는 점쟁이도 국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전장에 따라간 걸 봐서는 책략을 담당하는 책사로 보여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후백제 소속으로서 후에 통일된 고려 측에 의해 폄하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아무튼, 드라마 태조 왕건도 이 설을 따랐는지 종훈을 능환과 최승우와 더불어 후백제의 참모 역할로 소개하면서 신검 측의 인물로 표현한다.[3] 다만, 고려군의 군사 훈련은 과거 태봉 시절 군사 훈련의 영상들을 짜집기 하였다.[4] 후백제의 왕도인 완산주(현재의 전주시)에서 운주(현재의 홍성군)까지는 현 지명을 기준으로 보면, 익산과 군산을 지나 금강을 건너고, 서천, 보령(대천)을 지나면, 홍성이다.[5] 아직 후백제군이 당도하지 못했다는 전의성주 이치의 말을 듣고, 왕건이나 유금필마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6] 그런데,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지금은 북한에 있어서 가늠할 수는 없지만, 개경(현재의 개성시)에서 운주(현재의 홍성군)로 가려면, 일부러 남천현(현재의 이천시)을 거치지 않고, 현 지명을 기준으로 보면, 파주와 서울을 통해 한강을 건너고, 이후 수원, 평택, 천안, 아산(온양), 예산을 거치면 된다. 이 길이 어쩌면 고려군이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길이긴 하다. 물론 181회에서 고려군이 남천현에서 묶였을 때, 홍유의 말처럼 거리로 보면, 상술된 후백제군의 경로가 고려군보다 더 짧다.[7] 처음 서목이 자신이 왜 여기로 왔는지를 밝힐 때, 고려군 수뇌부들은 안도하면서 흐뭇해했는데, 이후, 서목이 "오늘 신이 여기 오지 않았다면, 강물이 넘쳐서 페하의 군대는 모두 물귀신이 될 것입니다!"라고 경고를 할 때, 다들 깜짝 놀라면서 잠시 동안 멈칫하였다. 오죽하면 남천을 건넜을 즈음에 나레이션으로 '구사일생'이라고 표현했을까?[8] 여담으로, 양 군의 대화로 보면, 운주의 지형은 고창과 맞먹는다고 하면서 먼저 선점하는 쪽이 유리한 상황을 맞게 된다고 한다.[9] 182회 초반에 후백제군이 운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온 전령의 보고를 들은 왕건은 '''"견훤 왕이 마차를 타고 올 위인인가? 그것도 이 산악전에?"'''라면서 놀란 반응을 보인다.[10] 이는 공산 전투 당시 왕건이 당했던 그 굴욕을 그대로 닮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왕건과 복지겸, 박수문, 박수경 형제가 군졸의 옷으로 갈아 입고 탈출했으며,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대신 입고, 김락, 전이갑, 전의갑 형제와 함께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11] 사실, 그는 이미 스스로 자청해서 미끼용 어차를 끌고 싸우던 중에 이치(다만, 영상을 자세히 보면, 이치의 수하가 벤 것이다.)에 의해 전사하면서, 본인의 무력 밸런스가 상당히 묘해졌다. 드라마 중반인 97회(2차 나주 공방전의 와중)에서 난전 중이긴 하였지만, 유금필과 호각세로 싸우고 그의 팔이라도 베어본 적이 있던(...) 최필이 이치에게 베였던 것이다. 사실상 드라마에서 무력 밸런스의 배려가 부족한 것도 있으며, 또는 후백제군의 몇몇 장수들이 일찌감치 하차한 데에 따른 영향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력에 있어서는 최필보다 아래로 여겨지는 박영규는 이치와 호각으로 싸운 탓에 박영규가 유금필 급이 아니냐는 뉘앙스가 나왔었다.[12] 182회 막판에 최필이 죽기 전에 미끼용 어차를 보내버린 바람에 이치가 추격했는데, 얼마 못 가서(183회 초반) 어차는 넘어졌고, 그 어차가 비어 있을 뿐 아니라 그 방향이 자신들이 아는 금강 쪽인 것을 안 이치가 견훤이 탔던 낡은 수레가 진짜라는 것을 알고, 즉시 뒤쫓게 되었다.[13] 상술하다시피 사료에서는 최필과 훈겸, 두 사람은 포로로 잡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4] 이들 지역은 과거 웅주성에 있던 이흔암의 모반을 하려고 성을 비우고 나가면서, 후백제로 붙은 지역들이다.[15]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에게 시호까지 내린 건 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