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천 전투

 


'''일리천 전투
一利川 戰鬪
'''

'''시기'''
936년 9월
'''장소'''
고려[1], 선산 일리천 (현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2]
'''원인'''
왕건의 후백제 정벌.
'''교전국'''
후백제
고려
'''지휘관'''
'''견신검'''
견양검
견용검
능환
애술
명길
효봉
덕술
부달
흔강
견달
은술
금식
기타
<^|1> '''왕건'''
'''견훤'''
왕무
박술희
유금필
왕순식
강공훤
긍준
견권
황보금산
왕겸
홍유
길강충
기타
'''병력'''
병력 규모 불명
87,500~10만 7,500 명
'''피해'''
전사 5,700여 명
포로 3,200여 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후백제 멸망
'''영향'''
'''후삼국 통일, 고려 시대 개막.'''
1. 개요
2. 고려 군대 편제
3. 배경
4. 전개
5. 결과
6. 대중 매체의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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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삼국시대의 마지막 서기 936년 고려왕건후백제신검이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대인 일리천에서 맞붙은 전투이며, '''후삼국시대를 종결짓는 최후의 전투.''' 흔히 태조 왕건 때문에 황산벌에서 벌어진 리벤지 매치라고 아는 경우가 있는데 황산은 신검이 패전 후 수도 전주로 철군하다가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함을 깨닫고 항복한 곳이다. 일리천과 황산은 직선거리만 100km 이상 떨어진 곳이다.
특이 사항으로 조선 이전까지 편제가 가장 확실하게 기록된 전투이기도 하다.[3] 그리고 근대 이전 '''내전''' 기준으로 '''한국사 최대 규모의 전투'''이기도 하다. 정확한 총 병력은 모르지만 후백제군도 비슷한 규모였을 것이다. 내지는 수만명을 동원했을 것이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보고 있는 편이다. 즉, 십수만 이상.[4]

2. 고려 군대 편제


다음은 고려사 태조 세가를 바탕으로 만든 고려군 및 백제군 표다.
<colcolor=black> '''고려의 남정 선봉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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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정윤(正胤) 왕무'''
'''부지휘관'''
'''장군(將軍) 박술희'''
'''총 병력'''
'''보병 & 기마병 10,000명'''

<colcolor=black> '''고려의 남정 본대'''
[ 접기 - 펼치기 ]
'''최고 지휘관'''
'''고려국왕(高麗國王) 왕건'''
'''부지휘관'''
'''상보(尙父) 견훤 & 정윤(正胤) 왕무'''
'''좌강(左綱)'''
'''중군(中軍)'''
'''우강(右綱)'''
'''보병 3,000명
기마병 10,000명'''
'''보병 10,000명
기마병 20,000명
이민족 기마병 9,500명'''
'''보병 10,000명
기마병 10,000명'''
'''삼군원병(三軍援兵)'''
'''기마병 300명
호족 사병 14,700명'''

<colcolor=black> '''고려의 남정 본대 지휘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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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강(左綱) 지휘관'''
'''중군(中軍) 지휘관'''
'''우강(右綱) 지휘관'''
상보(尙父)
견훤
명주대광(溟州大匡)
왕순식
대상(大相)
김철
대상(大相)
박술희
대상(大相)
긍준
대상(大相)
홍유
대상(大相)
견권
대상(大相)
왕겸
대상(大相)
박수경
대상(大相)
황보금산
대상(大相)
왕예
원보(元甫)
연주
원윤(元尹)
강유영
원보(元甫)
인일
원윤(元尹)
훤랑
지천군(支天軍) 대장군
원윤(元尹)
능달
대상(大相)
유금필
보천군(輔天軍) 대장군
원윤(元尹)
삼순
원윤(元尹)
기언
원윤(元尹)
관무
원윤(元尹)
준랑
원윤(元尹)
한순명
원윤(元尹)
관헌
정조(正朝)
영유
원윤(元尹)
흔악
우천군(祐天軍) 대장군
원윤(元尹)
정순
정조(正朝)
길강충
정조(正朝)
영직
정조(正朝)
애진
정조(正朝)
흔계
정조(正朝)
광세
천무군(天武軍) 대장군
원윤(元尹)
종희




간천군(杆天軍) 대장군
김극종




원보(元甫)
조간


'''삼군원병(三軍援兵) 지휘관'''
장군(將軍)
왕함필
대장군(大將軍)
대상(大相)
공훤
원윤(元尹)
능필

고려는 백제 정벌을 위해 뽑을 수 있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였다. 먼저 태자 왕무가 박술희와 함께 고려 본대가 올 자리를 만들었고, 왕건은 군대를 네 부대[5]로 나누어 전진했다. 왕건 직할 부대와 고려 소속 호족의 사병들이 주를 이뤘으며 기타 성주의 사병들과 흑수말갈, 철륵, 달고적 등 이민족의 기병까지 모조리 참전했다.
이뿐만 아니라 왕건 휘하엔 왕무, 견훤, 홍유, 박술희, 왕순식, 유금필, 박수경 등 모든 후삼국의 호걸들이 모여 최종 스타진을 이루었다.
상보 견훤은 전 백제국왕으로써 태자 왕무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 최고 사령관인 왕건과 함께 같은 자리서 군대를 사열할 자격을 받았고 좌군 일만 기마병의 사령관이 되었다.
<colcolor=black> '''백제의 북벌 본대 지휘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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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지휘관'''
'''백제국왕(百濟國王) 견신검'''
'''휘하 지휘관'''
청주성주(菁州城主) 양검
광주성주(光州城主) 용검
능환


좌장군(左將軍) 효봉
좌장군(左將軍) 덕술
좌장군(左將軍) 애술
좌장군(左將軍) 명길
부달
장군(將軍) 흔강
장군(將軍) 견달
장군(將軍) 은술
장군(將軍) 금식
장군(將軍) 우봉


3. 배경


930년 고창 전투, 934년 운주성 전투를 계기로 후삼국의 주도권은 고려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 고려는 전방향에서 후백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고 이로 인해 후백제의 판도는 급격히 축소된다. 또한 934년, 멸망한 발해의 태자 대광현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에 귀순해왔다. 그리고 935년 오랜 전란을 더이상 버티지 못한 천년 왕조 신라도 마침내 고려에게 항복한다. 이리하여 고려는 후삼국의 2/3를 아우르는 영토들을 모두 평정하였고 이제 남은 것은 후백제 한 나라뿐인 상황이 된다.
하지만 비록 늙었다고는 하나 견훤은 후삼국 최강의 무장이었고 비옥한 한반도 남부 곡창 지대를 근거지로 한 후백제의 군사력 역시 탄탄했다.[6] 이렇듯 후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무언가 절호의 기회가 필요한 상황.
그러한 와중에 왕건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가 찾아온다. 후백제의 후계자 다툼 끝에 맏아들 신검이 이복 동생 견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유폐한 후 임금의 자리에 오른 것.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되지만 틈을 봐서 탈출, 고려로 귀부하게 된다. 왕건은 평생 동안 싸워왔던 이 희대의 라이벌을 상보(尙父)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한다. 견훤은 자신을 배반한 아들을 벌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하며 왕건에 대한 적극 협조를 약속한다.

4. 전개


936년 마침내 왕건은 전군을 동원해서 후백제를 침공한다. 견훤은 아들을 벌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이 멸망시키기 위해(...) 왕건에게 간곡히 요청해서 함께 출진한다. 왕건이 동원한 군세는 삼국사기에는 총 10만 7천 5백명, 고려사에는 8만 7천 5백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 따른 고려군의 총 병력 구성은 앞을 섰던 견훤과 박술희와 더불어 기병 1만명, 제2군은 보병 1만명, 홍유와 박수문이 거느린 제3군은 기병 1만명, 명주에서 올라온 왕순식의 기병 2만명, 유금필이 끌고온 북방 유목민족인 흑수말갈, 달고, 철륵등의 군사 9천 5백명, 그리고 왕건의 본군을 합쳐 총 동원 병력은 8만 ~ 9만에 달해 후삼국 시대 최대 규모였다. 그것도 기병이 4만 7천 5백에 보병이 약 4만으로 기병이 더 많았다.
결전장은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대인 일리천.[7] 신검 역시 후백제의 모든 전력을 총동원해서 맞선다.[8] 왕건은 전군을 좌군 우군 중군 후군으로 편성했고, 신검 역시 유사한 진형으로 맞선다.
양측 모두 막대한 군사를 동원했지만 고려군의 좌군에는 견훤이 있었고, 건국 군주이자 상왕 견훤이 적진의 장수로 서 있는 모습을 일리천 건너편에서 본 후백제군 병사들은 사기를 잃어, 선봉 애술, 효봉, 덕술, 명길 등의 장수들이 그대로 무릎을 꿇고 투항해 버렸으며, 효봉은 총사령관 견신검이 중군에 있다는 정보까지 일러바친다. 또한 후백제군 우군을 이끌던 견훤사위 박영규는, 이미 고려군과 전투가 벌어지면 배반하기로 약속을 해놓은 상태였다. 전투의 승패는 싸우기 전에 이미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중군끼리는 나름대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당시 고려 중군의 선봉이 다름아닌 인간 흉기 유금필과 그가 이끌던 말갈, 돌궐 기병 1만이었던 만큼 후백제군이 전사자만 6천, 사로잡히거나 도망친 자는 헤아릴 수 없는 등 대패했다[9]. 후백제군 좌군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우익과 중앙이 박살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있었을리는 만무하다. 후백제군의 사상자가 1만에 가까워진[10] 전투 막바지에는 후백제군이 자기들끼리(!) 싸웠다고 한다.[11][12]

5. 결과


결국 전투는 고려군의 대승으로 끝나고, 신검은 추풍령을 넘고 탄령(탄현이라고도 하며 대전 동구와 충북 옥천군 군서면의 경계의 식장산에 있는 고개로 추정된다.)을 넘어 수도 완산주(전주시)로 퇴각하려 했으나, 고려군은 전주 코앞의 황산군[13]까지 쫓아왔고, 조물군에서 본부장군이었던 이능필[14] 등의 장수로 의해 신검은 마성(한자로는 馬城으로 논산군 황산벌로 유명한 논산군 연산면 또는 익산 미륵산성)에 고립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항복한다. 반란에 참여한 백제의 장수들은 대부분 처형당하지만, 신검 본인은 왕건의 용서를 받고 살아난다. 그리고 그걸 본 견훤은 울화통이 터져서 결국 얼마 안가 병사하고 만다. 신검이 결국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고 사실은 견훤이 이후 암살당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로서 왕건은 50년 가까이 지속된 후삼국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마침내 통일 왕조로서의 고려의 역사가 시작하게 된다.

6. 대중 매체의 묘사


태조 왕건에서도 이 전투가 극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양측의 전력은 거의 비등한 편이었다. 후백제 영토가 물자가 풍부한 편인 경상남도, 전라도 쪽에 속해있다보니(나레이션이 199회에서 언급한다.) 후백제군도 고려군 만큼이나 대규모 병력을 꾸릴 수 있던 것. 신검을 위시한 수뇌부의 의기도 드높았고 병력 차이도 얼마 없으니 해볼만한 싸움이었으나 정작 전투는 너무나 허망하게 끝나고말았다. '''하필이면 고려군 선봉이 견훤이었기 때문.'''
원래 왕건은 노령인데다 등창까지 난 견훤을 전장터에 데려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거두고 패륜아들을 처벌하려는 견훤이 전장에 자신을 데리고 가달라고 계속 간청[15]하여 견훤 역시 일리천 전투에 참전한다. 선봉을 정할 때 견훤은 자신을 선봉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하는데 당연히 직접 싸우겠다는건 아니고, 후백제인들의 견훤에 대한 이미지를 이용해 단체 모랄빵을 유도하겠다는 견훤의 계책이었다. 이전에 견훤이 호령하자 상귀의 병사들이 명령을 듣지 않은 것을 본 유금필과 윤신달은 견훤의 요청을 지지했고 왕건도 그 요청을 받아들인다. 선봉에 선 견훤의 부장들로 유금필, 홍유, 배현경 등 고려의 간판급 장수들이 붙는다.
견훤의 예상대로 후백제 병사들은 견훤을 보자마자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견훤은 공세를 펼치지 않고 후백제군의 내부 분열을 유도한다(부적절한 때에 공격하면 오히려 후백제군이 결집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대놓고 깃발에 '''고려국 황제 상부 견훤'''이라고 적혀있기까지 했으니 백제군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이끌었던 영웅과 마주하게 된 셈. 분명 낮에 공격 명령을 내렸건만, 밤이 될 때까지 후백제 병사들은 진격도 후퇴도 하지않고 우물쭈물하며, 오죽하면 최초 공격 명령을 내렸을 때도 애술 혼자서만 달려나갈 뿐 아무도 달려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애술은 부장 몇명을 처단하고 억지로 군대를 전진시키는데, 후백제군의 사기가 완전히 떨어졌음을 파악한 견훤은 "나의 군사들이여! 백성들이여! 어서 오라! 두려워 말고 오라! 어서 오라! 무기를 버리는 자는 모두 살려줄 것이다. 버려라! 다 버려라! 버려!"라고 외쳤고, 동시에 고려군은 공세에 나서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후백제군의 탈영병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고, 지리멸렬한 싸움 끝에 애술김총이 포로로 잡히고 만다. 오죽하면 양검이 아버지가 아니라 원수라 절규할 정도. 견훤의 동생 능애도 백제를 고려에 갖다 바친다며 한탄했다. 이 와중에 싸우라고 독촉하는 백제 장수들이 고려 장수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생포된다. 상애는 배현경에게, 상귀는 유금필에게 죽는다.
신검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황산에 재집결하고자 했으나, 후퇴하던 중 또다시 다수의 탈영병이 발생하여, 황산에 도착할 때 쯤엔 10만의 대군 중에서 겨우 3만도 남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항복한 애술과 김총이 후백제군의 이동 계획을 토설하여 고려군은 미리 기병 5만을 보내 황산을 포위했고, 결국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신검은 능환의 제안에 따라 고려에 항복한다. 능애, 능환, 양검, 용검,신덕 등 쿠테타 주역들은 모조리 처형 당했고, 신검은 유배형에 처하지만, 이용가치가 사라진데다 후백제의 구심점인 그를 살려둘 이유가 없었던 고려는 결국 얼마 후 신검을 말 그대로 증발시켜버린다. 기록이 말소된 모양새인데, 죽였다는 썰이 유력하다. 태조 왕건에서도 나중에 죽였다는 식으로 묘사했다. 단 기본적으로 반란의 주역이고 왕자에 불과했던 양검, 용검과 달리 신검은 어쨌건 후백제의 군주였고 동정여론도 상당했기 때문에 대놓고 죽이고 기록이 남기면 구 백제 주민들을 자극할 게 뻔히 보인다. 그래서 없애 버리고는 아예 존재 자체를 말소하는 것으로 대응했을 것이다.
제국의 아침에서는 전작의 태조 왕건에서의 묘사와 달리 혜종이 병약해진 이유를 설명하려고 일리천 전투인 암시를 나타내는 장면을 내보낸다. 물론 성벽 근처로 무대여서 일리천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후의 상황을 보았을 때, 마지막 전투에서 백제 병사들을 많이 죽이다가 트라우마가 걸린 것으로 묘사되었다.
태조 왕건 : 제국의 아침에서는 왕건, 견훤 캠페인의 마지막 미션으로 구현되었고 서로 다른 맵을 사용한다. 왕건 캠페인에서는 고려로 투항하는 견훤을 데려온 뒤 신검, 양검, 용검, 능환을 처치하고 후백제군을 전멸시켜야 한다. 견훤 캠페인에서는 견훤이 신검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IF설정이 붙었으며 미션에서 고려군을 전멸시키면 된다.
천년의 신화의 대고려 건국 캠페인에서도 마지막 미션으로 나왔다. 이름은 '천하 통일'.

[1] 당시 신라는 이미 항복해 세상의 뒤안길로 사라진 국가였다.[2] 해평면이나 선산읍, 고아읍이라는 설도 있다.[3] 단 후백제 편제는 제외.[4] 그나마 신라말 달벌 전투 경우 신라에서 10만이 동원되었지만 다른 한쪽이 너무 적어(5천명) 일리천 전투보다는 총합 규모로 밀린다.[5] 좌우중 삼군 + 지원부대.[6] 고창 전투 이후 계속 밀리던 와중에도 견훤은 신하들에게 우리 백제의 군사력이 고려의 두배인데 왜 자꾸 밀리는거냐고 한탄한다.[7] 그래서 선산과 구미 일대에는 일리천 전투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져 오는데, '일리천'이 정확히 어떤 물줄기를 칭하는 것인지까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낙동강이라는 설도 있고 현재 선산읍을 관류하는 낙동강 지류라는 설도 있다.[8] 당시 고려의 영토는 통일 신라 9주 중 한주 삭주 명주 상주 양주 웅주의 반으로 5.5주. 후백제는 나머지 3.5주였다. 하지만 삭주나 명주 등은 곡식과 인구가 부족했으며, (물론 한주가 그만큼 커버했겠으나) 후백제의 영토가 지금의 전라 경남 충남을 아우르는 곡창 지대였고, 인구도 많았으며, 후백제군은 보병 중심 편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6만~7만 정도는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혹은 비슷하거나 이상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다만 대개 해볼만한 병력을 동원했지만 총 병력으론 고려군보다는 적을 것이거나 비슷한 범주로 보는게 많다.[9] 유금필은 북방의 말갈족을 토벌하고 그들에게 대추장이라는 칭호를 받은 바 있다.[10] 후백제군 3,200인을 사로잡고 5,7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11] 아마 견훤을 그리워하는 세력이 반기를 든 것을 보인다.[12] 또 다른 추정으론 모랄빵이난 부대가 제멋대로 퇴각하는 와중에 퇴각을 막는 자군 후방부대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13] 백제가 멸망할 때의 그 '''황산벌''' 맞다.[14] 본래 본피현(지금의 성주)을 다스리던 호족으로서 지금의 성산이씨 시조공이다. 이 일로 왕건에게 일통의 일(一)을 하사받아 이능일이라 불렸다. 통일 뒤에는 일통공신인 삼중대광과 삼공 중 하나인 사공이 되었다. 백작위를 받아 성산백에 봉해졌다.[15] 무릎을 꿇겠다고도 하고, 그래도 왕건이 주저하자 아예 빌겠다고까지 하면서 겨우 얻어낸 출전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