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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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11월 22일 ~ 1999년 8월 31일
대한민국의 코미디언이자 미국 영구거주권자 신분을 지녔던 개신교 목사. 영문 이름은 케이 곽((Kay Kwark)이다.
경기도 안성시에서 출생한 그는 1957년에 영화 《후라이보이 박사 소동》을 촬영하였다. 1992년에는 한마음교회 원로목사가 되었다가, 미국 뉴욕 한국기독교방송국 국장이 되었다. 1999년, 지병인 췌장암으로 뉴욕에서 7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948년에 연극배우로 첫 데뷔하였고, 이듬해 1949년에는 테너 성악가로도 데뷔한 그는 '후라이 보이(Fly boy)'[1] 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며 1950~70년대 대한민국 코미디계를 이끌었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이름을 떨쳤다.
공군 군악대에서 활동하던 시절이었던 1951년, 우연찮게 서울 명동의 은성 뮤직 살롱에 출연한 것을 시작을 계기로 군 전역 이후 1956년 일반 극장 무대에 진출했다. 그는 성대모사와 원맨쇼의 개척자로 꼽혔으며, '막둥이' 구봉서와 콤비를 이루어 1970년대 텔레비전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57년 〈후라이 보이 아워〉·〈다이얼 Y를 돌려라〉·〈군 위문 열차〉 등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영화 〈후라이 보이 박사 소동〉에 출연했다. 그는 해박한 지식과 능숙한 언어 구사 능력을 갖춘 방송 사회자로 더 유명했다. 1964년부터 동양방송(TBC)의 〈쇼쇼쇼〉를 11년간 진행한 것을 비롯해 한국방송공사의〈KBS배 쟁탈 전국노래자랑〉(전국노래자랑의 전신)과〈100분쇼〉, 문화방송(MBC)의 〈청춘 만세〉·〈토요일 토요일 밤에〉 등 많은 프로그램을 이끌면서 명성을 떨쳤다.
1970년대 초, 직접 설립한 광고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어려움에 처하자 신앙 생활을 시작했고, 동료 연예인들과 서울특별시에 연예인 교회를 세웠다. 1982년 한국방송공사(KBS)의 〈백분 쇼〉 진행을 끝으로 대한민국에서의 연예 활동을 접고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신학 공부를 한 뒤 1984년, 침례교회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1992년, 뉴욕의 한마음침례교회에서 원로목사로서 활동하였고, 한국기독교방송국 국장을 역임하였다. 1989년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곽규석 목사 초청 연합전도대성회' 참석차 대한민국을 방문하는 등 대한민국 선교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1928년 11월 22일 ~ 1999년 8월 31일
1. 소개
대한민국의 코미디언이자 미국 영구거주권자 신분을 지녔던 개신교 목사. 영문 이름은 케이 곽((Kay Kwark)이다.
경기도 안성시에서 출생한 그는 1957년에 영화 《후라이보이 박사 소동》을 촬영하였다. 1992년에는 한마음교회 원로목사가 되었다가, 미국 뉴욕 한국기독교방송국 국장이 되었다. 1999년, 지병인 췌장암으로 뉴욕에서 7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2. 경력
2.1. 연예인 활동
1948년에 연극배우로 첫 데뷔하였고, 이듬해 1949년에는 테너 성악가로도 데뷔한 그는 '후라이 보이(Fly boy)'[1] 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며 1950~70년대 대한민국 코미디계를 이끌었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이름을 떨쳤다.
공군 군악대에서 활동하던 시절이었던 1951년, 우연찮게 서울 명동의 은성 뮤직 살롱에 출연한 것을 시작을 계기로 군 전역 이후 1956년 일반 극장 무대에 진출했다. 그는 성대모사와 원맨쇼의 개척자로 꼽혔으며, '막둥이' 구봉서와 콤비를 이루어 1970년대 텔레비전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57년 〈후라이 보이 아워〉·〈다이얼 Y를 돌려라〉·〈군 위문 열차〉 등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영화 〈후라이 보이 박사 소동〉에 출연했다. 그는 해박한 지식과 능숙한 언어 구사 능력을 갖춘 방송 사회자로 더 유명했다. 1964년부터 동양방송(TBC)의 〈쇼쇼쇼〉를 11년간 진행한 것을 비롯해 한국방송공사의〈KBS배 쟁탈 전국노래자랑〉(전국노래자랑의 전신)과〈100분쇼〉, 문화방송(MBC)의 〈청춘 만세〉·〈토요일 토요일 밤에〉 등 많은 프로그램을 이끌면서 명성을 떨쳤다.
2.2. 목회 활동
1970년대 초, 직접 설립한 광고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어려움에 처하자 신앙 생활을 시작했고, 동료 연예인들과 서울특별시에 연예인 교회를 세웠다. 1982년 한국방송공사(KBS)의 〈백분 쇼〉 진행을 끝으로 대한민국에서의 연예 활동을 접고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신학 공부를 한 뒤 1984년, 침례교회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1992년, 뉴욕의 한마음침례교회에서 원로목사로서 활동하였고, 한국기독교방송국 국장을 역임하였다. 1989년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곽규석 목사 초청 연합전도대성회' 참석차 대한민국을 방문하는 등 대한민국 선교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1] 공군 연예대에서 출발해 날아다니는 소년이라는 뜻의 fly boy라는 애칭을 얻었다.